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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아재 Apr 03. 2022

힘 빼기의 기술 - 컵 드로잉


  자신의 그림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아 기운이 빠질 때, 아직 초보이지만 이것저것 색다른 시도를 해보고 싶으신 분들께 저는 컵 드로잉을 권해드립니다.     


  준비물은 간단합니다. 종이컵 두 개와 펜 한 자루입니다.

  어떤 종이컵이라도 좋지만,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자판기용 종이컵(185ml)은 너무 얇아서 펜으로 살짝만 눌러도 쉽게 찌그러집니다.

  저는 카페에서 많이 사용하는 12oz 종이컵 흰색과 크라프트(갈대)색을 주로 사용합니다. 한 개만으로도 충분히 단단하지만 두 개의 종이컵을 포개어 사용하면 펜으로 그릴 때 찌그러지는 일은 없습니다. 이 것이 제가 드리는 컵 드로잉의 유일한 팁입니다. 이 정도의 팁만 알고 계시면 컵 드로잉을 하실 수 있습니다.          

  종이컵은 방수를 위해 얇은 코팅이 되어 있어 매우 매끄럽습니다. 조금만 실수를 해도 선이 주욱 날아가버리고, 채색을 하면 색이 잘 올라오지도 않습니다. 여러모로 그림도구로는 적합하지 않죠.


  하지만, 여기서 컵 드로잉의 장점이 생깁니다.

  처음에는 실수를 할까 봐 숨을 참아가며 조심조심 선을 긋다 보면 짧은 시간에 몰입하게 됩니다. 저는 처음에는 단전에 힘이 꽉 들어간 채로 이마에 땀을 흘려가며 그렸습니다.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호흡이 일정해지고 힘을 빼고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팔에 힘 빼세요. 힘 빼는 게 중요합니다.”
아차! 선생님의 조언에 다시 잡념이 떠올랐다. 힘 빼는 것은 거의 모든 배움의 공통점인가 보다. 서예도 그렇고 수영도 그렇다. 심지어 골프도 그렇다. 처음에는 힘을 줄수록 힘찬 서체와 빠른 속도, 장거리 타법에 이르지만 결국은 힘을 얼마나 빼느냐가 관건이다. 어느 순간 더 나아지지 않을 때 몸에 힘이 빠지면서 그 한계를 넘어선다.
[무채색 아저씨, 행복의 도구를 찾다 / 이경주 / 아날로그 출판사]     

  어떤 운동이나 취미이든 간에 힘을 빼는 것은 공통사항입니다.

  그림 초보이건, 숙련자 건간에 각자의 경지에서 힘을 빼야 할 필요성을 느낄 때 컵 드로잉을 추천드리는 이유입니다. 힘을 빼지 않으면.... 복근이 생기거나 폐활량이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쿨럭.          

  두 번째, 컵 드로잉은 못 그려도 힘이 납니다.

  종이에 그린 그림이 마음에 안 들면 금세 우울해지고, 그 기분이 한참 지속되어 그림을 그리기가 싫어지고 한동안 손을 놓게 되는 일이 생기기도 하죠. 하지만 컵 드로잉은 종이에 그릴 때와 달리 못 그려도 다음에 그릴 그림을 기대하게 됩니다.

  어차피 종이보다 엉망인 그림이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시작하기에, 자신의 그림에 대한 기대 수준을 낮추고 가벼운 마음으로 그릴 수 있습니다.

  컵은 윗면과 아랫면의 길이도 달라 비율을 맞춰 그리기 어렵고 굴곡진 표면에 그리는 것도 어렵지만, 그림을 제대로 보는 것도 어렵습니다. 즉, 꼼꼼하게 감상하기도 힘듭니다. 인간의 뇌는 에너지 소모를 줄이려고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고 그럴싸한 방향으로 인식할 때가 있습니다. 컵 드로잉도 그럴싸하게 보게 된다는 것이죠. 이 사실을 기억하고 실수해도 끝까지 그려보세요.

