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미국과는 다르게 어떻게 전쟁 없이 노예제도를 폐지할 수 있었나?
환노위는 넘었고 이제는 법사위다!
지난 매거진의 글을 읽으셨던 분은 아시겠지만 (못 보신 분들은 아래 매거진 글 참조)
https://brunch.co.kr/@itssunnytoday/64
내가 마지막 글을 쓴 지 정확히 4개월 만인
2021년 3월 17일
'임신 중 육아휴직' 법안이 고용노동법안소위의 문턱을 넘고,
24일 환노위 전체 회의도 통과하여 드디어 법사위로 향하게 되었다!
사실 지난 4개월이라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작년 11월에는 법안소위에 '임신 중 육아휴직' 법안은 상정도 되지 않았고,
12월에는 소위가 여러 번 열렸지만 200개가 넘는 법안을 축조심사 (올라온 법안을 그냥 하나하나 쭉 읽는 것) 하는데 다 썼고, 실제 법안 통과시키는 소위에서는 상정이 되지 않았다.
올해 1월에는 국회가 쉬기 때문에 회의가 열리지 않았고,
드디어 2월 말에 두 달 만에(!) 열린 회의에서 법안이 상정은 되었지만 언급조차 안되고 회의는 끝났다.
이때가 정말 가장 낙심이 되었던 때였다.
이 회의가 열리기 전에 고용노동법안소위원장인 안호영 의원실 보좌관님이 서면으로 보내달라고 해서
임신 중 육아휴직이 왜 필요하며 조속히 통과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6 페이지 분량의 글을 써서 전달했는데,
알고 보니 보좌관이 받고도 안호영 의원에게는 따로 전달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듣고 사실 화도 났다.
아니 전달을 안 할 거면 서면으로 달라고 하지를 말던가, 없는 시간 쪼개서 밤늦게까지 정성 들여 적은 글인데.. 정말 서운했다.
그렇게 무력감에 젖어들던 그때, 몇 가지 전체적인 흐름이 바뀌는 것 같은 일들이 있었다.
2021년 2월 24일, 통계청에서 2020년도 합계출산율을 발표했다.
0.84
결과는 충격적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에 대해 언론이 앞다투어 소식을 전했다.
우리의 '임신 중 육아휴직' 법안은 저출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대부분의 언론의 논조가 저출산 문제를 '정부'의 잘못으로만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실질적으로 필요한 법을 통과시키지 않는 '국회'의 책임도 크다는 부분을 이야기하고 싶은 기자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물이 들어오고 있음을 직감했고, 이때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저출산에 대한 기사를 쓴 모든 기자분들에게 내가 위에 쓴 글을 포함하여 메일을 보내, 이런 후속기사가 필요하다는 제보를 하였다.
그리고 약 일주일 후...
베이비뉴스의 기자님께서 답메일이 오셨다.
전화로 처음 이야기를 나누고 실제로 만나서 인터뷰를 하기로 하였고, 인터뷰 기사로 써보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난생처음으로(!) 기자님과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우리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잘 들어주시고 기사로 잘 정리를 해주셔서 아래와 같이 기사가 나갔다.
https://www.ibab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3957
또 중앙일보에서 정치를 쉽게 설명해주는 '정글 라디오'라는 팟캐스트를 새롭게 시작하신 박해리 기자님께서도 내 브런치 글을 읽고 팟캐스트에 초청을 해주셨다.
물론 입법이라는 과정을 일반 시민의 눈높이에서 설명하는 것이 초점이었지만 임신 중 육아휴직 법안에 대해서도 소개를 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흔쾌히 수락하고 아내와 함께 가서 녹음을 하였다. 그 결과물은 아래에서 확인이 가능하고, 팟빵 등 여러 팟캐스트 채널에서도 들을 수 있다.
https://news.joins.com/JPod/Episode/505
공교롭게도 인터뷰와 팟캐스트 녹음 바로 전인 3월 17일에 맘까페 분들의 집중적인 연락으로 임신 중 육아휴직 법안이 고용노동 소위를 통과하는 성과가 있었고, 그에 맞춰서 베이비뉴스 인터뷰와 팟캐스트가 자연스럽게 좀 더 희망적인 어조로 이야기될 수가 있었던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이러한 언론에서의 노출이 앞으로의 법안 통과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이 기회를 빌어 관심을 가지고 실어주신 두 기자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그러나 아직 이 법안이 '어떻게' 논의가 되어 통과되었는지는 고용노동 소위의 회의록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었기에 우리는 회의록이 올라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회의록이 올라왔다.
우리 법안은 회의가 꽤 진행된 후 21페이지에서부터 논의가 되기 시작했다.
우선 전문 위원님이 주요 내용들을 정리하여 의견을 내주셨고,그 후에는 고용노동부 차관님이 정부 입장을 이야기하셨다.
이후 이수진 의원님이 이 임신 중 육아휴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유급병가 등의 다른 사용을 오히려 막는 등 오용되는 경우가 없도록 차관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다 장철민 의원이 아까 그 조항에 대해 질의를 하기 시작하는데... 아래 하이라이트 부분이 관련 내용이다. 관건은 태아를 넣는 것이 맞느냐 아니냐이다.
