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다른 존재가 인간을 동경한다는 발상이 너무 인간적이지 않나요.”
코고나다 감독, 콜린 파렐, 저스틴 H. 민, 헤일리 루 리차드슨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에 종종 묻는다. 너는 내 것이니, 아니면 사진 속에 남은 이미지가 기억인 것처럼 꾸며낸 장면들이니. 가끔은 그래 그것이 내 기억이 아니면 뭐람, 생각하지만 기록은 기억이 될 수 있는지 여전히 확신하지 못한다. 기록되지 않았으나 가지고 있는 기억은 아주 멀리서 시작한 내 존재의 연속성을 설명하는 순수한 것이고, 기록으로 남은 기억은 자의적이지만 긍정적인 것이다. 내가 기억으로 삼고자 하는 것, 내 인생을 설명하는 재료로 쓰고자 하는 것, 내가 중요성을 두는 것, 그리고 소중한 것.
기억은 무엇일까,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양yang이 움직이지 않는다. 입양한 딸아이의 문화 정체성 학습과 적응을 위해 집에 들였던 문화 테크노 양이 작동을 멈추자 가족은 다소 곤란한 상황에 놓인다. 당장 오후에 딸을 돌봐줄 사람이 없다. 양은 차이나 타운의 한 가게에서 중고로 데려왔는데 그 가게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본사 외주 서비스 센터에서는 ‘중심부’에 문제가 생겨 수리할 수 없고 재활용만 가능하다고 답한다. 제이크는 결국 복제인간 아이들과 사는 것이 꺼림칙해 거리를 뒀으나 자신에게 친절했던 이웃이 소개해준 업자를 찾아간다. 업자는 또 다른 사람을 소개하며 양에게서 꺼낸 기억 저장 장치를 확인해보라고 한다.
몇 가지 곡절 끝에 제이크는 테크노 사피엔스 연구자에게 기억 판독기를 건네 받는다. 제이크는 아내에게도 딸에게도 상황을 자세히 알리지 않고 혼자서 양이 남긴 기억, 혹은 데이터의 자취를 따라간다. 기억 장치 속 장면들은 날 것 그대로지만 제이크는 그 영상이 보여주는 순간들에 단숨에 빠져든다. 빠져든다는 것은 공감과 의문이 감화하는 지점이 있다는 뜻이고, 제이크가 그 안에서 발견한 것은 뜻밖에도 ‘감정’이다. 그 장면이 선별되었을 이유를 짐작하는 일이 곧 감정으로 이어지는 길이 된다. 그 감정에 가득 담긴 것은, (인간에게는) 사랑이다. 제이크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기억은 감정이 될 수 있을까
양의 기억 속에는 제이크의 가족이 알지 못하는 한 여자가 등장한다. 제이크는 묻는다. 양이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지, 입력된 가족 외에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관계를 맺고 싶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건지. 제이크가 그 사실을 묻는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이나 의구심이 아니라 양의 기억에서 자신이 느낀 양의 감정에 답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양의 기억 장치 속 장면들은 단순하다. 단순한 만큼 저릿하다. 햇살이 흔들리는 장면, 그가 가만 거울을 들여다보는 장면, 그가 물끄러미 제이크 가족을 바라보는 장면, 그가 혼자 남아 지키는 집안 곳곳의 장면들. 왜인지 설명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평화를 느끼는 순간을, 잠시 멈춰서 바라보고 사진으로 눈으로 담고 싶어 하는 순간. 말로 다 할 수 없기에 오래 바라보게 되는 장면들을 양은 기록한다.
양의 기억 속에 담긴 제이크와 제이크 기억 속 어느날의 장면이 오버랩 되어 진행한다. 기억의 선택은 감정이 될 수 있을까. 양은 자신이 보는 순간들에 중요도를 부여해 기억 저장 장치에 남긴 것일까. 기억의 선택은 곧 맥락이고 맥락은 모여 감정과 생각이 된다. 기억은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도구이다. 우연 혹은 선별 과정을 통해 어떤 것은 기억되고, 기록되며, 어떤 것은 어둠 속에 가라앉는다면,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기억과 기록일 것이다. 기억과 기록에서 비롯한 고민과 감정이 나일까.
양의 기억에서 우리가 울고, 웃고, 궁금해하며, 아름답다 여기는 것은 그가 그것을 남겨야겠다고 여겼던 순간의 추동이고, 그가 존재해온 시간이 그에게 선물해준 감각이자 존재의 연속성을 드러내는 증거다.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의 선택에서 비롯한, 연속하는 경험 선상에서 유일한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양은 제이크와 차를 마시며 지식 이상으로 차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는 표현을 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닌 타인, 어떤 존재의 가능성에 선을 그을 수 있나. 인간의 입장에서 그가 말할 수 없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뇌가 보내는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뇌가 학습한 것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지 못하는 인간의 부자유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 있나.
