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도이치반(독일 기차회사)의 ‘막질려 확질려’ 날로 정한다. 호텔 체크아웃을 10분 남기고 메일이 왔다. 기차가 취소됐다. 연착은 기다리면 되지만 취소는 큰 문제다. 오늘 기차 여정은
12:47 하이델베르크 출발
14:26 프랑크푸르트 환승
17:35 브뤼셀 도착
취소된 건 하이델베르크-프랑크푸르트 구간이므로 14:26까지 프랑크푸르트에 가기만 하면 된다. 12:20에 하이델베르크역에서 프랑크푸르트 가는 기차가 하나 있어서, 역에 가기 위해 짐을 끌고 트램 정류장에 갔다. 트램이 와서 타려는 순간, 들고 있던 원통지의 뚜껑이 열려 포스터가 떨어져 길 위에 데굴데굴.. 뚜껑을 찾아 끼우고 그림을 주워 넣었는데 이번엔 반대쪽 뚜껑이 열리고, 내 머리 뚜껑도 열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다시 줍는 동안 트램은 떠나버렸다. 저걸 탔어야 했는데!
기차를 자기네 맘대로 취소해 놓고 대안은 나보고 찾으라는 도이치반에 화가 난다. 지금 상황을 타개하는 데 분노는 도움 되지 않으니 잠시 미뤄두기로. 다시 구글맵을 보니 매우 촉박한데 버스가 하나 있다. 다행히 제시간에 온 버스를 타고 하이델베르크 중앙역에 내려 여행자센터의 도이치반에 대안을 요청하고자 찾아갔다. 하지만 대기자가 많아 상담을 기다리면 12시 20분 기차를 놓칠 게 분명하다. 티켓 검사할 때 대충 소명해보자는 심산으로 허겁지겁 플랫폼으로 달려갔다. 그때 플랫폼 앞에서 DB전용 키오스크가 보였다. 아저씨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굉장히 느긋한 마음을 담아 내게 12:20 기차를 타라고 알려준다.
“이건 네가 산 IC보다는 느리지만, 14:26 프랑크푸르트 기차가 오기 전까진 도착할 수 있어”
네 그건 알고 있어요. 그야 내가 본래 타야 하는 시각보다 일찍 왔으니까요. 그리고 IC가 더 비싸다구요!
탑승하고 보니 내가 가진 도이칠란트 티켓으로 탈 수 있는 독일 지역 기차였다.
기지를 발휘해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 도착했다. 10분의 여유가 생겼는데 그때 메일이 왔다. 도이치반 메일 아니길 제발!
도이치반이었다. 도이치반으로 2행시 가겠습니다. 도, 도이치반을 반, 반대합니다 증오합니다 I HATE DB! Scheiße!
열차가 아니라 이번엔 역이 취소됐다. 내가 지루할까봐 취소뷔페를 열어주시네요. 하지만 대안이 먼저 화는 나중에. 나는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 왔는데 벨기에 가는 기차가 이곳에 오지 않는다고 한다. 다시 여행자센터에 가서 직원에게 물어보니 “이건 프랑크푸르트 공항역에 가면 저 기차를 탈 수 있어. 다만 그 열차는 10분 뒤에 오니 S반을 타고 거기까지 가야해. S반은 또 15분에 한 번씩 오고.”그게 전부냐고 물으니 일단은 그렇고 도이치반 직원을 찾아가면 다른 대안을 알려줄 수도 있다고 했다.
아니, 너를 믿을게. 내가 가볼게! 제길 도이치반 직원도 못 믿겠어. 시간만 지체되지.
거의 출발 2분 남기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역 플랫폼에 도착했다. 어째서 오늘 혼자서 ‘독일 열차에서 살아남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찍고 있나. 프랑크푸르트는 왜 그리 역도 넓은지 숨차듯 플랫폼에 도착하니 기차가 연착이란다. 대체 왜 그래? 내가 독일을 떠나면 안 되는 거야? 혹시 국가 기밀을 너무 많이 알아 버렸어? 연착 된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한다고 알려주면 안될까? 이미 그 플랫폼엔 먼저 이곳을 떠났어야 할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다. 앞선 기차들이 모두 오지 않았다. 장기간 집을 비운 후 수두룩이 쌓인 고지서처럼 와야 할 기차들이 전광판에 줄지어 나오고 있다.
호텔 나오기 전 먹은 방울토마토 이후로 먹은 게 없어 상당히 배고프다. 기차는 언제 올지 모르고 괜히 자리를 비웠다가 기차가 와버리면 어쩌나 싶어서 고민하다가 10분 이내로 오지 않을 것 같아서 터미널 쪽으로 올라가 샌드위치와 커피를 샀다.
샌드위치를 한 80프로 먹어갈 때쯤 갑자기 한 사람이 걸어 다니며 독일어로 외친다. 길이라면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그러려니 할 텐데 그 사람이 뭐라고 외치자 플랫폼에서 기다리는 승객들이 우왕좌왕 자리를 뜬다. 혹시 뭐가 변경됐나 싶어 옆에 앉은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플랫폼이 다른 곳으로 변경됐다고 한다. 모든 게 급작스럽다. 먹던 샌드위치를 가방에 쑤셔 넣고 일어서서 짐가방을 빠르게 끌었다. 뒤에서 무언가 크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알았다. 기차에서 마시려고 산 커피를 짐 가방에 올려두었는데 그걸 까먹고 짐가방을 끈 것이다. 한모금도 마시지 못한 커피가 바닥에 흥건하게 쏟아져 있었다. 아아 슬픔은 나중에, 플랫폼은 지금! 모든 감정들을 여름방학 일기처럼 나중에 풀어보자고.
바뀐 플랫폼에 가니 내 기차는 안 오고 다른 기차만 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안 온 기차들이 많았다. 대체 도이치반은 독일인의 시간을 어떻게 생각하는 건가. 또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나 쏟아버린 커피를 슬퍼하려고 하다가 다시 상황을 확인할 겸 플랫폼을 돌았다. 아까 와 있던 기차가 갑자기 점을 찍고 복수하러 돌아온 주인공마냥 내 기차로 되어 있다. 들어왔으면 들어왔다고 말해줘야지. 내가 저기 앞에 계속 앉아있었으면 어쩔 뻔했나. 급하게 올라타 자리에 앉아있는 친구에게 이 기차 브뤼셀 가는지 물었다.
2시 26분에 탔어야 하는 기차를 3시 15분에 탔다. 그리고 기차 안의 카페테리아에서 다시 커피를 샀다. 드디어 브뤼셀에 갈 수 있게 됐다.
독일 기차 안에서 애프터선셋 같은 영화 찍을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대안 없는 취소, 안내 없는 연착, 연이은 플랫폼 변경 없이 짐 잃어버리지 않고 무사히 목적지까지 도착만을 바랄 뿐이다. 차은우급 미남이 아닌 이상 옆자리는 공석이 편하다. 아까 지역열차에서 맞은편 손님의 부산함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 여정을 함께 하고 열차에 대한 잇따른 질문을 성실히 답해준 독일 시민여러분께 감사를 전합니다.
10월 17일, 하이델베르크에서 브뤼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