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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자 Mar 10. 2018

파수꾼 :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Bleak Night, 2010

: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이제훈, 서준영, 박정민, 조성하 주연 / 윤성현 감독


 

그 어떤 것도 지켜내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파수꾼이라는 제목은 점점 초라해진다. 왜 아무도 아이들을 지켜내지 않았고, 지켜내지 못했을까. 너무나도 현실과 맞닿아 있고 마치 진짜 현실과 같은 연출로 시작부터 끝까지, 끝나고 나서도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것들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제대로 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눈앞에 나를 객체로 두고 전개된다.

 

한 아이가 죽었고, 아버지는 아이의 갑작스런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아들의 친구들을 찾아다닌다. 자살한 아이는 같은 반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게 된 희준이 아닌 소위 ‘짱’인 기태. 영화는 처음부터 누가 죽은 것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당연히 희준이 죽었을 거라 생각하고 보다가 기태의 죽음이라는 사실에 당황한다. 그리곤 왜 기태가 자살을 했는지 과거와 현재를 뒤섞어가며 파악하게 된다. 기태는 아버지와의 소통 부재 속에서 어머니 없이 자랐다. 기태는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는 것이 좋았고, 고등학교에 와서 짱이 되자 우월감에 빠진다. 우월감은 점점 기태의 말투와 행동에 배여가고, 친구들은 기태가 자신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다. 관계의 위치 격차가 벌어지자 친구들은 더 이상 기태에게 속마음을 표현하지 않는다. 기태는 이런 친구의 모습이 가식이라 욕하지만 친구들은 오히려 기태가 내키는 대로 할 때의 이중적인 모습을 가식적이라 여긴다. 친구들과의 관계는 점점 꼬여만 가고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희준과 동윤이 떠난다. 희준의 떠남은 기태와 친구들 관계의 문제점이 처음으로 불거진 사건이었고, 동윤은 기태의 배려 없는 태도에 상처입고 “처음부터 너만 없었으면 돼”라는 말과 함께 기태를 버린다. 분명 기태만의 잘못은 아니다. 기태에게 눌려 지내며 속으로만 비난하던 무리들과 처음부터 기태와 이야기 해볼 시도조차 않던 희준, 친구들의 문제가 심각해질 때까지 자신의 일에만 신경 쓰던 동윤 모두에게 문제가 있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출처: 네이버 영화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파수꾼이 되어주지 못했다. 학원물 드라마라면 나올법한 선생님조차 등장하지 않고, 아이들을 지켜주고 제어해 줄 수 있는 부모님이란 존재는 모든 사건이 벌어지고 난 후 비극적인 결과에 당황해 할 뿐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지키지 못했고 아이들은 친구들도,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했다. 그야말로 방치 그 자체. 우리를 옥죄는 소통의 부재와 소외가 화면에 만연하다. 그런 상황을 반영이라도 하듯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인물도 이 사건을 자신의 시점에서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다. 관계자가 될까 두려워하며, 사건 서술의 바톤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다. 기태가 어렸을 적부터 느껴온 ‘가정의 소통불능’은 관심을 얻고 싶은 욕망으로 표출이 됐고, 아무에게도 올바른 방향을 제시받지 못한 기태의 욕망은 삐뚤게 표현된다. 다만 기태에게 국한 된 문제가 아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기태의 잘못된 행동에 오히려 환호하는 아이들, 처음부터 대화에 능하지 못해 보였던 희준 그리고 신경 쓰는 척 할 뿐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동윤까지.



