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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부르크의 최중원 Feb 13. 2021

삶은 계란은 반숙이 좋아

11분 30초 동안

꾸준히 굴려주며 삶은 계란

어느 쪽에도 쏠리지 않고 촉촉히 익은 노른자에 소금 뿌려 먹으며

올해  제일 만족스러운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10개월이나 남았으니

분발할지어다 나의 남은 날들아


션 레논과 모비와 엘리엇 스미스를 듣던

극세사 잠옷 같은 콧수염으로 벌써 시시하게 늙어가는 걱정을 하던 친구

졸업식 다음날 머리를 오렌지색으로 물들였다  

나는 이제 그보다는 그가 키운다는 파란 고양이를 만나보고 싶다

시시하게 늙어버렸다는 고양이 이야기를 나는 들어본 적이 없기에

분발할지어다 늙어가는 전 세계의 사람들아


나는 나에 대한 농담이 좋다

험담도 욕도 들어줄 수 있다 길면 길 수록 좋다

손톱 밑에 낀 때며 벌써 새치인지 흰머리인지 하얘지는 머리카락과

안다고 했지만 알지 못했던 사람들과 몇년 전엔가 봄을 기다리며 사놨던 열무와 방울토마토와 고수의 씨앗들,

그동안 죽인 모기들과  잃어버린 동전들과 완성하지 못한 글들과 

엔딩을 보지 못하고 지워버린 게임들

당신에게 보내지 못했던 편지도 있었지 뭐예요

이걸로 충분치 않다면 갠톡 주세요

그만큼 친하지 않다면 분발하세요


언제부턴가 아빠는 흰머리를 검게 염색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퍽퍽하게 시시하게 하얗게 바래는 것이

맑스의 공산주의처럼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라면

그에 반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며

분발할지어다 무덤 속 레닌 마르크스 변절한 아빠의 운동권 동지들

활성산소와 분열할 때마다 닳아 없어지는 DNA와 새치와 흰머리와 탈모와 테슬라와 비트코인과 대한민국과

시장경제와 자유의지와 거대하고 진지하고 필연적으로 현존하지만 필연적으로 사라질 그 모든 것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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