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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Jan 23. 2024

귀신의 길과 인간의 길

-넷플릭스 애니멘이션 <도로로> (2019)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 (2014)에서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해 독자들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그는 “달리는 기차의 방향을 어디로 틀 것인가?”라는 구체적 사례로 딜레마를 구체화한다. 한 사람을 희생시킬 것인가, 아니면 다수를 희생시킬 것인가?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키기로 했는데, 만약 그 사람이 당신의 친구이거나 자식이라면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이러한 구체적 질문은 우리에게 정의란 무엇인지 다시 되묻게 하는 계기가 된다.


  사실 이 질문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 철학의 논리가 지닌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왜 공리주의가 질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이유는 민주주의 사회 시스템이 공리주의 철학을 토대로 하며 다수의 의견에 따라 권력이 분배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적 의사 선택의 분배 방식은 사회적 약자에 해당하는 소수자의 희생과 다수의 이익을 옹호하는 방식으로 구성되기 쉽다. 이러한 불균형한 사회 시스템은 그 내부에 자연스럽게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을 낳고, 공동체 내부에 많은 폭력이 발생하게 되며, 지속적인 폭력과 갈등은 결국 그것을 해소할 희생양을 찾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도로로>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을 묵인하는 것은 정의로운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작품이다. 애니 <도로로>는 귀신에게 48군데의 신체를 빼앗긴 햐키마루가 도로로와 함께 자신의 잃어버린 신체를 찾아 떠나는 과정을 담고 있다. 햐키마루가 지신의 신체를 귀신들에게 빼앗긴 이유는 마을의 영주였던 아버지가 재난과 기근으로 죽어가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귀신들과 거래했기 때문이다. 이 거래로 인해 햐키마루는 귀신에게 자신의 신체를 잃고 살아있는 송장이 되어 부모에게 버려진다.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아들을 희생시키기로 한 영주의 선택을 손쉽게 비난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햐키마루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배제하고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을 정의롭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이 작품은 자신의 잃어버린 신체를 되찾고 공동체의 폭력을 이겨내는 주인공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앞의 공리주의적인 입장에 대한 거부라고도 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한 개인의 운명을 공동체가 결정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이 쟉품이 한 개인이 공동체의 억압에 맞서 투쟁해나가는 과정이 인간이 되는 길로 제시된다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인간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외부와의 대결과 투쟁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는 관점은 헤겔을 연상시킨다. 우리는 타자에게 자기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그 인정을 얻고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는 방법은 노예 상태에서 주인과 대결하여 획득하는 자유를 통해서이다. 헤겔의 관점에서 인간으로 존립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대타자로서 세계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자유를 획득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것은 공동체 내부에 증식한 폭력을 해소하는 희생양의 메커니즘이다. 햐키마루가 귀신들에게 신체를 빼앗긴 시점이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이인 시점인 것은 제의의 희생양으로서 순결성을 지닌 존재임을 드러내고, 신체를 빼앗기고 버려진다는 점에서 제의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고 버려지는 공물의 운명과 맥을 같이 한다. 애니 <도로로>에서 햐키마루가 신체을 빼앗기는 과정은 바로 신에게 공물을 바침으로써 공동체의 폭력과 불만을 제거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잘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 이론에서 공동체는 내부의 폭력을 제거하고 사회적 안정을 위해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러한 희생양 메커니즘에 의해 희생되는 대상은 사회적 소수자(장애인, 이민자, 난민, 흑인, 트렌스젠더 등등)에 해당한다. 물론 소수자는 공동체 전체에게 폭력을 당한다고 해도 보복이 불가능한 약자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 보복할 힘을 지닌 강자를 희생자로 삼게 되면 분명 이것에 동의하지 못하는 세력과 다투는 사회적 혼란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 폭력의 대상이 되는 희생양은 사회적 소수자이어야 하고, 공동체는 그 대상에게 막연한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사회의 불안정한 요소를 제거한다. 즉, 햐키마루는 마을의 안정을 위한 제의의 희생양이다.


  그런데 애니 <도로로>는 소수자에 대한 폭력을 통해 얻게 된 공동체의 질서와 안정성이 얼마나 허약한 환상에 불과한지 보여준다. 햐키마루가 귀신들을 퇴치하고 자신의 신체를 되찾을 때마다 마을은 다시 기근과 재해가 발생하고, 그 앞에서 마을 공동체는 불안해진다. 다시 말해 사회적 불안과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없는 희생양 찾기는 다시 공동체의 불안과 분노를 유발하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자신의 남편에게 햐키마루의 어머니가 마을의 평화가 햐키마루의 희생 하나로 얻어진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라고 계속해서 말하는 것은 애니 속 마을에서 유지되는 평화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애니 <도로로>는 희생 제의와 반복되는 폭력의 매커니즘에 반대한다.


  이 작품에서 햐키마루의 투쟁을 인간의 길로 마을의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영주 일행의 폭력을 귀신의 길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이미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선명한 주제 의식을 알아차리게 한다. 바로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정치적 입장에 대한 반대와 인간의 길이란 자신의 존재를 억압하는 타자와의 투쟁 속에서만 획득되는 것이라는 철학이다. 그 과정이 고독하고 자신의 약점을 타자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자만이 자유로운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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