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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자 Jan 18. 2022

슬픔이 잊힐 때 (강한 슬픔의 사회)

영화 <아이히만 쇼>와 <나는 부정한다>

슬픔이 잊힐 때

영화 <아이히만 쇼 The Eichmann Show, 2015>와 <나는 부정한다 Denial, 2016>


슬픔의 표정

슬픔은 어떤 얼굴을 하고 살아가야 할까. 슬픔은 언제까지 슬프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슬픔은 말해질수록 가벼워질 수도 있을까.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이제는 괜찮다며 다른 사람들 앞에 멋쩍은 미소를 보여주고야 마는 슬픔을 생각한다. 언제까지 슬픔에 잠겨 살 것이냐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 분위기를 좀 맞추라는 말에 입을 다물어야 할까. 당연한 것을 조심스레 말해야 하는 세상을 우리가 만들어 가고 있는 건 아닌지.


당연한 것의 슬픔

이스라엘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이 열린다. 6백만의 유대인 추방과 학살을 주도한 나치 전범과 당시 사건의 실체를 밝혀내기 위한. 프로듀서 프루트만은 허위츠 감독을 섭외해 전대미문의 37개국 동시 TV 생방송을 기획한다. 오늘날처럼 정보가 온 동네방네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던 1961년의 4월 11일, 나치의 무조건 항복 이후 16년이 지난 후에 아이히만을 공개적으로 재판하는 것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2022년,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어디서든 정보를 찾을 수 있고 교과서에 실린 단편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미처 공식적으로 담기지 못한 것들도 확대해 영화로, 책으로 만들어진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이 이야기가 익숙해지기까지, 당연한 것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까. 역사적인 사실이 명명백백 당연하게 여겨지기 위해 약자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오래 짓밟혔는지 그 과정을 들여다볼 때 우리는 이 모든 진실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식 이후, 그 당시는 어땠나. 충격과 공포의 엑소시스트가 만들어지기도 전이다. 현대의 무시무시한 폭력과 자극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엑소시스트는 그저 무섭고 불쾌한 영화 리스트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당시에는 임산부가 아이를 떨어뜨리고 노약자가 심장마비로 사망, 이후에도 범죄의 동기가 되었다고 재판에서 증언하는 일이 벌어지는 등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아우슈비츠가 있던 동네의 주민들조차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고(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인근의 독일인이 아우슈비츠 사망자 시신을 수습하는 장면이 나온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그 최악의 장면들을 상상할 여지는 더욱 없었을 것이다. 과거의 자극과 현대의 자극은 무시무시한 크기로 다르다. 그래서 더욱 아이히만의 재판은 당대에 충격적인 것이었다. 피해자가 당시 상황을 묘사하는 광경을 사람들은 숨죽여 바라본다. 당사자는 그 기억을 되짚다가 경련을 일으키고 실신한다.

본다는 행위는 얼마나 가벼우며 또 중요한가. 증인이 방송에 나오기 전까지는 기자들마저 지루하다며 채널을 나사의 우주선 발사 장면으로 돌리지만, 이후 증인이 등장해 그 당시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텔레비전이 있는 방에 머무는 것조차 힘들어한다. 이스라엘에 사는 유대인 이민자는 아우슈비츠에서 팔에 새겨졌던 번호를 보여주며 방송 이전까지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진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파헤치는 데에 관심이 없다. 사람들은 쇼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프루트만이 이 재판을 쇼로 만들지 않았다면 진실은 이만큼의 파급력을 갖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보게 만드는 것, 그 보는 행위를 얻어 내기 위한 싸움이 진실의 시작이었다. 약자의 목소리가 세상에 나가기 위한.

선량한 개인을 괴롭히는 것은 불쾌한 진실이다. 듣고 싶은 말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다를 수 있을 때 사람들은 귀를 막기도 한다. 어서 빨리 그 장면이 지나가길 바라며, 세계의 연대를 모르는 척하고 싶어 한다. 현실을 모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편하다고 느낄 수 있다. 물론 그것은 개인의 종말이다. “개인주의에 의존하는 정치 체제의 몰락이다.(티머시 스나이더, <폭정>)”


