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기형도를 오독하다」 #3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by 임재훈 NOWer


얘기 많이 들었어요. 대학원 쉬시면서 일 년간 사보 기자 하셨다고요. 기업 블로그도 사보랑 별 차이 없어요. 씨엠씨그룹 블로그 쭉 훑어보시면 금방 감잡으실 거예요. 얘네가 사업 가짓수도 많고, 특히 임직원 단합대회나 사회공헌 활동 같은 행사들을 엄청 자주 해요. 직원 수가 오백 명 좀 안 되는 중견기업인데, 뭐랄까, 대기업처럼 보여지고 싶어 하는 느낌?

그래서 행사 후기 위주로 원고를 요청드릴 거고요. 사진 촬영도 같이요. 그리고 죄송한 말씀인데, 계약서 첫 장에 적힌 액수 보시고 좀 실망하셨죠. 온라인 쪽 필진 고료가 원래 좀 낮은 편이거든요. 그래도 저희 회사는 취재비도 드리니까. 여기, 일층 카페도 언제든 무료 이용 가능하시고요.

저랑 김 대리가 작년까지 씨엠씨만 삼 년 내리 했거든요. 지겨워 죽겠는데 이달부로 계약이 일 년 더 연장됐어요. 우성그룹 신규 계약까지 동시에 따는 바람에 손이 모자라요. 이천십사년이 말띠 해라 그런가? 연초부터 달릴 일들만 잔뜩이에요.

선배는 대꾸 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말을 마친 황 과장은 김을 흘끗거렸다. 선배가 도착하기 전에도 황 과장은 김의 눈치를 살폈다. 문학 하시는 분인데 고료가 이래서 어떡하냐고, 둘 사이 괜찮겠냐고. 시를 쓰기는 하는데 아직 등단은 못했다고, 석사 마치려면 부지런히 등록금 벌어둬야 한다고, 사보 일 끊긴 지 여러 달이라 우리 계약을 안 할 이유가 없다고, 제가 다 설명했다고, 김은 안심시켰다. 선배가 계약서에 서명한 뒤에야 황 과장의 시선은 안정화됐다.

그러고는 잡담이 시작됐다. 문예창작 전공 일반대학원 휴학생인 선배와 국문학과 졸업생인 황 과장 사이에는, 등단이라는 공통의 화제가 형성됐다.


저는 자소서 쓰듯이 시를 써요.

저는 회사원을 연기해요. 업무는 연출하고요. 극작가 준비하다 취업한 거라서.


선배와 황 과장의 이력 모두 또 듣는 것이어서, 김은 잠자코 대화를 내버려뒀다. 자유기고 일 하면서도 시는 계속 쓰고 있다고, 야근만 아니면 퇴근 후에 희곡 아카데미 다니고 싶다고, 둘은 서로의 건필 의지도 주고받았다.

김은 이 광경이 불안했다. 선배가 시로 등단한다면, 황 과장이 극작가로 데뷔한다면, 둘의 현재 본업은 언제든 생활 전선에서 철수될 수 있다는 투로 들렸다. 유일한 수입원인 자유기고 일감마저 내치고 시만 쓰는 선배와, 황 과장 아닌 다른 과장을 상상하자 김은 겁났다. 선배와 황 과장이 각자를 위한 글이 아닌 사보나 기업 블로그 원고를 변함없이 써주기를, 계속 대행을 해주기를, 자신의 일상에 돌발 이슈가 생성되지 않기를, 김은 둘의 얘기를 들으며 내심 바랐다.

김 대리한테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요즘 짜증 대마왕이거든요. 임신 티 내는 것 같아서 늘 미안하고 그래요. 오주차 넘어가고 입덧 시작되니까 더 예민해지더라고. 올해 딱 마흔 됐는데요 제가. 초산 걱정도 크고, 야근도 웬만하면 피하려고 하는데, 일복이 팔자라. 나중에 자식복으로 보상받아야죠. 이 친구랑은 아직 뭐 계획 없어요?

