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실이는 복도 많지, 2019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찬실이는 복도 많지, 2019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한 가지를 좇는 삶을 생각한다. 몰입. 푹 빠져들어 인생을 바칠 정도의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를 상상해보기도 한다. 그것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 혹은 그것만 보는 사람. 그는 행복할까. 찬실은 영화 프로듀서로 삶을 갈아 넣으며 행복을 느낀다. 결혼은 못해도 평생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영화는 만들 줄 알았는데. 그는 기 감독과 거의 모든 작품을 함께 만든다. 감독이 급사를 한 뒤에 모든 이력이 기 감독 영화인 그를 찾는 영화사도 감독도 없다. 결국 아무도 찾지 않는 프로듀서가 된 찬실은 아는 후배 배우의 가사 도우미 일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시나리오 작가 영을 만나고 희망을 잃은 가슴에 한 줄기 빛이 내린다. 영화 없이도 자신을 설레게 하는 대상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두 사람은 영화를 사랑하지만 현실적인 조건 탓에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하며 살아간다. 가슴에 꿈의 불씨를 품은 사람, 자신의 삶을 공감하고 나눌 수 있을 것만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찬실은 영에게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계속 영화를 할 수 있을까, 영화를 빼면 나는 뭘까. 세상이 나에게서 영화를 뺏어갈 수도 있는 걸까, 나는 뭘 하고 살아야 하지, 계속 영화를 할 수 있을까. 쳇바퀴처럼 돌고도는 질문을 결국 영에게 뱉어낸다.
"영화 안 하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찬실은 영에게 묻는다.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것이 당신에게 있는지, 그렇다면 그것 없이도 살 수 있을지, 찬실은 영화밖에 앉아 화면을 쳐다보는 관객들에게도 묻는다. 찬실의 방황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랑으로 길을 찾은 듯 보이지만 그것도 영 잘 풀리질 않고 찬실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어쩌면 찬실은 지금까지는 영화에 매달려 왔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자신의 삶을 책임져줄 것이라고, 미래가 되어줄 것이라고. 그랬던 것처럼 영과의 관계가 자신의 삶을 가득 채워줄 것이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찬실은 '방향'이라는 안정적인 기준을 갖고 싶었던 게 아닐까.
타인이 자신을 채워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에, 찬실은 무언가 자신을 채워주길 바라는 대신 사랑만으로도 가득 차는 사람이 되기를 택한다. 영화 외의 것에 마음을 두고, 다른 곳에도 삶이 있다고 믿으면 되는 게 아닌가 싶던 생각은 자신에게 미소를 지어주지 않는 상황으로부터의 현실 도피였는지도 모른다.
놓칠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아니라 오만 가지 다 하고 싶은 욕심이 내겐 있다. 분명 제일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내 눈을 다 가릴 정도가 되지는 못하는 일인지, 아니면 내가 한 가지만 사랑할 수는 없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가끔은 하나의 목적만을 가지고 나아가는 사람, 포기할 수 없는 너무나도 큰 사랑에 몰두하는 사람을 보면 나지막이 패배감을 느끼기도 한다. 물론 나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기쁨과 슬픔이 있다. 반짝이는 수많은 존재가 끝도 없이 펼쳐진 미래를 볼 때 가슴이 팽창하는 기분과 함께 찾아드는 충만함 같은 것들이. 다가올 미래가 확실하지 않아도 괜찮은, 불안보다는 설렐 수 있는 마음이.
어쩌면 나는 자주 잃고 자주 얻는 사람이기를 택했는지도 모른다. 사랑을 잃고도 글을 썼던 기형도처럼, 나에게는 잃은 것을 노래하고도 새로운 것을 사랑할 용기가 있는게 아닐까. 못 살겠다고 엉엉 우는 대신 털고 일어나 다시 눈을 반짝일 수 있는 사람으로 사는 복을 누린다. 그럼 나는 사랑하기만을 선택한 사람일까. 사랑은 저마다의 방식이 있고, 각자 선호하는 스타일도 다르다. 나는 사랑이 도처에 널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완전한 사랑을 갖고 싶은 나의 마음은 진실하지만 그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는 영영 되지 않을 사람일 것이다.
영은 영화를 제외하고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것들을 하나씩 꺼내 말해준다. 사랑하는 사람, 좋아하는 것들. "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영화 없이도." 영에게도 말처럼 쉽고 가벼운 결론은 아닐 것이다. 그는 여전히 시나리오를 쓰고 있으니까. 다만 영화가 삶의 전부가 아닌 사람도 있는 법이다. 영화가 작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여전히 사랑할 힘을 가졌기 때문에, 그리고 언제까지고 영화를 그리워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