당연한 것의 슬픔

<나는 부정한다>의 역사학자 데보라 립스타트는 그다지 호감이 가는 인물은 아니다(적어도 영화 속에서는). 그녀는 홀로코스트 부인론자 데이빗 어빙을 비난하는 글을 쓴다. 1994년, 데이빗 어빙은 홀로코스트의 증거를 가져오라며 명예훼손 죄로 그녀를 고소한다. 1996년, 미국과 같은 무죄 추정의 원칙이 없는 영국에서 그녀는 고소를 당한 입장이지만 홀로코스트를 증명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증명하기는 쉽지 않다. 당신의 ‘상식’을 허구로 몰아가는 사람에게 그 존재를 증명하는 일은 정신병이 걸릴 만큼 지독한 일일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상식의 기반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는 불가능에 가깝지 않은가. 화장실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바깥쪽으로 걸지 안쪽으로 걸지는 세기의 논쟁 감이다(신경 안 쓰는 사람도 많다. “그게 중요해?”). 심지어 상대방이 증인들의 트라우마를 거짓말이라며 능욕하는 종류의 인간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영화 속 홀로코스트 문제를 떠나 어떤 역사는 관점에 따라 다른 얼굴을 한다. 역사는 불변의 상식인가? 선택 가능한 문제인가? 이것 또한 그녀를 괴롭힌다. 역사학자의 주장과 연구 주제를 옳다, 옳지 않다로 몰아간다면 누가 소신 있게 연구를 이어갈 수 있겠냐는 인터뷰도 나오며 세기의 재판은 찬반 논란에 휩싸인다.

데보라 립스타트를 지지하는 영국의 변호인단은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을 증인으로 세우지 않는다. 이제 재판은 더 어려워지는 듯 하지만, 변호인단은 증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허용하지 않을 작정이다. 그들은 진실을 무기로 데이빗 어빙의 모든 주장을 검토해 거짓말 사이의 모순을 반박한다. 진실은 그 방향이 늘 같고, 그 증언은 서로를 배반하지 않는다. 하지만 거짓은 어떤가 세계를 속이기 위해 얼기설기 기운 오만의 편린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든다. 거세지는 진실이 흐르는 방향에 맞서 서있을 수 있는 거짓된 개인은 없다. 결국 데이빗 어빙은 자신이 쌓은 거짓에 찔려 재판에서 진다.


강한 슬픔의 사회

두 재판 사이의 소름끼치는 간극이 우리에게 악몽을 가져온다. 끔찍한 학살을 밝혀내고 관련자를 처벌한지 반 세기도 채 지나지 않아 상처 입은 세계는 다시 그 상처 낸 존재를 증명하고 피해자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두 영화를 이어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이 세월호인 것은 한국인에게 더 이상 어색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제 그만 잊으라는 말이 밖으로 나오지 말고 가만있으라던 그 외침과 달리 들리지 않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이히만 쇼>를 재생하고 <나는 부정한다>를 끄며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제 그만 슬픔을 넣어두라고 말하는 순간 그 슬픔을 만들어낸 자들의 기세가 다시 커진다는 반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슬픔을 잊는 순간 그 슬픔을 만들어낸 것들은 면죄부를 얻는다. 기억의 상실은 곧 진실의 상실과 같다. ‘잊을 때’가 되어서 이제 그만 놓으라는 말은 당사자들에게 해야 하는 말이 아니다. 아직도 슬퍼하느냐가 아니라 아직도 사과하지 않았느냐가 우리의 태도여야 한다. 잊을 때가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영화 <배트맨>에서 어린 브루스는 부모의 죽음이 그때 그 장소에 부모님을 데려간 자신의 탓이라고 말한다. 가문의 집사인 알프레도는 그것은 강도의 잘못이지 당신의 탓이 아니라고 답한다. 우리가 책 잡아야 하는 것은 슬픔에 무너져 소리치는 사람이 아니라 잘못을 한 채로도 처벌받지 않은 사람이다. 언제까지고 슬픔을 슬프다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인간성에 대한 물음과도 같다. 슬픔은 말해질수록 괜찮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해지며 강해져야 한다. 강한 슬픔이 되어 상처를 만든 자들에게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길 수 없음을 말해주어야 한다.

 다른 데이빗 어빙이 상처를 능욕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약자로 만들지 않도록. 슬픔을 나약한 존재가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건강하게 슬픔을 서로에게 옮길  있는 사회라면 어떨까. 같은 상처가 돌아오는 일이 없는 곳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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