황 과장의 화제 전환이 하도 급작스러워, 김은 멋쩍게 선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배는 줄곧 황 과장만 보며 생글거렸다. 저희가 일단 자리를 잡아야죠. 저부터도 내년에 복학해서 얼른 석사 따고, 등단도 하고, 쓰고 싶은 글 쓰면서, 한 계단 한 계단 저희 자리로 올라가야죠.

저희, 라는 선배의 주어를 김은 곱게 흘려듣지 못했다. 평소 투덜거림대로, 내 목소리도 아닌 잡글을 하도 써대서 이젠 내 시도 내 시로 안 보일 지경이라는 계약직 자유기고가 생활에 대한 자조를, 이 여자는 또 남자친구에게까지 적용하려 한다고 김은 넌더리를 냈다.

입사 축하를 해줄 때도 선배는 인칭대명사 ‘우리’를 앞세우고 뒤세웠다. 우리는 다르게 살아보자, 남이 하라는 일만 하는 삶 말고, 훌륭한 작가들처럼 자기 목소리도 내고 자리도 잡아가면서 삶의 주인이 돼보자 우리, 진짜 우리는······.

같이 잡자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자기 목소리를 절제하며 직무에 충실한 직장인들은 삶의 노예라는 뜻인지, 다르게 살기의 비교 대상을 회사원들로 상정하고 있다는 소리인지, 장기근속이 목표인 자신은 선배의 ‘우리’ 안에 속할 삶도 삶의 주인도 될 수 없는 것인지, 김은 난해한 축사를 못내 노여워 했다.

저녁 일곱 시가 조금 넘어 외주 필자 계약 미팅은 끝났다. 오늘은 일찍 퇴근하라고, 나도 남편 생일 챙겨줘야 해서 곧 나갈 거라고, 열 시 전 퇴근이 얼마 만이냐고, 황 과장은 김을 보내주었다. 선배 앞에서 이른 퇴근을 연출한 사수에게 김은 박수를 쳤다.

김은 선배를 데리고 자신의 새집으로 갔다. 대리 진급과 함께 연봉이 조금 올라, 입사 후 삼 년간 머문 셰어하우스를 탈출해 옮긴 복층 원룸텔이었다. 연식이 오래된 데다 창문이 없다는 점 덕에 월세가 쌌다.

퇴근 후에도 거주 공간 공유자들끼리 눈치를 봐야 함이 김은 피로했었고, 그래서 새로 나온 대리 명함이 고마웠다. 김 대리 혹은 김 대리님이라는 새 호칭이, 김을 대리하는 사람, 자기 자신을 대행하는 사람으로도 들려서, 대행사 직원임을 이제 숨길 수 없겠다고,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새집으로 이사하며 김은 입사 사 년차의 새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가구라고는 기본 옵션으로 딸린 두 단짜리 미니 책장, 의자 두 개가 세트인 사각형 원목 식탁이 전부였다. 이사 선물로 황 과장이 준 전기포트와 머그잔이 식탁 위에 있었고, 선배는 의자에 앉아 머그잔을 만지작거렸다.

그거 예쁘지 않아? 남편 분이랑 도자기 공예 체험 가셨다가 내 것도 만들어 오신 거래.

직장 상사하고도 꽤 친밀한가 봐? 아까 보니까 그 과장님, 사람 참 괜찮아 보이더라.

김은 미팅 말미에 튀어나온 ‘저희’를 물고 늘어지려는 제 입을 단속했다. 오는 길에 선배가 진급 선물을 줄 거라 말했었고, 그 성의를 보아 그날 저녁은 다투지 않는 쪽으로 처신했다.

