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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부르크의 최중원 Dec 22. 2020

프로 디자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4. 팀장님

그래픽 디자인은 분명히 건강한 직업이 아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마우스와 키보드를 다루고 가끔 전화를 받는 일이 전부인 모든 사무직일이 그렇듯이, 그래픽 디자이너로 오래 일하면 안구건조증, 척추 측만증, 거북목, 커널 증후군, 소화불량 같은 다양한 종류의 병들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래픽 디자인은 사람의 영혼을 소진시킨다. 진부한 표현이라서 다른 말로 바꿔보려고 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나는 작가도 마케터도 카피라이터도 아니라서 일단은 이 정도의 표현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무엇보다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15년 동안 실무를 맡아온 팀장님을 보다 보면, 영혼을 소진시킨다는 표현이 꽤 정확한 것 같기도 하니 말이다.


이제 막 40대에 접어든 팀장님은, 그러니까 20대 초반부터 디자이너로 일했던 모양이다. 군대를 다녀온 뒤 어느 대학교의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디자인 에이전시를 차렸는데, 그 회사가 잘 굴러가서 한창때는 디자이너만 스무 명이 일할 정도로 규모가 컸었다고 했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었는지 회사는 폭삭 망해버렸고, 때마침 팀장 자리가 갑작스럽게 비게 된 우리 회사에서 새로 팀장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팀장님은 디자인을 잘한다. 시각적으로 예쁜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에 타고난 사람이다. 손도 정말 빠르다. 아니, 방금의 말은 수정할 필요가 있다. 손은 빠르지 않다. 작업하는 모습을 보면 엄청 정적이다. 화면 위에 떠다니는 마우스 포인터의 움직임조차 간결하다.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뚝딱, 그럴듯한 시안들을 마구 만들어낸다. 비밀은 팀장님의 마우스에 숨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두어 번가량 팀장님의 마우스를 사용해 본 적이 있는데,  마우스를 1cm 정도만 움직였음에도 오른쪽 끝에서 출발한 화면 위의 포인터는  화면을 횡단하여 이미 왼쪽 끝에 도달해 있었다. 설정창을 열어 확인해 봤더니 마우스 포인터의 민감도가 최대치로 되어 있었다. 어떻게 이런 민감한 마우스로 디자인을 하는 거야?  반대로 팀장님은 자주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느려 터진 마우스로 디자인을 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들 느리지“


그러니까 떠도는 전설들,  팀장님이 회사를 처음 시작했던 해에 혼자서 매출을 5억을 찍었다는 것이나 경쟁피티 프로젝트 발표 자리에서 자신이 컨셉을 잘못 이해해서 클라이언트가 원했던 것과 전혀 다른 디자인 시안을 만들어 왔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회사가 발표를 하는 30분 동안 대기실에 앉아서 새로운 시안을 만들어서 그것을 발표하였는데 그 시안이  좋은 반응을 얻어서 그 프로젝트를 따내게 되었다는 것 등은 어느 정도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때는 90년대였고, 지금은 2010년대다. 팀장님의 디자인 취향은 아쉽게도 팀장님과 함께 현재로 오지 못했다.  반듯하고 균형 잡힌 레이아웃, 입체 글자와 반짝반짝 효과.  팀장님이 직접 만든 작업이든, 팀장님의 디렉션에 충실히 따라 만들어진 작업이든,  분명히 완성도는 있는데 어딘가 조금 올드해 보였다.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 10년 뒤에 라면 촌스럽다는 말도 나올 법하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클라이언트 회사들에서 시안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이 보통 팀장님과 동년배이다 보니, 프로젝트의 최종 단계에서  팀장님이  직접 작업했거나 혹은 미는 안들이 선택될 확률이 꽤나 높았다. 아무래도 같은 세대라서 그런지 취향도 좀 비슷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좀 젊고 트렌디한 스타일을 원하는 담당자들이 살짝 이번 프로젝트는 팀장님을 배제하고 진행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리고 정말 희한하게도, 그런 일들은 어떻게 해서든 꼭 팀장님의 귀로 들어간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과도한 디자이너 커리어로 인해  영혼이 소진된 팀장님에게는 너그러움이 깃들 심적 여유가 없고, 받아내야 하는 것들은 결국 우리 디자이너들이다. 





