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변에 처했을 때는 가장 먼저 아군을 확보하는 것이 좋다
브뤼셀에서 다시 독일로 넘어가려 하는데 기차가 취소됐다. 놀랍지 않다. 다만 짜증날 뿐. 문제를 만드는 건 그들, 대안을 찾는 건 내 몫. 체크아웃하면서 호텔 스텝에게 도이치반(독일 기차 회사) 욕을 하다가 그가 입은 옷이 완전 내 스타일이라 그 스웨터 정말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 이거 자기 남자친구 것이라고 한다. 짙은 녹색 라코스테 풀오버를 입은 그가 브뤼셀 북역에서 출발하는 다른 기차를 알아봐줬다. 그래도 벨기에에서 독일 가는 건 많으니까! 긍정의 에너지를 담아 한 마디 덧붙였다.
일단 북역까지 가서 2시간 뒤에 있을 다른 기차를 타보려고 한다. 여행자센터 앞에서 출장나온 DB직원을 만나 티켓 확인을 받았다. 나처럼 비슷한 상황인 사람들이 여럿 보여 조금 마음이 놓였다. 불안도 여럿이면 위안이 된다.
맥도날드에서 채식버거를 먹고 일기를 쓰며 2시간을 보낸 후 플랫폼으로 갔다. 그곳에서 나처럼 2시간을 기다린 한 독일인과 얘기하게 됐다. 브뤼셀에 출장 왔다가 주말을 맞이해 집이 있는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간다고 한다. 열차가 와서 탑승칸이 달라 헤어졌다. 기차는 흥남부두 피난민들이 모인 것처럼 짐도 많고 앉을 자리도 거의 없었다. 비록 지체되긴 했지만, 이 열차만 잘 타고 가면 목적지인 프랑크푸르트 중앙역까지 갈 수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무슨 방송이 나왔는데 사람들 반응이 큰 편이라 어리둥절해 있으니 옆에 앉은 사람이 영어로 설명해준다. “지금 열차가 긴급한 문제로 정차해야 한대요. 쾰른에서 내려서 30분 기다렸다가 다른 열차를 타야 한다고 하네요.” 그렇다. 나는 다시 내려서 다른 열차를 기다려야 했다. 그럼 그렇지.
독일 오기 전에 외워온 숫자와 한 달 가까이 쌓아 온 눈치 덕분에 방송에서 알려준 플랫폼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다가온다. 아까 브뤼셀 북역에서 보았던 독일인이다. 우리는 열차를 기다리며 또 얘길 나눴다. 프랑크푸르트는 왜 가는지 나는 왜 독일여행을 하는지 정작 그는 베를린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에게 베를린을 다녀오거나 아는 독일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미친 도시라고 말한다면서 함께 웃었다.
어쩌다 보니 열차에서도 서로 맞은편에 앉아서 왔다. 도이칠란트 티켓이 정착되기 전, 한 번 더 저렴하게 풀린 적이 있는데 그땐 진짜 열차에 사람이 많아 지옥철처럼 탄 적이 있다고 한다. DB직원이 무슨 얘길 하며 지나다니기에 티켓 검사인가 했는데 열차 지연에 대한 보상 신청 안내였다. 손을 들어 신청 용지를 받은 그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열차 안에서 간간히 방송이 나올 때마다 필요한 정보는 그 친구가 따로 얘기해줬다. 내 옆자리에서 자주 기침하는 사람을 보자 코로나가 염려스러웠는지 입을 가리고 하라고 주의를 주기도 했다.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까지 괜찮은 독일인 아군을 곁에 둔 것 같아 내심 든든했다.
열차는 끝내 프랑크푸르트 중앙역까지 우릴 데려다주지 않아 공항역에 내려서 지하철을 다시 타야했다(정말 끝까지…) 내가 지하철 타는 게이트를 알려주니 그가 맞는 것 같다면서 따라온다. 이봐 당신이 여기 주민 아니었어? 여긴 당신의 나라라구. 어쩌다 나는 프랑크푸르트 주민의 길라잡이가 되었나. 브뤼셀 체크아웃 후 프랑크푸르트 숙소에 체크인 하기까지 총 8시간이 걸렸다. 내 기차가 연착과 취소를 반복한 탓에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서 날아온 반려인과 도착 시간이 거의 비슷해졌다. 우리는 프랑크푸르트역에서 25일 만에 해후했다.
10월 21일, 프랑크푸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