출처: 네이버 영화


이들이 만나기 전부터 뭔가 잘못되어 있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올바른 파수꾼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아이들에겐 처음부터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영화 속 어른의 부재는 아이들의 정서 형성과 인성 발달의 과정에 어른들의 관심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이들은 자존심을 세우는 방법도 삐뚤어졌을 뿐만 아니라 감정을 나누는 방법도 알지 못한다. 다만 어른들 예외는 아니다. 사회는 교육의 기능을 잃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소통을 단절시켜 인간 소외를 만들어 냈다. 아무도 지켜준 적 없었기에 때문에 나도 당신을 지켜줄 수 없었고, 악순환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결국 기태의 죽음이 온갖 치부를 드러냈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하는 아파트가 빽빽한 장면은 진부하지만 차가운 도시 속 인간적인 것들의 부재를 의미하겠고, 세 친구의 행복한 한 때를 증명하는 폐 역사는 이미 그 장소가 폐기 된 곳이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끝이 보이는 아이들의 위태로운 관계와도 같다.

 

여전히 희망은 있다. 기태가 어릴 적 받은 야구공은 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다. 어린 시절 '누군가'에게 받은 공은 기태에게서 희준, 동윤으로 전해진다. 야구공은 기태가 어린시절 애정과 순수함을 담아둔 의지다. 하지만 관계가 무너져가던 때에 그 시발점과도 같았던 희준에게 야구공을 전한다. 그 후 기태의 공은 동윤에게 전해진다. 죽음 이후에도 의지는 이어진다. 오해의 뒤에서,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을 때에도 기태는 친구들을 믿었고, 사랑했다. 기태로부터 시작된 문제였으나 우리는 기태에게서 희망을 발견한다. 죽음은 결국 기태를 책임감 없게 인물로 그렸지만 기태는 관계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했고, 관계를 지키려 했다. 다시 시작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마음을 열었다. 많이 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미숙했으나, 오히려 그 모습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었다.

 

파수꾼의 전개방식은 독특하다. 과거와 현재의 연결에 어색함이 없고, 순서까지 흐트러놓았지만 오히려 잘 짜여진 틀이 되어 긴장감을 자아낸다. 과거와 현재를 한 장소에 불러내어 인물의 생각과 감정을 영상째로 가져다주며 해석하게 한다. 이 잘 짜여진 틀은 사건들의 개연성을 높인다. 지나간 영상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고민하게 하고 이유 없는 장면이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장치가 된다. 영화는 계획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누구나 괴롭힌 당한 희준이가 자살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영화 줄거리에도 한 소년이 죽었다고 되어있다. 의도된 오해는 영화가 말하고자하는 의미를 더 부각시킨다. 피해자도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모습이 그려지며 모든 사건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선형적이지 못한 회상과 처음부터 죽음을 제시한 것은 문제점을 부각시키고 우리들로 하여금 능동으로 영화를 파악하게 한다. 

 

앞서 언급한 영화의 시점 또한 독특하다. 굳이 누군가 주인공이라고 집어 낼 수 없는 시점은 주제를 더 부각시킨다. 소통의 부재, 무책임, 아무도 지킬 힘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서술자가 되는 것조차 꺼려한다.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하는 친구들은 이 친구 저 친구에게 기태의 죽음에 대한 설명을 떠넘기려 한다. 화면에서 관객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정되어 있다. 우리는 기태 아버지의 답답한 마음이 되고, 스스로의 부재를 돌아보게 된다. 



‘누군가를 지켜낸다는 것은 나를 온전히 지켜내는 것과 같다’ 


파수꾼을 보며 혜화,동이 떠올랐다. 언뜻 봐서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는 영화 같지만 영상이 우리에게 주는 의문점이나 반전이 내용은 달라도 방식에 있어서 비슷했다. 추측하기도 전에 답이 떠오르는 문제에 대한 반전이나 예전부터 이어져온 희망의 실마리를 마련해놓은 것이 그렇다. 자식을 지켜내지 못하고, 자신의 강아지를 전부 다른 곳에 분양한 후에 갈 곳 잃은 개들을 모아서 키우는 혜화의 모습이 파수꾼이 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질책 같았다. 파수꾼을 보며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슬픔과 미안함이 떠올랐다. 내가 온전히 나이기 위해 나를 둘러싼 것들을 지킬 수 있는 마음의 힘과 책임감이 필요하다. 그들을 지킬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들이 나를 지켜줄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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