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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네이 Aug 06. 2024

즐기기에 적합한 나이

신문구독하는 벨기에 청년과 보러 간 쇼

피곤해서 쉴까하다 나가는 날엔 꼭 무슨 일이 생긴다. 벨기에 맥주를 마실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 데릴리움에 왔다. 호텔 근처에 있는 이 펍은 굉장히 시끄럽고 늘 붐비기 때문에 테이블에서 일기 쓸 형편이 못 된다. 맥주를 홀짝이며 휴대폰 메모장에 일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한 남성이 무슨 맥주를 마시냐고 말을 걸었다. 그의 손엔 응당 있어야 할 맥주가 없다. 맥주는 왜 안 마시냐고 물으니 본인은 커피와 초콜렛만 먹는다고. 아니 그런 사람이 벨기에 맥주를 2004종 보유해 기네스북까지 오른 펍은 왜 오니?

 

예전에 하키선수였다가 지금은 법 관련한 일을 하는 브뤼셀 토박이 아드리앙은 노키아에서 최근 삼성으로 휴대폰을 바꿨다고 했다. 기본 배경화면에 앱도 별로 없어서 사실인 듯하다. 인터넷 뉴스 대신 신문을 구독해서 보고 SNS도 하지 않는 보기 드문 청년이었다. 혼자 있을 땐 생각을 끊임없이 적는다면서 휴대폰 노트앱을 보여줬는데 영어와 불어로 빼곡하게 글이 적혀 있다. 나도 여행하며 매일 일기를 쓰고 오늘도 너를 만나기 직전까지 메모장에 기록하는 중이었다고 말했다.

     

맥주를 다 마실 무렵, 아드리앙이 테크노 음악을 기가 막히게 틀어주는 곳이 있는데 괜찮으면 가보자고 한다. 테크노도 클럽도 좋아하기는커녕 거의 담배연기처럼 멀리하지만, 별로면 나오면 되기에 함께 갔다. 본래 테크노 음악이 자진모리 장단으로 울려 퍼지는 곳은 브뤼셀 중앙역을 오갈 때 본 적 있는 반고흐 아트 뮤지엄이었다. 낮엔 카페 밤엔 주점인 곳은 봤지만, 이건 거의 얼굴에 점찍고 다른 사람으로 등장한 것 아닐까.

      

돌아다니는 사람의 모습이 심상치 않아 확인해보니 오늘은 드래그 쇼가 있다고 한다. 테크노를 좋아하는 그의 얼굴에 실망의 기운이 살짝 번지는 걸 놓치지 않았다. 내일 체크아웃하고 브뤼셀을 떠나야 하는 일정과 밤 12시면 슬슬 잘 준비를 하는 내게 “테크노가 아니니 그냥 집에 가자”는 말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는데, 드랙 아티스트들에게 흥미가 일었는지 내 의향을 묻는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평소처럼 잠자리에 들 수 있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나아가면 일기에 재밌는 이야기를 한 줄 쓸 수 있겠단 생각이 스쳤다. 그래, 체력과 글감을 맞바꾸는 거야! 평소의 나로선 전혀 하지 않았을 선택이다.


더운 기운에 외투를 벗듯 비일상적인 순간에 어색함을 잠시 내려 두었다. 화려한 메이크업과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들어 보이는 하이힐을 신고 현란한 춤을 구사하는 드랙퀸을 보았다. 아는 노래가 나오면 신나고 감히 따라할 수 없는 춤 실력에 경이로움을 담아 크게 호응했다. 그간 클럽이라 하면 앳된 티를 화장으로도 숨길 수 없는 20대 초반의 어린 친구들이 가는 곳이라 생각했다. 즐거운 얼굴로 리듬을 타는 이들 중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도 꽤 있었다. 역시 무언가를 즐기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없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하지요? 하지만 안 자고 밤샌 새가 있다면?

네 바로 저예요.


10월 20일, 벨기에 브뤼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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