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것

by 알머리 제이슨

아주 가끔은,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친절한 가게들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가게들에선 '친절성'에 있어 어떤 스케일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고 싶지만 한 마디로 정의되는 스케일은 아니다. 말하자면 아래의 일화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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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신시가지 쪽에 아내와 자주 가는 포베이(쌀국수 체인점)가 하나 있다. 집 앞에 있는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을 하고 나면 허기진 배를 채우러 종종 들르는 곳이다. 나는 양지 쌀국수를 시키고 아내는 반미&분짜 세트를 시켜서 함께 나눠 먹는다. 반미&분짜는 베트남 샌드위치인 반미와 샐러드 느낌의 비빔국수인 분짜를 함께 주는 가성비가 좋은 세트다. 가게에는 오너인 듯한 날씬한 아주머니 사장님이 항상 손님들을 맞는다. 엄청나게 밝고 큰 목소리로 모든 손님에게 친절히 인사를 하는 기분 좋은 곳이다.


하루는 아내가 서울로 출장을 간 날, 혼자 그 포베이에 가서 식사를 하였다. 열심히 운동을 하고 허기진 상태였다. 가게에 들어가니 점식식사 전이라 손님이 얼마 없었다. 사장님이 넓은 자리에 앉고 싶은 대로 앉으라고 하셨다. 나는 곧 손님이 많이 올 테니 2인용 작은 테이블에 앉겠다고 했다. 반미&분짜 세트를 주문하였다. 아내가 출장 가서 혼자 먹으러 왔다고 했다. 사장님은 미소는 유지한 채로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주둥이가 얇은 주전자에서 자스민차를 따라서 한 모금 마셨다. 잠깐 휴대폰을 보며 시간을 때웠다. 잠시 후 테이블에 엄청난 접시들이 서빙이 되었다. 심상치 않은 기분이었다. 내가 시키지 않은 양지 쌀국수가 딸려 나와 있었다. 사장님이 웃으며 말했다. "국물을 좀 더 드리려고 큰 그릇에 담다가 필 받아서 면도 같이 넣었어요~ 고수도 좋아하셨던 거 같아서 많이 가져왔어요!"


나도 뭔가 보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거 꼭 다 먹을게요~"라고 답했다. 사장님의 얼굴에 화색이 20% 더 강해졌다. 눈인사를 하고 다시 한번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이걸 다 먹어야 한다. 자세히 보니 거의 모든 메뉴가 평소보다 더 많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수 접시에는 시금치 한 단 분량의 고수가 담겨 있었다. 메인 접시에는 돼지고기 볶음이 거의 반 근 정도 들어있었고, 소스에 찍어 먹는 얇은 국수도 잔치국수 두 그릇 분량이 들어 있었다. 부드럽지만 바삭하게 구워진 바게트 빵도 오늘따라 유달리 벌크업 된 것 같았다. 아마도 제일 큰 빵을 담아 주신 것 같았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이 그렇게 말했던가.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는 편이 낫다고... 나는 왜 시키지도 않은 '꼭 다 먹겠다'는 말을 꺼낸 것일까.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게 있었다. 앞서 얘기했던 스케일에 대한 임계점 돌파 때문이다. 내가 수용 가능한 스케일 이상의 환대를 받으면 그런 게 생긴다.


'이 친절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이런 의지 같은 게 생긴다.


나는 테이블에 쌓인 엄청난 양의 음식들을 홀로 마주하며, 어떻게 시작할지 고민했다. 일단 불어서 양이 늘어날 수 있는 따뜻한 쌀국수(서비스)를 먼저 해치웠다. 그리고 이어서 소스에 찍어먹는 차가운 면을 먹기 시작했다. 뱃속에서 면이 뭉치지 않도록 정기적으로 야채를 먹어 주며 완급조절을 했다. 그렇게 엄청난 여정이 시작되었다.


음식은 정말이지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았다. 특히 바게트 빵을 앞두고는 약간의 딜레마에 빠지기도 했다. 그냥 남길까? "너무 많아서 결국 남겼어요"라고 애써 핑계를 대도 괜찮을 텐데. 정말 타협하고 싶었다. 그런데 퍼뜩 머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언젠가 해외토픽에서 17년 연속 핫도그 먹기 대회 챔피언을 차지한 조그마한 체구의 일본 남자가 나오는 장면이었다. 그 남자는 핫도그 빵을 양손으로 꼭 쥐어 부피를 최대한 작게 해서 핫도그를 먹었다. 그 스킬을 통해 먹기 대회에서 오래도록 왕좌에 군림했고, 나중에는 주변에 있는 거대한 미국인 선수들도 모두 그 남자를 따라 했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


나는 잠깐 주변 테이블을 두리번거린 후,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바게트 빵을 양손으로 꼭 쥐었다. 정말 절반 크기로 줄어들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왠지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고나 할까. 때마침 가게의 스피커에서 아델이 부르는 'Hello'가 퍼져 나왔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폭식의 여정에 비장미가 더욱 가미되었다.

음식을 다 먹는 동안 두 테이블의 손님이 식사를 마치고 떠났다. 나는 끝끝내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혼밥이니 대화를 나눌 상대도 없었다) 묵언수행을 하는 파행승처럼 앉아서 모든 요리를 해치웠다. 면을 찍어먹는 소스도 한 방울도 남기지 않았다. 모든 식사를 마치고 자스민차를 한 잔 더 따라서 마셨다. 가게 스피커에는 카더가든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복잡 미묘한 기분이 드는 순간이었다.


뱃속으로 따스한 차가 흘러가는 감촉이 퍼지는 게 느껴졌다.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이 느껴졌다. 유난스럽기 짝이 없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고 공격적이라도 선의는 죽지 않았다고 외치고 싶었다. 뭔가 지구의 평화에 일조한 기분이었다.


내가 먹었던 빈 접시들을 차곡차곡 포개어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하러 나오던 사장님이 내가 앉았던 테이블을 보더니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다 드셨네요!" 나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카드를 받아 가게 밖을 나섰다. 10월 말의 서귀포는 새파란 하늘 아래 따뜻하면서도 시원한 날씨를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양배추 추출물로 만들어진 초강력 소화제 두 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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