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재은
흉터는 치료할 수 있다. 점을 빼면 그 위에 남은 자국마저 지워준다. 흉터 치료를 하면 정말 흉터는 사라지나. 이미 패인 곳을 패이기 전으로 똑같이 되돌릴 수도 있는 걸까? 상처는 아문다. 아문다는 것이 치유의 종착을 말하느냐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답한다. 여린 살이 올라오고 다시 단단해진 후에 그 자리는 여느 피부와 같은 역할을 하지만 환상통처럼 내부에서 다시 시작하는 고통은 어떻게 해야할까. 트라우마는 불현듯 느껴진다. 우리는 분명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통증을 감지한다. 느닷없이 불러일으켜진 몸과 마음의 기억이 우리를 움츠러들게 한다.
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의 주인공 아빈은 아버지로부터 대를 물려 내려온 트라우마를 갖는다. 아버지 윌러드는 전쟁터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전쟁 포로를 보고 더 이상 기도하지 않는다. 제대 후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가 생기고, 윌러드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다시 기도를 시작하지만 곧 아픈 아내를 잃을 위기에 앞에서 그는 공포에 빠진다. 그의 기도는 실용적이고 직설적이다. 윌러드는 아빈에게 엄마를 살리고 싶지 않느냐 따져 물으며 목숨을 구걸하는 기도를 외운다. 영혼의 믿음을 생략한 그의 기도는 십자가에 제물을 바쳐 구원받고자 한다. 신의 이름 아래 자행된 참혹한 장면에 등을 돌렸던 그는 신의 이름 아래 자신의 잔혹성을 합리화한다. 치유하지 못한 트라우마는 한 사람의 인생을 끝까지 놓아주지 않고 그들의 삶에 반복해 나타난다. 유일하게 의지하고 탓할 만한 곳으로서.
아빈은 아버지의 잔혹성을 목격한 이후에도 그가 가르친 삶의 방식을 유지한다. 우리는 본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목격 이전으로 삶을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아빈 안에 남는다.
나에게도 트라우마가 있다. 오른팔이 안 좋아 잘 쓰지 않는다. 쓰지 않으니 근육이 굳고 할 수 없는 동작이 생겼다. 십 년이 더 지난 일이다. 오른팔은 이제 그 길은 상상하지 않고 그 자세를 시도하지 않는다. 팔이 빠질 테니까. 얼마 전 운동 코치는 내 몸의 오른편을 여기저기 탐색하곤 다른 경로를 말해줬다. ‘갈 수 없는 길이 있다면 다른 길로 가면 돼요.’ 하나의 동작을 해내는데 하나의 길만 있는 건 아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오른팔을 다치고 취한 적 없던 자세 하나를 다시 할 수 있게 됐다. 내 몸인데도 상상할 수 있는 범위가 얼마나 작았는지 새삼스럽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에도 닫힌 문이 있다. 관계의 시작과 끝마다 움츠러드는 지점이 하나둘 늘어난다. 쓰디쓴 관계의 끝마다 열고 싶지 않은 문이 하나씩 생겼다. 피부가 벗겨진 것처럼 쓰라린 그 자리를 만지고 싶어하지 않는 나와 그 만질 수 없음에 질식할 것 같은 나. 다른 사람과 다른 방향으로 그 이야기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에 눈을 감고 나를 방어했다. 트라우마를 탓하는 건 오랜 버릇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의 핑계로 삼은 트라우마는 한동안 나를 불필요한 감정소모로부터 지켜준다.
윌러드는 트라우마를 재현하는 것으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한다. 대를 물린 트라우마는 긴 시간 아빈의 삶을 좀먹는다. ‘아무것도 살릴 수 없음.’ 하지만 아빈은 자신을 포기하고 신을 찾지는 않는다. 견고한 과거의 기억 아래 살아가도 그는 트라우마를 핑계 삼아 주저 앉지 않는다. 영화는 아빈이 신과 트라우마에 의존하지 않고 선택한 길 위에 또다시 수많은 트라우마의 흔적을 올려 둔다. 아빈의 가족 근처를 맴돌던 인간들의 잔혹함과 상처를 들추며 트라우마가 한 인간을, 그와 이어진 또 다른 인간들을 어떻게 악마로 만들어왔는지 트라우마의 일상성을 이야기 한다. 꼭 우리가 벗어나지 못할 것처럼.
우리는 본 것 이전으로 돌아갈 순 없지만, 아직 보지 않은 것을 선택할 수는 있다. 과거가 오늘의 나를 대신하게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 트라우마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익숙한 길을 잃은 것뿐이다. 그 어떤 길도 모르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그렇게 안 좋은 상황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