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타니 겐지로 장편소설
새책과 헌책을 맘대로 골라읽는 주말의 어린이, 청소년 도서 리뷰 No.6
하이타니 겐지로의 ‘모래밭 아이들’을 읽고 난 후 문득 오래된 편지 한 통이 생각났다.
호시노 도시오는 교문 앞에서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준다.
그는 ‘짧은 스포츠 머리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짧은 스포츠 머리를 강제하는 데 반대하고 있다’고
자신의 의견을 적었다.
"공부의 방법이나 공부할 장소에 대해서 학생들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고등학생 때 어느 선생님한테 보냈던 메일 중 일부였는데,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 그때 선생님한테 보냈던 메일의 전문을 다시 읽어보니
논리도 많이 부족하고 선생님을 상대로 다소 치기 어린 주장을 한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야 말로
내가 선입견을 지닌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부모님 또는 선배, 상사와 규칙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의 의견에 찬성하지 않고 반박하면 종종 ‘말대꾸’를 한다고 오인 받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의 화술이나 어법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진정한 토론과 비판의 문화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소위 ‘말대꾸’라 불리는 비판적인 의견이 수용되지 않는 일이 잦아지면서 나는 점점 침묵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침묵을 당연시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강제적으로 정해진 규칙에 대해 반기를 드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마땅히 내가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가 침해당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에도 분노를 느끼기 보다는 참고 견디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친구들 중에는 부당한 일에
침묵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이들이 있다.
모두가 왜 힘든 싸움을 하느냐고 말릴 때
그 친구들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되긴 싫다고 말했다.
그리고 올해가 가기 전에,
부당함에 맞서 당당히 자신의 목소리를 낸 친구는 승전보를 전해왔다.
책을 읽다보니 구즈하라 준과 호시노 도시오가 대화 중 이런 부분이 눈에 들어 왔다.
인간에게 분노는 중요한 감정이고, 분노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부정에 맞서 싸우려는 정의감은 분노에서 비롯된다.
당시 나는 정의를 위해서 저 메일을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3 수험생은 무조건 지시를 따르라는 선생님의 말에 분노가 솟구쳤다.
호시노 도시오가 학생에게 머리를 기를 자유와 권리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했다면,
나는 선생님의 지시에 의해서가 아닌
내 스스로 공부 방법을 택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다는 것을
선생님께 알리고 싶었다.
결국 나의 주장은 받아들여졌지만,
당시 나는 교무실을 나오면서 이것이 과연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문제인가? 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 같다.
호시노 도시오와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머리를 기를 자유가 본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나는 단지 개인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선생님을 찾아가 지시에 따를 수 없다는 의사를 밝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나’에 한해서였다.
나는 친구들에게 나의 생각을 알리지도 않았고, 알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호시노 도시오를 보고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구즈하라 준은 자신들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서 많은 것들을 배운다고 하였다. 구즈하라 준은 학생들의 재치와 용기, 지혜에 탄복했다. 정말 아이들의 가능성을 믿고, 아이들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일까.
올해 서울의 광장은 학생들이 밝힌 촛불이 환히 타올랐다. 촛불을 밝히는 것이 학생들 뿐만은 아니지만, 학생들은 누구의 지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다.
그들은 니시 분페이의 말처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인터넷과 휴대폰을 통해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그들은 다양한 목소리를 낸다. 그들의 연대방식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나는 아이들이 바라는 세상이, 우리 모두가 진심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이라 생각한다. 모래밭의 아이들을 촛불 하나 든 아이들이란 말로 바꿔본다. 촛불을 든 아이들은 모래밭을 뒹구는 아이들처럼 분노할 줄 알고, 즐거워 할 줄 안다.
문득, 나도 촛불 하나를 다시 밝히고 싶어졌다. 이미 오래전에 꺼졌다고 생각했던, 그러나 아직은 불씨가 남아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