„은우 씨“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 길에 팀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도에 세워진 미니의 창문 안쪽으로 팀장님의 얼굴이 보였다.

„팀장님, 점심은 드셨어요?“  팀장님은 점심을 걸렀을 때 조금 더 까칠해진다. 그런고로 상사의 배고픔 레벨은 직장인에게는 언제나 체크해두어야 하는 수치인 것이다.

„안 먹었는데, 은우 씨 지금 바빠요?“

„어… 할 거는 있어요.“

„언제까지에요?“

„내일까지인 게 하나, 모레까지인 게 둘, 그리고…“

„오늘까지인 것 있어요?“

„오늘까지인 거는…“ 하고 대답하면서 나는 이미 틀렸다고 생각했다. 말끝을 흐리지 말고 바로 단호하게, 오늘까지 할 일 많다고 했어야 했는데.

„그럼 얼른 타요.“

„네?“

팀장님의 미니 뒤에 멈춰서 있던 차들이 빵빵거리기 시작했다. 회사 앞의 소월길은 왕복 2차선이다. 앞의 차가 멈추면 뒤의 모든 차들도 따라 멈춰야 한다.  나는 같이 밥을 먹고 오던 솔 선배와 제임스,  AE님의 얼굴을 바라보곤, 어깨를 으쓱 한 뒤에 팀장님의 차에 올랐다. 



팀장님은 차를 몰고 종로로 향했다. 탑골공원 근처, 높은 빌딩들에 둘러싸인 공영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에 근처의 5층짜리 빌딩으로 향했다. 


빌딩의 벽을 덮은 주황색 타일은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떨어져 나간 곳에는 시멘트가 드러나 있었다. 우리는 먼지나 비둘기 털들이 나뒹구는 어두운 계단을 올라갔다. 관리가 잘 되지 않는 빌딩이었다.  프로젝트를 킥오프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자신 외에 실무를 하는 디자이너 한 명이 함께 가야 한다고 오는 길에 팀장님이 말했다.  아주 중요한 클라이언트라고도 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엄청난 수익을 얻을 수 있을 프로젝트라고도 그랬다. 그런데 그런 프로젝트를 진행하려고 하는 중요한 클라이언트가 대부업체와 불법 사행성 게임업장과 귀 청소방과 같은 건물에서 일하고 있다고? 계단을 오르며 팀장님의 얼굴을 살펴보니 조금 긴장하는 낌새가 보였다. 나는 덜컥 불안해졌다. 혹시 멋모르고 올라갔다가 나 콩팥 적출이라도 당하고, 수면마취에서 깨어나 보니 멀리 오호츠크 해 위의 새우잡이 배 위인 것 아냐? 


„팀장님, 들어가기 전에 제가 더 알아야 할 내용들이 있을까요? 아무리 킥오프 미팅이라고 해도, 제가 일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고 있으면…“. 나는 조금의 정보라도 더 얻을 성 팀장님에게 말을 걸어봤지만 팀장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은우 씨, 그냥 앉아서, 프로처럼 말하고 프로처럼 행동해요. 어려운 거 없어요.“



5층에는 간판이 붙어있지 않은 문이 달랑 하나 있었다.  유리문 위에는 불투명 시트지가 붙어 있었지만,그 너머로 사람의 그림자 같은 것들이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팀장님은 벽에 인터폰이 붙어있는데도 굳이 문을 손으로 두드렸다.  지직하는 잡음과 함께 인터폰의 스피커에서 어떤 남자가 말했다. „무슨 일이세요“ 

„프로 디자인의 박현입니다.“. 아 맞아. 팀장님 이름이 박현이었지. 

삐리릭 철컥, 하고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사무실은 꽤나 넓었다. 내가 걸어 올라온 그 작은 건물 안에 이렇게 넓은 공간이 존재할 수 있는 건가? 안내를 받아 회의실로 걸어가면서 나는 주위를 살폈다. 모두의 책상에는 27인치 아이맥이 한 대씩 설치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포토샵을, 어떤 사람들은 일러스트레이터를, 어떤 사람들은 인디자인을 켜 놓고 있었다. 익숙한 풍경, 익숙한 공기. 익숙한 키보드 단축키를 누르는 리듬, 커맨드 제트, 커맨드 에스, 커맨드 쉬프트 브이. 커맨드 쉬프트 오. 잠깐만, 여기 디자인 스튜디오잖아?


