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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자 Mar 19. 2021

영화 <4등>: 몇 등 하고 싶으세요?

일간 <저 여기 있어요> 수록글

  하고 싶으세요?

영화 <4등>을 보고


모두가 일등을 꿈꿀까? 방송 <라디오 스타>에 출연한 배우 류승수가 아무도 내가 부자인 걸 모르는 부자가 되고 싶다고 한 것과 비슷하게 누군가는 눈에 띄는 삶을 꿈꾸지 않는다. 이 태도를 순위로 치환할 수 있을까. 이등으로 족한 것도 아니고 꼴등이 되고 싶은 마음 또한 내 것은 아니다. 적어도 감투를 쓰는 모습의 성공이 내가 바라는 미래는 아니다. 시합에서 동메달을 따는 것보다 은메달을 땄을 때 박탈감을 더 크게 느낀다고 한다. 천국과 지옥은 한끗 차이다. 동메달은 순위에 들었다는 사실에 더 큰 안도감을 느낀다고 한다. 발 밑이 낭떠러지인 셈이다.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함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영화 <4등>에서 초등학생 준호는 늘 4등을 해서 엄마를 속 터지게 한다. 발돋움 한 번이면 메달을 목에 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야무지게 포기하기엔 고지가 눈 앞이라는 생각에 애간장이 탄다. 극성맘 정애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준호가 메달을 따게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정애의 것을 팔겠다는 말이 아니라 준호의 영혼이 상처 받더라도 일등만 할 수 있다면 그 정서 장애까지 감수 하겠다는 선언이다. 정애가 소개받은 코치 동수는 준호를 때리며 가르친다. 눈치 빠른 동생은 입을 다물고, 엄마는 보지 못한 척한다. 준호는 아빠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덕분에 메달을 딴 준호는 메달도 좋지만, 메달이 곧 수영이라면 더이상 수영이 하기 싫다. 


준호가 더는 맞고 싶지 않아서 수영을 그만두겠다고 하자 정애는 “엄마랑 같이 열심히 했는데 니가 무슨 권리로 수영 그만둬!”하며 준호를 나쁜노무 새끼로 만든다. 수영이 그리운 준호가 수영장에 무단침입한 날, 정애는 다시 말한다. “준호야 너 왜 그래? 하랄 때는 싫다더니.” 


정애가 준호에게 하라고 했던 것은 수영일까. 준호가 하고 싶었던 것은 수영이 맞나. 정애가 원했던 것은 메달이고, 준호가 원하는 것은 단지 마음껏 좋아할 자유뿐이다. 둘은 한 번도 수영이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에 합의를 본 적이 없다. 준호는 코치를 찾아가 다시 ‘수영’을 가르쳐달라고 말한다. 메달을 따게 해달라고, 그래야 계속 ‘수영’을 할 수 있다고. 준호가 말하는 수영들은 같은 것이 아니다. ‘좋아하는’ 수영을 ‘할 수 있게 하는’ 수영 두 가지다. 무엇을 마음껏 좋아하기 위해서는 당위가 필요하다. 메달이 없다면, 메달을 따려는 간절함이 없다면 좋아하는 마음을 충분히 증명할 수 없으므로 계속 수영장에 갈 수는 없다. 그게 규칙이다. 수영장을 떠나고 싶다면 다른 레일의 모두를 이길 수 있는 새로운 시합에 뛰어들어야 한다. 엄마는 준호를 포기하고 동생과 새로운 파트너가 된다. 


우리는 모두 최고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걸까. 정말 우리 모두가 1등이 되길 바란다고 믿는 것은 폭력이 아닌가. 준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코치 동수는 자신이 학생일 때 때려서라도 바른 길로 이끈 선생이 없어 망가졌다고 하지만, 정애에게 계속해서 엄마만 없으면 준호가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동수는 알고 있다. 폭력을 정당화 하고 싶은 마음은, 스스로의 미래를 방치한 것에 대한 면죄부를 얻으려 발버둥치는 것일뿐임을. 아이를 망가뜨리는 건 선택권을 빼앗는 것이고, 아이는 좋아하는 마음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엄마는 절규한다. 준호 탓에 더는 메달을 꿈꿀 수 없게 되었다고 믿으며 “엄마랑 같이 열심히 했는데 니가 무슨 권리로 수영 그만둬!” 말하는 엄마는 가족 모두를 위해 소원을 빌었지만 자신에게 주고 싶은 선물은 찾지 못한다. 그녀에겐 타인을 제외하고 자신을 설명할 언어가 없다. 타인의 꿈을 나눠 꾸는 사람은 각자에게 주어진 일인분의 질서를 교란해 우리 모두를 비참하게 만든다. 그걸 이 시대의 어머니 모습으로 만드는 것에 동의하진 않는다. 다만 나 아닌 것에 미래를 거는 일의 씁쓸함이 준호가 잠수한 물 속을 파고드는 호각과 고함 소리가 되어 수영장 위를 둥둥 떠다닌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내가 아닌 것에 쏟고 그것이 나의 삶을 바꾸길 기다리나. 


무엇이 되고 싶다는 목표보다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본다. 좋아하는 대상이 일이 되면 곧 싫증이 나거나 괴로워진다는 말을 한다. 좋아하는 일은 나를 소모하지 않는다. 그 대상을 평소와 다른 입장, 곧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멀어진다. 마음을 증명해야만 하는 순간, 나와 좋아하는 일 사이에 제3의 이해관계가 생기는 순간에 모두를 둘러싼 감투와 역할극이 우리를 더이상 아무것도 좋아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뿐이다.


영화 포스터에서 미소 짓는 준호를 본다. 수면 아래 가장 깊숙한 곳, 햇살과 천장 유리창이 풀장 바닥에 만든 네모난 햇살의 구역에 내려 앉은 준호는 말한다. 그 안에서 햇살을 받고 있으면 에너지가 충전된다고.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방식으로 소화할 자유가 있는지, 나는 그 방식을 알고는 있는지, 그리고 좋아하고 있는지. 몇 등이 되고 싶으냐는 말 대신 물어보고 싶다. 당신에게 삶을 헤쳐나갈 마음의 근육이 있는지.



이 글은 웜그레이앤블루 일간 <저 여기 있어요>의 글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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