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낫프로
그런 날 있잖아요. 오늘은 술이 술술술! 내일 프레젠테이션이 있지만 어쩐지 마셔도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있을 것 같고, 술은 마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든 잘할 것 같은 긍정 파워의 예감이 드는 날이요. 저한테도 그런 날이 있었죠. 다음 날은 프로젝트 시작 후 첫 보고일이었어요. 프로젝트 매니저는 아니라 제가 맡은 부분만 잘 설명하면 되는 발표였죠. 제가 이전부터 준비했었고 다 만들었으니까 제일 잘 알아 하는 느낌이 막 드는 내용이었어요.
그 시기에 회사 디자이너 둘이랑 저녁마다 어울려 다니며 술을 마셨어요. 불만과 짜증을 수다와 술로 이겨내며 일, 사람, 구남친 이야기 등 별별 주제를 이야기하면서 한남동과 약수역 일대를 시끄럽게 하고 다녔어요. 맥주 소주 와인 가리지 않고 엄청 마셨죠. 어느 날 아침은 눈떠보니 기억나지 않는 와인 한 병이 가방 속에 빼꼼히 있던 적도, 새벽에 먹은걸 모두 역류시키는 날도 있었어요. 내일이 없이 놀았죠.
과음하는 저녁이 있어도 다음날은 어찌어찌 일 했어요. 외부 미팅이나 보고가 없는 날들 아니면 금요일 밤에 놀아서 컨디션 조절을 했거든요. 하지만 그 날! 차가운 바람이 불었던 겨울날. 그 느낌을 딱 받은 거예요. 오늘이다! 오늘은 무조건 마셔야 한다! 기분이 아주 좋아서 1차, 2차, 3차가 이어지고 “나 근데 내일 보고 있어서 안 돼, 그만 마셔야 해.” 이야기하지만 손은 술잔에 가있고 꿀꺽꿀꺽 와인을 야무지게 마시고 진하게 이야기하고 신나게 놀면서 새벽 2시와 3시 사이에 해산을 했죠.
그 날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세 명의 발표자가 각각 기획한 콘셉트를 보고하는 날이었어요. 한 명이 발표해도 되지만 셋 다 비슷해 보일 수 있어서 발표자를 나눈 거죠. 2시 미팅이었는데 10시 30분에 사내에서 최종 시뮬레이션을 하고 발표 피드백을 해주기로 했어요. 발표 연습을 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했던 가닥이 있으니 어련히 잘할 거라고 생각하고 회의실에 들어갔어요. 하지만 몸은 아직 피곤하고, 비몽사몽에 속은 메슥거렸죠.
사람은 위기상황이면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잖아요? 저는 그 긍정 파워를 믿었어요. 제가 입을 떼기 전까지는… 아, 일을 하며 잊을 수 없는 여러 순간이 있지만 그 순간 회의실을 잊을 수 없어요. 회의실의 공기, 보고 장표 한 장 한 장, 우우웅 조용히 울리는 프로젝터 소리. 제 차례가 되어서 발표하려고 입을 뗐는데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는 거예요! 사고는 정지하고 어... 음…아…네… 죄송합니다… 이다음은… 을 반복했어요. 대표님은 ‘얘는 왜 이러지’ 표정으로 절 바라보셨어요.
발표가 끝나고, 회의실 불이 탁 켜지고, 모두 저를 바라보며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셨어요. 하지만 제가 술을 너무 마셔서 지금 괴로와요 흑, 하고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잖아요? 몸이 안 좋은 것 같다. 점심시간에 쉬면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죠. 쫄리고 무서웠어요. 당황스럽기도 하고 자초한 결과이니 변명의 여지도 없었고요. 그래도 이전에 발표했던 스타일을 아시니까 잘 넘어갔는데 회의실을 나오면서 너무 부끄 아니 쪽팔렸어요.
짜치는 일을 해도 쪽팔리게 일하지 말자는 나름의 신조가 있는데 내가 나를 쪽팔림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다니. 왜 사람은 경험해봐야 제대로 실감을 하는 걸까요? 이상한 긍정 파워는 어디서 나왔던 걸까요? 이렇게는 안 된다는 위기감이 막막막 흘러나왔죠. 어차피 속은 메슥거리니까 밥은 못 먹겠고, 점심은 피티 연습에 올인했어요. 그리고 그 상황에서 밥이 넘어가겠어요... 당장 내 평판이 흔들거릴 판이니. 이런 일로 민폐 팀원이 될 수 없었어요. 무엇보다 나한테 쪽팔리고 싶지 않았어요.
점심시간에 어느 정도 회복해서인지 불안했지만 미팅은 잘 마쳤답니다. 다만 이전보다 말이 조금 빨랐고, 목소리에 떨림이 있었지만 전하고 싶은 내용은 무사히 말했어요. 보고가 끝나고도 술이 다 깨지 않아서 힘들었지만 위기와 쫄림의 파도를 넘겨서 다행이었어요. 즐거운 이야기와 맛있는 술의 콜라보가 만들어내는 가끔의 과음을 참 좋아하지만 월화수목 중의 과음은 이제 하지도 권하지도 않아요. 일을 할 때 적당히는 싫고, 쪽팔리기도 싫고, 함께 하는 일인데 과음 같은 이유로 팀원들에게 피해주기는 싫잖아요. 과음은 다음날을 오릴 수 있을 때에만, 컨디션 조절은 알아서 잘. 지금은 주중의 한아름을 비판적으로 믿으며 적당한 음주생활을 하고 있답니다. 주체가 안 될 때는 주제 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