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원이 비타민 영양제를 먹기 시작했던 날, 새벽에 갑자기 내린 기습적인 폭설로 서울은 마비되었다. 올림픽대로와 강변 북로는 크고 작은 교통사고로 거대한 주차장이 되어버렸고, 지하철을 선택한 사람들은 신도림이나 사당 같은 환승역에서 자신을 태우지 못하고 지나가는 열차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해야 했다.
해원은 물론 그런 직장인들의 고충을 아직 알지 못한다. 자신의 방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아파트 주차장이다. 사람들이 차를 몰고 출근하는 것을 포기한 까닭에 휴가를 얻은 차들이 눈이 덮인 채로 줄지어 서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밤 새 틀어놓은 보일러 때문에 뜨끈뜨끈한 바닥을 밟고, 아무도 없는 거실로 나간다.
해원의 엄마는 선생님이고, 아빠는 구청의 공무원이다. 둘 다 폭설 때문에 동원되어 일찍 집을 나가야 했다. 식탁 위에는 간단히 차려진 아침 밥상과 함께 투명한 노란색 알약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어제 선물로 받았다던 비타민인가? 커피와 샌드위치가 먹고 싶었지만 해원은 콩나물국과 불고기와 김치와 완두콩이 알알히 박혀있는 밥을 열심히 먹었다. 설거지를 하고 비타민 두 알을 물과 함께 먹은 다음, 샤워를 하고 옷을 두껍게 껴입은 다음 짐을 챙겨서 집을 나선 뒤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로 향했다.
해원은 취준생이다. 돌아오는 3월에 졸업한다. 해원의 친구들 중 몇몇은 이미 마지막 학기쯤에 크고 작은 기업들의 인턴으로 들어가 있다. 회사의 멋진 로비, 학식보다 열 배는 더 맛있어 보이는 구내식당의 점심 메뉴, 회사 사람들과 함께 하는 성탄절 회식 사진 같은 것을 인스타그램에서 볼 때마다 해원은 친구들의 작은 성공들을 마음껏 축하해 줄 수 없는 자신을 보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자신의 이력서에 적힌 항목들, PDF 형식의 포트폴리오에 올라가 있는 작업들은 어떨 때 보면 “이 정도면 학생치고 꽤 잘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다른 때 다시 열어보면 “이러니까 다섯 곳이나 다 떨어졌지” 싶기도 했다.
궂은 날씨였는데도 스타벅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모두가 노트북 아니면 아이패드를 꺼내 들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해원은 창가를 따라 늘어서 있는 바테이블의 한 자리를 겨우 차지할 수 있었다.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꺼냈다가 습관적으로 인스타그램을 켰는데, 바로 첫 포스팅에 방금 해원이 집에서 먹었던 것과 비슷하게 생긴, 투명한 노란색 알약의 광고가 떴다. 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 해원은 조금 소름이 돋았지만, 한 두 번 있는 일도 아니었다.
“우울하고 처진 기분이 든다면- 비타민 결핍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 첫 페이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해원은 스와이프 해서 광고를 다음 장으로 넘겨보았다. “피부가 칙칙하고 생기가 없다면- 비타민 결핍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다음 장. “연애에 계속하여 실패하고 있다면 - 비타민 결핍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다음 장. “즐거운 일들을 잘 찾을 수 없다면 - 비타민 결핍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하고 해원은 웃어넘겼다. 하지만 각 장의 이미지 하단에 작은 글씨로 적혀있는 문구들을 읽어보니,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비타민 D가 부족하면 해마 의존형 학습 및 구조적 뇌 연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연구팀이 최근 의학저널에 밝힌 바에 따르면, 비타민 D는 뉴런과 뉴런을 연결하는 신경망의 구조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데, 비타민 D가 부족할 경우 신경망이 줄어들어 기억력과 주의력이 쇠퇴할 수 있으며, 이미 널리 연구된 바와 같이, 기억력의 쇠퇴는 마음의 건강에 악영향을 주어 우울증을 비롯한 크고 작은 정신 건강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밤이 다 되어 집에 들어오니, 엄마와 아빠는 둘 다 피곤한 얼굴로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서로 다른 방법으로 하루종일 내리는 눈과 사투를 벌인 모양이었다. 아침에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던 비타민에 대해 물어보니, 엄마가 친구에게 선물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저녁은 먹고 들어왔니? 있어봐라 비타민 챙겨줄게. 이걸 챙겨 먹는 게 그렇게 중요하대. 이 작은 알약에 비타민 B가 일일 권장량의 2000퍼센트나 들어있다지 뭐니.
