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야기술사 Apr 17. 2023

청춘의 문장들

개정판 2022년 7월 20일 발간/ 마음산책

다시, 새롭게 읽는 김연수의 작품 No.3


초판 책머리 中에서 p. 27     

 내가 사랑한 시절들, 내가 사랑한 사람들, 

내 안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진 것들, 지금 내게서 빠져 있는 것들……. 

이 책에 나는 그 일들을 적어놓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일을 다 쓰지는 못하겠다. 

 내가 차마 쓰지 못한 일들은 당신이 짐작하기를. 

 나 역시 책을 읽으며 짐작했으니까. 

  이제는 경정산만이 남은 이백에게 마주 보아도 서로가 싫지 않았던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음을, 그리워라고 말하는사람에게는 

  지금 누군가 빠져 있음을 짐작했으니까.

당신도, 나도, 심장이 뛰고 피가 흐르는, 사람이니까.     


운전석에 앉아있으면, 가끔 아버지가 떠오른다. 

아버지가 내게 직접 운전을 가르쳐주신 적은 딱 한 번이다. 


그 딱 한 번의 기억 속에서 나는 아버지의 옅은 한숨과 걱정, 기대를 본다. 

김연수 작가의 단편소설 제목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처럼 

그때의 아버지는, 언젠가는 아버지의 조언 없이도 내가 홀로 운전할 수 있으리라는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그려보았을까?     


김연수 작가의 작품들은 소설이나 에세이할 것 없이 나의 단편적인 기억들을 환기시킨다. 

  


<내리내리 아래로만 흐르는 물인가, 사랑은>     


p39. 딸아이 열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자전거 앞에서

 아이용 의자를 설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갓 태어난 아이는 내 생각보다 훨씬 작았다. 

자전거 앞에 그 아이를 태우고 함께 논둑길을 달리려면 적어도 5,6년은 지나야 할 것 같았다.  

    

p45. 그늘을 돌아 나오다 열무가 조용하다 싶어 얼굴을 바라봤더니 

자전거 앞자리에 앉은 채 졸고 있었다.

 얼른 방향을 바꿔 돌아서니 이미 잠에 빠져들었다. 

그 불편한 자전거 앞자리에서 어찌 이리 곤히 잠들 수 있을까? 

내려서 안고 가려고 해도 너무 멀리까지 왔기 때문에 빨리 집으로 돌아가 재우고 싶었다. 

한 손으로는 핸들을, 한 손으로는 아이를 붙잡고 자전거를 탄 채 논둑길을 내달렸다.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열무와 나를 바라봤다. 

탐스러운 초록색으로 물든 들판이 좌우로 펼쳐졌다. 

그리고 내 머릿속으로는 어릴 적 일들이 떠올랐다.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신 아버지는 저녁이면 자전거를 타고 

퇴근한 직장 동료나 친구들 집에 놀러 가곤 했다. 그 자전거 앞자리에는 내가 앉아 있었다.     


p.46 아이가 생기면 제일 먼저 자전거 앞자리에 태우고 싶었다. 

어렸을 때, 내 얼굴에 부딪히던 그 바람과 불빛과 거리의 냄새를 아이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다.      


내게도 언젠가 아이가 생기면, 아버지처럼 인적이 드문 넓은 공터에서 운전을 가르쳐줘야지. 

유턴을 하는 법을,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밟는 법을 가르쳐줘야지, 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대신 그날, 공터에서 나를 다시 조수석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가던 아버지와 반대로 앉아야지.

조만간 꼭 그렇게 해야지,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김연수 작가가 아버지의 자전거에 올라앉아 집으로 돌아가는 여름날을 떠올리게 하는, 

그 짙은 녹음의 문장 속에서 나는 아주 오래전, 아버지의 운전석 옆에 앉아 

집으로 돌아가던 초여름 저녁의 길을,

막 어둑어둑 해지려던 그 길을 물들이던 빨간 헤드라이트 불빛을 떠올린다.     


 <청춘의 문장> 초판을 봤을 때는 딱히 기억에 남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흘러 20여 년 만에 개정판이 나오고, 

이 책을 다시 읽었을 때는 오래도록 이 부분이 기억에 남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난주의 바다 앞에서 (결말 포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