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안 읽은 책이 쌓여 있어도 바로 산다. 어제 샀는데 오늘 사고 싶은 책이 생기면 또 서점에 간다. 요즘 책은 절판되기 쉬워 사고 싶은 게 있으면 바로 사야 하며 어차피 있으면 언젠가 읽지 않느냐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에게 책은 ‘사서’ 읽는 것인 반면 나는 어릴 때부터 책을 주로 대여해서 읽었다. 이사하면 집 주변에 도서관이 어딨는지를 먼저 찾고 대학에 들어가서 중앙도서관에서 한 번에 여덟 권씩 빌렸다. 책은 소유보다 읽는 경험이 먼저라 여겼고 괜히 모르는 책을 샀는데 소유 가치가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읽은 책 중에 괜찮은 것을 사곤 했다. 그래서 처음엔 그의 방식이 좀 이상했다. 읽지도 못할 책을 사 들이는 것 같았고 요즘같이 나무 요정이 무덤에서 뛰쳐나올 만한 불량한 책들이 대거 쏟아지는 사회에서 아무 책이나 사들이는 게 다소 나이브한 건 아닌가 생각했다. 물론 그는 단지 베스트셀러라든지 책 표지가 예쁘다는 이유로 충동구매 하진 않는다.
우리는 읽는 습관도 다르다. 내가 다 읽은 책을 그가 볼 땐 별문제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반대다. 그는 책을 좀 요란하게 보는데 서슴없이 펜으로 밑줄을 치고 책 여백에 아낌없이 자신의 생각을 적어 놓는다. 아무래도 그 책을 처음 접하는 사람으로선 선독자의 밑줄이나 글귀가 본문의 내용보다 더 눈에 띄기 마련이다. 온전히 내 감상에 집중할 수 없고 누군가 표시해 둔 걸 보면 혹시나 내가 놓쳤을까 괜한 의미 부여를 한다. 그의 자필 의견은 특히 저자의 생각과 크게 차이 날수록 필체가 거칠고 글씨가 크다. (병원에서 월리 구출의 사명감을 안고 책을 펼쳐 안경을 고쳐 쓰는 나에게 ‘요깄지!’ 하며 빨간 동그라미를 그려둔 무명의 스포일러와 대체 뭐가 다른가!)
처음엔 그에게 이 얘길 했더니 자긴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치고 의견을 적는 게 저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란다. 지금 그런 대화까지도 통제할 모양이냐며 도리어 나를 독재자 취급하기에 내 사정을 설명했다. 나는 밑줄을 긋거나 의견을 적지 않는다. 대신 맘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페이지 오른쪽 위의 귀퉁이를 접는다. 이 방식은 장점이 있는데 좋은 문장을 찾기 위해 책을 다시 읽을 필요가 없다. 앞뒤로 좋은 문장이 있는 경우 어떻게 접어야 하는지 조금 난감해서 보통은 접어둔 부분을 앞뒤로 다 읽는다. 어쨌든 접힌 부분을 읽으며 그 책을 두 번째 만나게 된다.
우리가 도출한 합의점은 형광펜은 사용 금지, 지워지지 않는 펜보단 연필로 할 것, 그러나 형광펜으로부터 책은 지켜냈지만, 나머지는 아니었다. 이젠 그가 이미 저자와의 대화를 실컷 하고 난 책이라면 나도 있는 힘껏 의견을 내고 대화를 이끌어 나간다. 우리는 시대와 국경을 거슬러 세 명이 이 한 책에서 만나 서로 다른 때에 대화를 나누는 셈이다. 그가 적은 의견에 반박 글을 적기도 하고 때론 작가를 변론하기도 한다. 결론 미리 써놓지 않기, 형광펜 사용 금지 정도로 내가 양보를 많이 했지만, 한 책에서 서로 살아온 환경과 시대, 성별, 심지어 언어도 다른 세 명이 대화를 나누는 풍경이 일견 의미 있게 느껴진다. 그러게 우리가 책이 아니고 함께 살지 않았다면 19세기 버지니아 울프, 21세기 여성인 나와 권력을 인지한 그가 어떻게 만날 수 있을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