우리 모두는 정체성이라는 언어 앞에서 헤맨다. 테크노 사피엔스 양이 함께 사는 가족의 아빠, 엄마, 딸의 ‘인종’은 모두 다르고, 딸은 출신마저 다르다. 다른 문화권에서 온 딸을 위해 그 뿌리를 찾아주고자 문화 테크노인 양과 함께 살아가기로 부모는 결정하지만, 결국 양이 그들의 딸인 미카에게 준 것은 가족으로서의 애정과 오빠라는 커다랗고 포근한 그늘이다. 영화는 대사를 통해, 제이크 가족을 통해 표면적으로 인간 존재의 정체성과 뿌리를 이야기 하지만, 이미지를 통해서는 ‘존재’의 정체성을 묻는다. 우리는 어디서에서 왔는지가 아니라,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가 아니라, 정체성이라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은 정말 중요한가를. 삶의 복잡성에 자꾸만 선을 긋고 무엇이든 설명하기 위해 애써 온 인간들에게, 더 나은 것과 우위를 가리려는 인간들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양을 떠나보내는 지금 이 순간, 양은 무엇이었나. 우리는 삶에 몇 가지 선을 그을 만큼 무언가를 규정하고 설명할 능력이 있나. 그어진 선들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나. 함께 한 가치와 별개로 양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인공지능은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은 정당한 질문인지 돌아본다. 인간은 인간 아닌 존재를 너무도 쉽게 타자화 한다. 남성이 여성에게 오랜 기간 그래왔듯, 언어에서 배제하고 그 존재를 인간에 존속시킨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택하고 생각할 수 있기에 도덕적 우위를 가질 만큼 우월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 중심적인 발상은 곧 모든 곳에 스며들어 인간과 인간 사이도 금세 가르고 우열을 만든다. 우리가 여태 그래 왔듯이.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을 구분하고 인간 위주의 선택을 하는 태도는 결국 인간 사이에도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음을 예고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돌직구 없던 이 영화에서도 대뜸 날아오는 질문이 있다. 제이크는 양의 기억 속에 있던 복제인간에게 양이 인간이 되고 싶어 했느냐고 묻는다. 그녀는 말한다.
“모든 다른 존재가 인간을 동경한다는 발상이 너무 인간적이지 않나요.”
여기에서 ‘인간적’이라는 표현은 인간이란 존재의 오랜 무신경함을 꼬집는다. 애프터 양의 세계는 인종적 우월성의 구분을 파괴한 듯한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결국 이 사회는 복제인간과 테크노 사피엔스에 대한 우월성을 통해 안정을 찾는 형태로 여전히 모순을 안고 있다. 이것은 차츰 나아질 수도 있고, 다시 악화할 수도 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벗지 못한 인간 존재가 다시 자신의 확고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상대를 낮출 합리화 계제를 찾아낼지도 모를 일이다.
인공지능이 감정을 느끼는 것이 밝혀져 뒤를 쫓기고 음모가 발생하는 영화들을 세어본다. <애프터 양>은 복제인간이나 테크노 사피엔스의 이유나 정체성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들은 존재 자체로 자신을 인식하는데 반해 헤매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만이 그것을 궁금해하는 듯 보인다. 결국 시간과 공간도 알기 힘든 이 영화에서 우리가 볼 것은 양의 기억 장치 속에 있는 장면들이다. 양이 선택한 기억의 묶음 속에서 제이크가 그러했듯 사랑의 장면들을 읽는다. 어떤 대상을 지그시 바라보는 일에는 의미가 깃든다. 눈에 오래 담고 싶은 풍경은 그 시선에게 중요한 것이고, 이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날 것의 데이터다.
의문과 두려움 없이 사랑하고 아끼는
우리는 맥락이다. 끝이 곧 시작이고, 시작이 곧 끝이라는 애벌레와 나비의 이야기에서 그 말의 뜻을 믿고 싶으냐는 물음에 양은 끝이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건 그가 인공지능이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두려움 없이 사랑하고 아끼는 것들의 기억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지나왔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에게 자신의 몫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두고 떠나는 이들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도 없는 것이리라고.
정체성이란 환상 속에서 자신의 삶이 하나의 맥락을 가진 운율과 같다는 것을, 스쳐가는 바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반복해 등장하는 릴리 슈슈의 노래 글라이드에서는 바람이고 싶다고, 선율이고 싶다고 부른다. 우리에게 주어진 나 자신이 되고 싶다는 사회적 욕망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까.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실현해야 한다는 부담과 무언가를 이루지 못했다는 불안 대신 자연스럽게 두려움 없이 저 끝과 시작까지 흘러갈 수 있을까.
사랑이라는 말은 아무리 써도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들어도 들어도 충만해지지 못하고 쉴새 없이 말해주기를 원하거나, 증거를 얻고 싶어한다. 말에는 힘이 없고 말해지지 않은 것은 언제나 힘이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