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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예슬 Jan 15. 2019

특급 호텔

언제부터 내가 그녀에게 ‘손님’이 되었을까요.


12월 31일. 새로운 해를 앞두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공간으로 향합니다. 나 또한 어디로 가면 좋을까 생각하다 곧바로 이곳이 떠올랐습니다. 나만의 특급 호텔. 나는 내가 원하면 언제고 이 특급 호텔에 가서 머물 수 있습니다. 남는 방이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나는 갈 수 있습니다. 기별 없이 무작정 들어간 적도 있습니다. 시설도 훌륭합니다. 초록색으로 무성한 식물들은 내 눈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벽면 가득한 책과 LP판 덕에 나는 심심할 틈이 없습니다. 책장 사이에선 내 어린 시절 사진과 내가 외국에서 보내온 엽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경기도 고양시의 한 아파트 23층에 위치한 내 특급 호텔. 주인은 나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입니다.


주인 부부는 참 친절하십니다. 특히 안주인 분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눈을 가지고 계십니다. 매 끼니는 코스요리가 기본입니다. 안주인이 어찌나 부지런한지 밥을 다 먹으면 어느새 커피가 나오고, 커피를 마실 땐 과일이 나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이 옛날 음식 밖에 할 줄 모른다며 아쉬워합니다. 그녀는 늦게 일어난 내가 혼자 먹으면 심심할까 내 앞에 앉아 내게 말을 겁니다. 어디선가 자꾸 등장하는 귤은 내가 온다고 하여 그녀가 미리 사 둔 것입니다.


이 호텔은 손님이 따뜻하게 머무르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2018년의 마지막 날, 안타깝게도 이곳엔 겨울 이불이 부족했습니다. 안주인은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이불을 두 개 덮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습니다. 방도 충분히 따뜻했기 때문입니다. 잠들기 전 나는 내 이부자리에서 한 몸이 된 두 개의 이불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모르는 사이 그녀는 바느질로 두 이불을 이어붙여 두었습니다. 혹여나 두 개의 이불이 각자의 방향으로 움직여 내가 추워질까 염려한 탓입니다.


안주인은 특급 잔소리 서비스도 제공합니다. 이따금 내가 남편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 잠을 자지 않거나, 그녀가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옆에서 책을 펼쳐 들면, 그녀의 특급 서비스를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녀는 나를 자게 내버려두라며 남편을 채근합니다. 공부하는 데 TV 소리는 방해가 된다며 당신이 TV를 끄고 방으로 들어갑니다.


언제부터 내가 그녀에게 ‘손님’이 되었을까요. 그녀의 손에 9년을 길러졌는데 말입니다. 요 몇 년 외국과 한국을 오가며 살아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그 전, 당장 해야 하는 숙제가 할머니 댁에 가는 일보다 중요해질 때부터 그랬을까요. 내가 오는 날이면 그녀는 비일상적인 노력을 들여 나를 맞이합니다. 이제는 내가 그녀에게 반갑지만 어려운, 손님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늘은 밀린 숙박비를 지불해야겠습니다. 숙박비는 전화 한 통.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는 전화 한 통이 숙박비의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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