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란다스의 개>에서 네로가 파트라슈와 함께 보고 싶어 했던 루벤스의 그림을 보는 중이다. 베를린부터 이곳 앤트워프까지 여러 미술관에서 루벤스의 작품을 꽤 눈에 담았고 오후에 방문한 앤트워프 왕립미술관에서는 심지어 루벤스 특별관까지 있었는데 다소 심드렁했다(종교화나 신화에 큰 흥미가 없기도 하다)
여기 성모마리아 성당 입장료는 12유로다. 당시 네로가 살던 시대엔 입장료가 이 정도까진 아닐 테고 앤트워프 시민이나 어린이 할인이 적용되면 거의 무료에 가깝지 않았을까 싶은데 성당이 아이한테 너무 야박하다는 생각이 들어 좀 뭉근히 화가 났다. 아니면 도그 프랜들리가 아니었나. 파트라슈를 잠시 밖에 기다리게 했다면 볼 수 있지 않았을까. 거 뭐 애 하나가 본다고 그림이 그리 닳진 않잖소!
루벤스의 그림은 “왜이래. 나 루벤스야” 하는 인상을 준다. 그가 아무리 많은 화가를 아뜰리에에 거느렸다고 하더라도 루벤스가 나서서 혼자 그린 그림은 상당히 강렬해서 눈길을 끈다.
[십자가에서 끌어내림]은 엄연히 다른 기운이 느껴지는 걸작이다. 미술관이 아닌, 있어야 할 곳에 있어서 더 강렬한 힘이 부여되고 당위성이 생겨 관객에게 전이된다. 그러고 보면 ‘있어야 할 곳’이란 무엇일까. 아까 앤트워프 역에서 성당에 오려고 지하철을 기다렸다. 처음 오는 곳이다 보니 살짝 긴장했는데, 그때 역 안에서 평소 즐겨 듣던 바흐의 골드베르크 협주곡이 흘러나왔다. 클래식 곡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는 내가 기억할 정도로 좋아하는 작품인데 익숙한 선율이 나를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편하게 생각해.” 공중화장실이나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들었을 때와는 퍽 달랐다. 같은 그림이라도 같은 노래라도 어떤 상황, 어떤 장소에서 접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루벤스의 그림과 바흐의 음악이 그렇듯이.
루벤스는 이 그림을 성당 공모전에 응모해서 채택되어 그렸다고 한다. 제아무리 루벤스라도 어쩔 수가 없다. 수주해야 한다. 잠깐, 이건 조기축구회에 손흥민의 등장 아닌가? (뭐? 루벤스가 응모했다고? 허어 우린 떨어지겠군.. 하는 동네 화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루벤스의 그림을 보며 상념에 빠져 있다가 메시지를 받았다. 나의 야구팀 엔씨다이노스는 5위인 두산을 꺾고 이제 진정한 가을야구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는 소식이다. 비록 타지에 있어 그 승리를 가까이 함께하진 못하지만, 늘 근처에 성당이 있으면 들어가서 빌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 모든 경기를 후회 없이 할 수 있다면 좋겠다. 벨기에 시내 쓰레기를 잘 줍고 다녀야지.
성당 밖으로 나왔는데 아시아인 작가의 작품이 있다. 파트라슈와 네로가 이불을 덮고 평온히 잠들어있는 모습인데 그 이불이 성당 밑바닥으로 부터 이어진 블럭이다. 결말을 생각하면 늘 가슴 한 구석이 시큰하게 저린 시청자 마음을 알았던 걸지도 모른다.
네로와 파트라슈는 조금 편안해보였다.
요즘 같은 시대에 태어나 속 편한 우유나 식물성 우유를 팔았으면 좋았을텐데..
10월 19일, 벨기에 앤트워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