물성이 단순하고 확실하며 실용적이기까지 한 선물을 은근 기대한 탓으로, 그 시집이 앞에 놓였을 때 김은 실망했다. 복잡하고 불확실한 시어들의 지면, 선배가 아니면 결코 스스로 열어보지 않을 무용성. 이것이 그 시집에 대한 솔직한 속내였다.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제목 또한, 진급 선물 콘텐츠로서는 부적절한 타이틀로 보였다. 선배의 의중을 헤아리느라, 김은 대학 시절 기억들까지 더듬어야 했다.


이천팔학년도 이학년 일학기 현대시의 이해. 전역 후 어거지로 수강한 전공 필수 과목들 중 하나였다. 언젠가 김은 강의실 맨 뒷열에서 졸다가 호명됐다. 그날은 『입 속의 검은 잎』을 비롯해 교수가 지목한 몇 권의 팔십년대 출간 시집을 가져와야 했다. 앞 수업을 결석한 김의 가방 안에는 출판사가 각기 다른 토익 문제집들뿐이었다. 교수는 시 낭독을 시켰다.

김의 뒷자리에서 슬며시 그 시집이 떠올랐다. 학생들에게 시 읽힐 때 으레 그러듯, 교수의 눈은 감긴 채였다. 삼십일 쪽! 김은 시집과 귀엣소리를 다급히 넘겨받았다. 뒤에서 앞으로 넘어올 때 시집은, 주인의 화이트머스크 향을 묻힌 채였다. 교수의 감은 눈을 전방 주시하며 시집을 열 때, 김은 앞뒤가 다 두근거렸다.


金은 블라인드를 내린다, 무엇인가

생각해야 한다, 나는 침묵이 두렵다

침묵은 그러나 얼마나 믿음직한 수표인가

내 나이를 지나간 사람들이 내게 그걸 가르쳤다

김은 주저앉는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한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


읽기를 다 마쳤을 때, 눈뜬 교수는 칠판 중앙에 金을 크게 썼다.

뭔가 좀, 건물처럼 생겼죠? 시적 배경이 사무실이라 그랬을까? 굳이 이 김이란 글자만 한자예요. 삼십이 쪽 보면, “즐거운가, 과장을 즐긴다는 것은 얼마나 지루한가”라고 있죠? 이 과장은 한자로 썼을 법도 한데 한글이잖아요. 과장 직이 지루하다? 본래 자신보다 과장되게 처신하는 직장 생활이 갑갑하다? 둘 다일지도 모르죠. 김 군 목소리는 군대 다녀온 복학생답지가 않네. 삼십삼 쪽 마지막 두 행만 한 번 더 읽어봐요. 큰소리로.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김은 얼굴이 이그러진다


김 군 출석률도 엉망인 거 알죠? 무너진 성적표 들고 얼굴 이그러지지 않으려면 절대 결석하지 말도록. 학생들이 웃었고 김은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새내기 오리엔테이션 때 한 번 본 기억이 있는 맞학번 해인 선배였다.

그날 시 수업 후, 김과 선배는 복도에서 십여 분쯤 얘기를 나눴다. 일학년 마치고 다음해 초에 입대했다고, 올초 전역해 곧장 복학했다고, 전공 필수 과목들 중에서는 이론 수업들만 수강했다고, 아무래도 창작 쪽은 부담스럽다고, 확정은 아닌데 전과 생각도 있다고, 김은 자기소개를 했다.

선배는, 나도 일학년만 다니고 삼 년 내리 휴학했다고, 등록금 버는 게 군생활보다 힘들 거라고, 이름대로 바다처럼 어질게 살기가 어렵다고, 그래도 과 행사는 다 참석했다고, 너네 공오학번 오티도 손수 챙겼다고, 창작 수업 안 들으면 내 시 읽을 일은 없겠다고, 등단 전까지는 문인 선배나 교수님들 말고는 가급적 아무한테도 안 보여주고 싶다고, 가족이나 애인한테도 절대, 그래서 창작 수업 때 하는 합평이 괴롭다고, 괜히 보여줬다가 시답잖은 비평 듣고 사기 꺾이면 생산성도 창의성도 동시에 하락한다고, 내 동기들 중에도 전과한 애들 서넛 된다고, 인생 선배 같은 말투로 길게 얘기했다. 애인 분도 혹시 시 쓰시냐고 김은 물었고, 아직 없는데 나중에 생겨도 내 시는 진짜 안 보여줄 거라는 대답을 얻어냈다.