  종이에 그리는 것보다 삐뚤빼뚤한 선으로 겨우겨우 그리게 되실 테지만, 끝까지 그리면 어떻게든 작품이 됩니다. 그리면서 생긴 작은 실수들이 그리는 사람의 눈에는 차곡차곡 쌓이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싸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중간에 포기하고 싶을 만큼의 실수를 참아내고 끝까지 그려야 성장한다는 사실을 꼭 붙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종이컵에 그리건 종이에 그리건 실수를 대하는 자세는 똑같다는 걸 상기하면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림의 전체와 부분을 번갈아가며 조망하는 관점을 훈련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지금도 풍경을 그릴 때는 사진과 종이에 똑같은 개수의 그리드(격자)를 표시해 놓고 전체 비율이 어긋나지 않도록 준비를 하고 그립니다.

  전체를 보면서 부분을 채워가는 방식이죠. 완성도는 높아지지만 그리는 속도도 더디고 비율을 맞추어 그리는 것도 연습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작가님들을 보면 이런 그리드 없이 전봇대나 기둥 등을 중심선으로 잡아놓고 선의 길이와 각도, 그리고 전체 비율을 맞춰가며 빠르게 그림을 그리십니다. 부분에서 전체로 확장하는 것이죠. 엄밀히 말하자면 수많은 연습을 통해 그림의 부분과 전체를 한꺼번에, 혹은 빠르게 번갈아가며 조망하는 관점을 훈련한 결과일 겁니다.

  컵 드로잉은 이렇게 부분과 전체를 신속하게 번갈아가며 조망하는 헬리콥터식 관점을 연습하기 좋습니다. A6 종이보다 작은 컵의 면적에 그리기 때문에 쉬워집니다. 작은 종이에 그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연습을 하게 됩니다.

  몇 번 연습하다 보면 3:4 정도의 비율로 컵의 한 면만 그리는 것을 넘어, 9:16의 와이드 화면 비율로 컵 전체에 파노라마처럼 그릴 수도 있습니다.

  파노라마로 그린 컵 드로잉을 손으로 뱅글뱅글 돌려가며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고, 잘 그려진 컵 드로잉을 태양열 자동 회전 진열대에 올려두고 감상하거나 선물하는 것도 즐겁습니다.


  태양열 자동회전 진열대는 국내 인터넷 쇼핑몰에서도 판매를 하지만 가격이 센 편이어서 알리익스프레스에서 여러 개를 한꺼번에 사두었다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휴일이면 아내와 함께 인근 지역의 카페로 드라이브를 하곤 합니다. 길어야 왕복 두 시간 거리에서 움직이지만 차 안에서 일주일 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행복합니다.

  평소에 가보고 싶은 카페나 명소는 네이버 지도의 [MY 플레이스]]에 지역별로 폴더를 만들어 담아둡니다. 다행히 제가 선정한 곳들을 아내도 좋아해 주기에 틈날 때마다 네이버와 인스타그램을 검색해가며 위시리스트를 정리해 둡니다.


  저희 부부도 카페에 가면 다른 분들과 똑같습니다. 음료와 디저트 사진을 찍고, 아내는 가방에서 책이나 다이어리, 저는 그림도구들을 꺼냅니다. 중간중간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서로 각자의 시간을 가지기도 합니다. 1시간 정도 카페에 머무르는 동안 펜 드로잉만 하기에도 빠듯합니다. 가끔 시간을 더 내어 수채화 도구를 꺼내기도 하지만 대부분 컵에 그림을 그립니다. 채색을 하지 않아도 펜 드로잉만으로도 종이컵이라는 소재는 독특한 작품이 되거든요.     

  컵 드로잉 후에 인증 사진과 동영상을 촬영하고 대부분 카페에 선물해 드리면서 예쁘게 진열해 달라고 말씀드립니다. 카페 인스타그램에까지 올려주시거나 맛있는 디저트를 챙겨주시는 고마운 분들도 계시구요.

