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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자 Mar 11. 2018

맹목적 사랑의 구원이라는 환상

영화 <미스테리어스 스킨>

영화 <미스테리어스 스킨> 

맹목적 사랑의 구원이라는 환상,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구원해"

조셉 고든 래빗, 브래디 코베 주연 / 그렉 아라키 감독


북미 개봉 뒤 만 12년이 걸려 한국에 개봉, 조셉고든래빗의 이십대 초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사실과 한국판 포스터만으로도 보고 싶어지는 영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다루며 서로 다른 환경에 처한 두 아이가 곡해된 기억에서 어떻게 자라나는 지 따라간다. 주인공들은 아역부터 성인 연기자까지 완벽함을 보여주고, 군더더기 없는 치밀한 연출과 명치를 가격하는 주제 표현력에 한동안 마음이 멍했다. 영화가 우리의 환상을 걷어내고 치부를 드러내는 방법이 격렬하여 정신 차릴 수 없었으나 이내 입을 다물게 되었다.





. 맹목적 사랑의 구원이라는 환상


닐은 사랑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혔다. 잘못된 시작이 늘 그렇듯 작은 오해로 인생을 전복시킨다. 누군가의 결핍이 나로 인해 채워진다는 사실이 주는 충만함에 사로잡히고, 그가 주는 맹목적 사랑에 매달리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스스로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닐은 존재의 결핍을 채워주던 코치가 떠나자 빈 자리를 채울 방법을 알지 못한다. 아동성애자였던 코치와 보낸 시간은 감정과 정보의 불균형이 강제되었고, 닐에게 상대방과 정상적으로 유대를 나누는 경험을 제공하지 못했다. 그는 코치와 그랬듯 어떤 고통이나 은밀한 비밀을 통해서만 관계를 묶을 수 있게 된다. 타인이 주는 감정만 소비하며 이어지는 관계에서 사랑은 구원이라는, 사이비 종교가 줄 법한 환상에 불과하다. 다만, "당신이 나한테 그랬잖아, 천사라고." 닐이 뉴욕으로 가기 전 코치가 살던 집 앞에서 뱉은 한 마디는 분명 어느 순간부턴가 모든 것이 환상이었단 걸 닐도 알고 있었다는 비루한 현실을 드러낸다.




. 당신의 부재가 만든 오늘


브라이언의 시간들은 부재로 점철되어 있다. 그가 야구 유니폼을 입은 채 코피를 흘리며 지하실에서 발견되었을 때 우리는 두 가지 부재와 마주한다. 하나는 기억, 하나는 아버지. 브라이언의 문제가 닐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거란 예감도 함께. 기억을 잃은 직후 그의 곁에 투명인간처럼 화면 속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아버지는 이내 그의 트라우마를 억압하는 존재가 된다. 브라이언이 잊을 수 없는 기억에 맞서는 방법은 그대로 잊는 것뿐이었다. 육체적 고통을 겪으면서까지 정신이 기억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억압 외에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브라이언이 겪은 부재는 곧 억압으로 대체되었다. 심약한 어린아이에게 아버지는 부재하는 동시에 심약함에서 자라날 수 있었던 감성을 억압했다. 정체된 기억은 꿈으로 두서없이 나타나고 역으로 트라우마를 쫓는 길이 된다.






. 우리는 다르고도 같다

  

닐이 겪는 맹목적 사랑의 구원이라는 환상을 파헤칠 단서는 브라이언이 겪은 부재에 있다. 닐과 브라이언이 야구부에 오게 된 이유는 다르고도 같다. 닐은 어머니의 애정사업에 후 순위로 밀려 야구장에 '맡겨' 졌고, 브라이언은 아버지의 남성성에 대한 강압으로 야구장에 '떠밀려' 왔다. 결국 보호자라는 이름의 부재로 인해 아이들은 잘못된 손에 떠넘겨진다, 세상에 내팽겨쳐진 아이들의 길이 늘 그렇듯.

한 남자가 고등학생 아들의 자살을 쫓는 영화『파수꾼』(https://brunch.co.kr/@youthsong/135)에서 '어른'들은 치밀하게 부재한다. 아이들이 서로를 지킬 능력이 없었던 이유는 어른의 부재가 불러온 결핍이었다.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진술의 바통이 끊임없이 넘어가는 연출 속에서 안개 가득한 숲을 헤매는 아이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채 긁히고 쓸리며 길도 없는 길을 헤맨다. 다만 우리의 희망은 아직 아무 능력도 없는 아이들의 연대에 있다. 파수꾼에서 기태가 친구에게 전한 야구공에 담긴 믿음과 같이, 닐과 브라이언이 각각 매춘과 외계라는 구원의 환상에서 벗어나 빼앗긴 시간을 함께 마주설 수 있게 되었듯이. 우리는 단지 함께 서있는 것만으로 서로의 시간을 지켜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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