여섯 번째 지원서를 보내고 나서야 해원은 처음으로 1차 면접 참여를 요청하는 회신을 받을 수 있었다. 비타민을 처음 먹기 시작한 날에 지원서를 보낸 회사였다. 해원은 그날 이후로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그 노란색 알약을 먹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몸이 조금 개운하고, 생각도 조금 더 빠릿빠릿하게 잘 되는 느낌이었다. 이 작은 알약을 먹는 것만으로 이런 효과가 있다니.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왜 지금까지 몰랐지? 왜 엄마아빠는 한 번도 내게 비타민을 먹어보라고 한 적이 없었을까.
해원은 엄마 아빠와 함께 면접을 위한 어른스러운 옷을 고르는데 한나절을 사용했다. 백화점의 여러 매장을 돌며, 회색, 남색, 베이지색의 치마와 바지 정장을 여럿 입어봤다. 뭐가 더 나은지, 어떤 옷을 입는 것이 면접관에게 더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지 해원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엄마와 아빠의 의견도 갈렸다. 결국은 직원이 추천해 준 옷을 샀다. 어떤 친구들은 면접날 샵에 가서 면접 메이크업을 받기도 한다던데, 해원은 고민 끝에 집에서 직접 메이크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집에 돌아온 다음 해원은 매장을 돌아다니면서 찍은 여러 정장을 입은 자신의 사진들을 넘겨 보곤, 그중 마음에 드는 사진 다섯 장을 골라서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오랜만의 포스팅이었다. 곧 친구들의 좋아요와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저녁으로는 해원이 제일 좋아하는 닭볶음탕이 식탁에 올랐다. 해원은 밥을 두 그릇이나 싹싹 비웠다. 면접관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말해야 한다는 인사말, 짧은 자기소개, 돌발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 등등을 다시 한번 소리 내어 읽어보면서 저녁 시간을 보냈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면서 해원은, 지금까지 자신의 길지 않은 인생에서 있었던 어려웠던 순간, 쪽팔렸던 순간, 슬프거나 괴로웠던 순간들을 떠올려 보았다. 이게 다 비타민 부족 때문인 것은 아니었을까? 비타민을 열심히 챙겨 먹었다면, 적어도 그 순간들 중 두세 개 정도는 실제 일어났던 것보다 조금 덜 심하게 지나가지는 않았을까? 작년에 헤어진 전 남친의 얼굴도, 그다음에 잠깐 썸을 탔지만 애매한 관계에서 끝났던 공대 친구의 얼굴도 떠올랐다.
지금까지 해원은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언제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결과는 기대보다 조금씩 모자랐다. 자신보다 덜 열심히 하고, 더 많이 놀던 사람들이 자신보다 더 좋은 학점을, 더 좋은 평가를, 더 많은 좋아요와 댓글을 받는 것을 볼 때마다 해원은 이 세상에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자신이 놓치고 있는 무엇인가가 은밀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는 했다. 물론 비타민이 그 암막 너머에서 작동하는 유일한 요소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중 하나일 수는 있지 않을까? 엄마 아빠가 진작에 비타민을 열심히 챙겨 먹었다면, 나는 지금 이런 산꼭대기에 서있는 교통도 불편한 아파트가 아니라, 한강뷰가 보이는 압구정이나 청담의 넓은 아파트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른한 졸음과 싸우면서, 해원은 저번에 저장해 두었던 인스타그램의 비타민 영양제 광고를 다시 열었다. 엄마, 아빠, 그리고 자신, 그리고 잠깐 고민했지만 지금 군대에 가 있는 오빠까지 네 명분 각 3개월치를 구매했다. 꽤나 비싼 돈이었지만, 첫 월급을 받는다면 부담 될 수준은 아니었다.
결제 완료. 곧 배송이 시작됩니다. 비타민제와 함께 새로운 인생이 해원에게 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