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D 샐린저 장편소설
새책과 헌책을 맘대로 골라읽는 주말의 어린이, 청소년 도서 리뷰 No.5
배우 니콜라스 홀트가 JD샐린저로 변신한다.
니콜라스 홀크는 샐린저 평전을 스크린으로 옮긴 <호밀밭의 반항아>에서
작가 JD샐린저 역할을 맡았다.
JD샐린저는 영화 <파인딩 포레스트>의 모델이 된 작가로,
평생 은둔하면서 살았던 작가였다.
그는 생전에 <호밀밭의 파수꾼>이 영화화 되는 것을 원치 않았는데
그의 사후에 작가의 생애를 다룬 전기 영화가 제작된다는 기사를 보고,
<호밀밭의 파수꾼>을 오랜만에 떠올리게 되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출간되었던 1951년은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미소간의 냉전이 시작될 조짐이 보이던 시기였다. 이러한 세계 정세 속에서 미국 내에서는 40년 말경부터 50년대 초까지 이른 바 '매카시즘'이 활개를 치면서 대대적인 마녀 사냥이 벌어졌다.
한편, 이러한 사회, 문화적 배경 속에서 미국의 경제계는 전쟁으로 인한 경제 침체에서 벗어나 점차 산업의 부활로 경기 회복이 이루어지면서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미국의 전후 세대 작가들은 안정과 체면만을 내세우는 미국의 중산층의 생활 윤리와 그 방식에 반기를 들고 저항하고 나서게 되었는데, 그 선구자 역할을 한 작품이 바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학교라는 제도를 버리고 보수적 기성세대의 위선을 까발리는 홀든 콜필드의 거침없는 언행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어른들은 위선에 차고 겉치레가 심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중요시 할 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는 나이트 클럽에서 만난 해군장교와의 에피소드에서 잘 나타난다. 해군 장교는 만나서 조금도 반가울 것 없는 사람에게 “만나서 반갑다는” 말을 한다. 홀든은 “행운을 빌어”라든지 “만나서 반갑다”는 가식적인 인사를 싫어한다. 홀든이 보기에 어른들의 인사법은 심하게 가식적인 것이다.
이 어른들은 부모와 선생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른들은 이 사회 자체를 상징한다. 갇혀진 틀 속에 존재하는 삶 자체가, 이 소설에서 표현된 어른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어린이는 추구해야 할 순수함의 대상으로써 존재하며 어른과 대칭점을 이룬다. 이것은 세상의 대부분 사람에게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는 홀든이 유독 아이들에게만 호감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홀든의 죽은 동생인 엘리는 홀든에게 천재이자,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여동생인 피비도 영리하고 귀엽게 그려지고 있다.
홀든 콜필드는 어린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다. 십대인 홀든은 이 중간자적 입장에 서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홀든의 갈등이 시작되는 것이다. 홀든은 어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지 알고 있다. 체제에 순응하고 착한 사람으로써 제도권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 하지만 홀든에게는 이것을 막는 어린이적인 순수함이 남아 있다. ‘어른이 저런 모습이라면 나는 저런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는 것이 홀든 콜필드의 심리 내부에 있다. 작품 내에서 홀든은 종종 나이를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데, 이것은 불안한 홀든의 심리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홀든은 17세 되는 청소년이지만 작품 내에서 ‘거의 13세 되는 양’, 아니면 ‘거의 12세 되는 아이처럼’ 행동하는가 하면, 뉴욕의 나이트 클럽을 전전하고 다닐 때에는 연상자로 연령을 치켜올리는 양면성을 드러낸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호밀밭의 파수꾼’ 은 여러 가지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는 작품을 풍성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콜필드는 로버트 번즈의 시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를 만난다면>을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를 붙잡는다면>으로 혼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혼동이 아니다. 홀든의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원본에 있는 ‘만나면 (meet)이 수동적이고 우연적이라면 ’잡다(catch)‘는 표현은 적극적이고 필연적이다. 여기서 ‘잡’는 주체는 바로 홀든이다. 그리고 ‘잡히는’ 대상은 어린이이다. 홀든은 ‘파수꾼’으로서 어린이들을 세상으로부터 지켜주고 싶어한다. 하지만 홀든이 과연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홀든은 ‘파수꾼’이 되어 어린이들을 지켜주는 동시에 또 ‘파수꾼’으로부터 지킴을 받고 싶어한다. 보호하고 싶어하는 동시에 보호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홀든의 중간자적 성격과도 연관이 있다. 홀든은 파수꾼이자, 어린이이기 때문이다. 이 ‘파수꾼’ 인 동시에 ‘어린이’ 인 상징은, 의지가 되고 싶은 욕구와 의지하고 싶어 하는 욕구와도 맞물린다.
홀든이 자주 언급하는 소설이 바로 <위대한 개츠비>인데 이 소설 역시 과거를 복원하기 위해 애쓰는 닉 캐러웨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홀든이 순수한 어린 아이의 세계로 머무르려하는 애쓰는 것은 거의 강박관념에 가까울 정도이다. 홀든은 ‘성관계’(홀든은 이를 어른이 되는 마지막 관문으로 인식하는 듯 하다)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변태적인 성행위를 혐오하고, 피비의 학교에 쓰여 있는 외설적인 말(Fuck you)를 지우려고 애쓴다. 홀든은 모든 것이 그대로 있는 박물관을 좋아하며, 회전 목마를 탄 어린 동생 피비가 언제까지 그대로 머물러주기를 원한다.
홀든은 정말 제대로 된 반항을 하고 새로운 가치를 부르짖은 것일까? 집으로 돌아가서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되는 홀든을 보면서 이런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말하자면 홀든은 허가된 반항을 한 것이 아닌가? 레슬리 피들러는 ‘소년’은 ‘허가되는 착한’ 소년이 되기 전에 ‘일시적으로 나쁠 수’ 있다고 말했다.
착한 반항아들의 역할은 ‘반항’을 통해 어린이로 상징되는 과거와 어른으로 상징되는 미래를 연결하는 것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잃어버린 세대와 비트 세대의 연결점 역할을 하였다. 잃어버린 세대는 1차 세계대전 후, 세계에 대한 환멸을 느껴 염세적 향락주의에 빠졌던 젊은 이들과 예술가 그룹을 지칭하는 말이고 비트 세대는 정치와 사회 문제에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고 마약, 섹스, 재즈 등에 탐닉했던 개인화 경향이 강했던 1950-60년대의 세대를 일컫는 말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이들 세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혹시 이것이 이니세이션(과도기의 소년이 주인공인 성장소설) 소설이 가진 한계는 아닐까? 대부분 성장 소설에서 주인공이 겪었던 정신적 방황은 그저 어른으로 변화되는 개인의 성장기 과정일 뿐이며 이것이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일종의 선구자적 역할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홀든 콜필드의 불확실한 태도는 결국 그가 젊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젊다는 것은 세상을 명확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불투명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와 그의 수업은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그는 밤낮 통일을 이루고 간결하게 말하라고 떠들죠. 하지만 어떤 것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도 있어요. 어떤 것은 누가 어떻게 하라고 해서 쉽사리 간결하고 통일성을 띠게 할 수는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