그러다가 윤준병 의원이 한정애 의원 안으로 하는 것이 자연스럽겠다 라고 하고 마무리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어쩌면 이 법안이 이번에 통과되지 못했을 수도 있는 중요한 부분이 있었는데 발견한 분 있으신가요?
바로 이 부분이다.
저번에 이야기했지만, 법안소위는 관례적으로 '만장일치제'로 운영이 되기 때문에 법안이 일치가 안되면 미뤄지거나 통과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별 문제 아닌 일을 가지고 소위원장이 보류하거나 나중에 하자고 미루었다가 나중에 또 지지부진하다가 계류되기가 쉽다.
이번에는 다행히 정부와 의원들이 잘 수습하여 넘어갔지만, 정말 위험한 순간이었고, 안호영 소위원장님 때문에 뒤로 미뤄졌다면 정말 화가 많이 났을 것 같다 ^^
이렇게 역사는 위태위태하게,
사소해 보이는 판단들이 모여 만들어진다.
이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한 사람이 생각났다.
1861년부터 1865년까지 있었던 미국의 내전인 남북전쟁은 103만 명의 사상자를 냈던 미국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이었다.
알다시피 이 내전은 노예제도를 찬성하던 남부와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던 북부의 전쟁이었고, 결국 링컨의 지휘를 받던 북부의 승리로 노예제도가 폐지되게 되었다. 노예제도에 얽혀 있던 많은 이해관계로 인해 의견차를 좁히지 못한 채 결국은 전쟁을 통해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국 또한 노예무역 및 노예제도가 국가 경제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나라였지만, 영국의 경우는 피를 흘리지 않고 노예제 폐지를 이끌어 내었는데, 그 뒤에는 한 사람의 인생에 걸친 노력이 있었다.
그는 바로 윌리엄 윌버포스 라는 영국의 정치인이었다.
부유한 요크셔의 상인의 아들이었던 그는 명문 캠브리지를 졸업하고 1784년에 27세의 나이에 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당시 24세에 영국 역사상 최연소 수상이 되었던 대학 동기 윌리엄 피트(William Pitt)의 절친으로 촉망받는 정치 신인이었다.
그런 그에게 노예무역의 폐지를 위해 준비하던 복음주의계 종교인들이 찾아왔고 윌버포스는 그것을 그의 사명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클래팜 지역에서 모였기 때문에 클래팜(Clapham Sect) 공동체라고 불렸다) 함께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발의했다.
그와 클래팜 공동체는 노예무역 폐지를 우선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 시도가 20년이나 걸릴 줄 그들은 과연 알았을까?
1789년 - 노예무역 폐지 법안 통과 실패
1792년 - ‘점진적' 노예무역 폐지안, 230대 85로 통과
하지만 최종적 노예무역 폐지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고, 계속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1796년- 70대 74
1797년 - 74대 82
1798년 - 83대 87
1799년 - 54대 84로 통과에 실패
1804년 - 하원에서 124대 49로 통과됐지만 상원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들은 전략을 바꾸어 대중의 여론을 바꾸는 방법을 쓰기로 하여 노예무역폐지협회를 전국 각지에 설립하고, 줄줄이 이은 긴 청원서를 모아 의회에 제출하며 20여 년만인
1807년 1월,
노예무역 폐지 법안은 283대 16이라는 압도적 표차로 가결되기에 이른다.
이후 1814년부터는 노예무역 뿐 아니라 노예제 자체를 폐지시키기 위하여 온갖 운동을 조직, 법안을 만들었고,
1833년 7월 29일, 생을 마감하기 3일 전인 26일, 의회가 영국내 노예제도를 완전히 폐지하기로 결정한 것을 듣고 3일 후에 사망하였다.
한 달 후 상원이 법안을 완전히 통과시킴으로 영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사실 임신 중 육아휴직 법안은 당시 노예제도 폐지 법안만큼 첨예한 법안도 아니고, 그만큼 통과가 어렵지도 않은 무쟁점 법안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통과되기까지 어려움이 많고, 짧은 시간이지만 나와 아내도 낙심하고 절망하기도 했다. 윌버포스는 어떻게 그 시간을 견뎠을지를 생각해보면 아찔하다.
그러나 이번 일들을 겪으면서 깨달은 것은
만약 방향이 옳다면
포기하지 않고,
전략을 짜고,
계속하는 것,
그리고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같이 하면,
조금 느릴지라도,
결국 역사는 전진한다는 것이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었던,
20년 동안 계류하던 스토킹 처벌법이 드디어 국회를 통과했다.
https://www.sedaily.com/NewsView/22JYZLMYIR
아쉬운 부분이 있다고 하지만, 예전 벌금 10만 원에 비하면 그래도 놀라운 진전이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조금 더 정의로워지고,
나아지는 것 같다.
우리 '임신 중 육아휴직' 법안도 얼른 법사위를 통과하여 본회의까지 통과되길 기대한다.
그럼 다음 글까지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