  주변 분들께서는 아까우니 그냥 주지 말모아두었다가 전시를 해보라고 하시기도 하고, 드리는 제가 뻘쭘해지게 ‘왜 이런 걸’하는 표정을 들켜버리는 직원분이 가끔 계시기도 합니다. 컵 드로잉을 선물해 드리는 것을 그만두어야겠다고 한동안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요즘은 대부분 좋아하십니다. 제 컵 드로잉을 콘텐츠로 활용할 만큼 인스타그램을 잘 활용하시는 카페 위주로 찾아가기도 하고, 선물로 드릴 때도 될 수 있으면 경직되어 있는 직원분들보다는 여유 있는 사장님들께 선물해드리거든요, 컵 드로잉을 선물 받으실 때 기뻐하는 표정만으로도 저도 한껏 행복해지니까요. 지금은 현장에서 직접 그린 컵 드로잉은 그 자리에 있을 때 더 값지다고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고 기분 좋게 드리고 옵니다.

  제가 집으로 가지고 가면 책상 한편에 차곡차곡 포개 놓아지고 말 테지만, 카페에 놔두면 많은 손님들도 제 컵 드로잉을 봐주실 테고,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작년에 우연히 김제의 MBC 유튜브 채널 오느른 오피스에 놀러 갔다가 맛있는 커피 한 잔을 대접받은 후 그려 드린 컵 드로잉이 인연이 되어 오느른 쌀포대 작업을 하는 값진 경험도 했거든요. 그 이후로는 카페에서 그린 컵 드로잉은 바로 선물해드리고 있습니다.


  컵 드로잉을 건넬 때는 꼭 눈앞에서 천천히 돌려가며 보여드리고 건넵니다. 그래야 직원분들이 처음에는 의아해하며 저를 보다가 컵 드로잉을 제대로 보고 깜짝 놀라며 반겨주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쓰레기를 대신 버려달라고 하는 건 줄 알고 버리실 수도 있거든요. 작년에 처음 간 카페에서 컵 드로잉을 초등학생 딸을 시켜 직원 언니에게 드리고 오라고 했는데, 바쁜 직원분이 제대로 보지도 않고 컵 드로잉을 받아 종이컵 모아놓는 곳에 놓으시더라구요. ‘어쩔 수 없지 하는 마음으로’ 아내와 함께 돌아가는데, 제 컵 드로잉을 올린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본 사장님이 감사의 DM을 보내셨다가 제가 컵 드로잉을 드리고  걸 알고 바로 직원에게 연락해 고이 모셔놓았다는 연락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쪽이 살짝 젖은 컵 드로잉 사진을 보내시면서 연신 감사의 인사를 하셔서 극적으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다시 찾아갔을 때는 맛있는 빵들이 가득한 선반 앞,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제 컵 드로잉과 함께 양 쪽에 다른 컵 드로잉까지 귀엽게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흡족한 마음을 감추고 한참을 둘러보다가 모른 척 사장님께 물어봤습니다.

  ‘이건 누가 그리신 거예요?’

  ‘아 가운데는 꼬마 손님이 그려준 거구요. 양 옆은 저랑 직원이 따라 그려 본 거예요’     

제가 아니라 컵 드로잉을 건넨 딸의 작품인 줄 아셨지만, 그래도 그걸 보고 삐뚤빼뚤 귀여운 그림을 그리신 걸 보니 더 큰 감동을 느꼈습니다.


  인스타그램에서 #컵 드로잉 #PAPERCUDRAWING 등의 해시태그를 검색해 보시면, 일러스트레이터 신문섭 작가(@moonsub)님의 컵 드로잉 작품이나 스타벅스 컵에 사이렌을 입체적으로 변신시키는 김수민 작가(@fseo)님, 컵에 예쁜 그림에 캘리그래피까지 곁들이시는 변수빈 작가(@subin.byeon)님의 컵 드로잉 작품도 구경해 보세요.

  무엇보다 이 글을 읽은 당신도 오늘 한 번 시도해 보시길 바랍니다.

  해시태그 #컵 드로잉을 써서 인스타그램에 올려두시면 저도 구경하러 가겠습니다. (저는 #컵드로잉 해시태그를 팔로우하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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