회의실은 사방이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었다. 한쪽 벽에는 80인치는 족히 되어 보이는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다. 의자 여섯 개가 놓인 테이블 옆에 앉아 있었던 두 사람이 우리를 보고는 일어났다. 


„반갑습니다"

하드 모히칸 스타일의 머리에 덩치가 큰 남자가 다가와서는 나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딱 봐도 팀장님이 상급자처럼 보일 텐데 왜 나에게 먼저 인사를 하는 걸까. 내가 당황해하고 있으니 팀장님이 재빠르게 어깨로 나를 밀치더니  남자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안녕하세요, 프로 디자인의 박현 팀장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임은우 디자이너고요. “


모히칸 남자의 뒤에 서 있었던 사람이 뒤늦게 다가와서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프로 디자인의 임은우 씨이군요. “

허스키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헤어스타일도, 얼굴의 생김새도, 체형도 모두 중성적이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한눈에 알아보기 힘든 사람이었다.


„아, 네… 제가 맞는데요.“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손에 들고 있던, 거의 전화번호부만큼의 두께를 가진 서류 뭉치를 바라본다. 

„그러니까, 저번 주에 "뉴트리션 플래티넘 프롬 네이처 하이드로 프로테인 아이솔레이트" 제품 로고를 디자인하셨고,  그 전에는 „해초 추출물이 들어간 친환경 자연애 콘돔“ 패키지를 디자인하셨고, 그 전에는 "국제 판소리 놀이 축전 행사" 포스터를 디자인하셨던 그 임은우 씨“

„네… 제가 혼자 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당황해하며 대답했다. 저 종이뭉치에 내가 지금까지 한 모든 디자인들이 적혀 있는 거야? 내가 저렇게 많이 디자인을 했었나? 설마 완성된 작업 이미지들까지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 내가 작업했다고 말하기엔 쪽팔린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때, 흠흠 하고 팀장님이 헛기침을 하며 껴들었다. „모두 다 제가 디렉션했습니다. “

허스키한 목소리의 사람은 팀장님 쪽으로 눈길도 한번 안 돌린 채로 말했다.

„주현 씨. 여기 우리 팀장님 커피나 한잔 대접해드리세요. “ 그러니까 모히칸 스타일의 머리를 한 덩치 큰 남자의 이름이 주현인 모양이었다. 꽤 안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네 실장님. “ 히고 주현이란 사람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허스키한 목소리의 사람은 실장인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나가고 문이 다시 닫히자, 실장님은 다시 말을 이었다.  „ 그러니까, 네이버 아이디가 silvercow1210, 구글의 메일 주소는 wifeofBH, 에어박스 아이디는  eunwoo@prodesign.co.kr  맞죠?“

나는 멍해졌다. 저번에 신한카드가 털렸을 때였을까? 아니면 던전 파이터 게임이 털렸을 때였을까. 한때 내가 열성 빠였던 그룹의 팬클럽 회장이 팬클럽 멤버들의 정보를 모아서 팔아넘기고 잠수 탄 적도 있었다. 유출된 사람들의 개인 정보들이 공공연하게 거래된다는 이야기를 들어봤지만, 이렇게 유출된 내 정보가 사용되는 현장을 직접 목격할 줄이야.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나는 날카로워지려 하는 내 목소리를 최대한 부드럽게 다듬었다. 어쨌든 간에 이 사람은 잠재적인 클라이언트다.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좋을 게 없었다.


실장님은 서류에서 눈을 뗀 뒤 나를 뻔히 바라보았다. 그리곤 말을 이었다.

„ 다른 것도 많이 알죠. 예를 들면 은우 씨가 내일 점심 메뉴를 정하는 당번이라는 것과, 에어박스 „뽑기“를 통해서 메뉴를 정할 것이라는 것과,  „뽑기“에서 돈가스가 뽑혀서 왕냉면과 왕돈까쓰라는 집으로 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갈 것이라는 것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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