선배는 늘 그 시집을 들고 나타났다. 제일 좋아하는 시인이라고, 출간된 시집이 딱 한 권뿐이라고, 그래서 똑같은 시집만 열댓 권 소장하고 있다고, 신간 사 모으듯 수집했다고, 이십오 쪽 시 제목처럼 「오래된 書籍」이자 오래된 신간이라고, 많이 자랑했다.

시가 어려운 김을 대신해, 선배는 그 시집의 애독 시 일곱 편만을 골라 여러 번 읽어주고 해설해주었다. 「오후 4시의 희망」을 포함해 「안개」, 「白夜」, 「鳥致院」, 「어느 푸른 저녁」, 「가수는 입을 다무네」, 「입 속의 검은 잎」이었다. 한자능력검정시험을 준비 중이던 김은, 선배가 십칠 쪽 「白夜」와 다음장 「鳥致院」을 연이어 펼칠 때 우쭐기를 부렸다. 백야, 조치원. 반응은 시뻤다.

도무지 시가 난감한 김을 배려해, 선배는 일곱 시들의 전문이 아닌 시구 일부만을 짚어 설명해줬다.

팝 음악 들을 때 그런 적 없어? 전체 가사를 몰라도 알아듣는 소절 나오면 따라 부르게 되잖아. 그러다 흥얼거리고, 입에 붙고 귀에 익고. 시 전문은 못 알아들어도 나 따라서 시구 몇 개만 반복해서 읽어봐. 그러면 시 자체도 익숙해질 거야.

현대시의 이해 기말고사가 끝난 날, 김은 문예창작학과에서 광고홍보학과로의 전과 결심을 털어놓았다. 선배는 학교 후문 뒷골목의 손두부집으로 앞장섰다.

글쓰기는 좋은데 시, 소설, 희곡 같은 이른바 문학은 적성에 안 맞는다, 학내에 도는 취업률 최하위 과, 이 년 내 통폐합 예정 같은 소문들도 신경쓰인다, 우리 집에는 빚도 있다, 취업이 급하다, ······. 김의 주절거림과 뜨겁고 큰 두부 한 모와 막걸리 앞에서, 선배는 또 그 시집을 꺼냈다.

아무리 전과자라도 이 시인은 잊지 말고 계속 읽어. 만날 구내서점만 가지 말고 광화문도 가고 좀 그래. 너 수업 때 들고 온 시집들도 전부 대출한 거지? 최소한 이 시집 한 권 정도는 너가 직접 사서 소장해. 이 시집은 정말이지, 우리를 위한 시들이야.

선배는 그때도 ‘우리’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 우리가 자신과 선배를 아우른 개념인지, 더 큰 대상을 지시하는 것인지, 김은 취해서 알아듣지 못했다.


회상이 멎은 뒤에도 『입 속의 검은 잎』의 의중은 어름되지 않았다. 김은 포기하고 선배의 말들을 기다렸다. 역시나, 진급 선물의 본의에 관한 긴 해제가 시작됐다.

나는 시집 선물은 아무나한테 안 해. 시집은 레코드판 같은 거야. 소리골처럼 활자들 안에도 시인의 음성의 파형이 기록돼 있거든. 그게 시어들이야.

레코드판 들으려면 턴테이블이 필요하잖아, 시집을 읽고 들으려면 시어들의 강약에 따라 움직이고 진동할 스타일러스가 있어야 해. 바늘 말야, 바늘.

나는 그게 자기만의 목소리라고 생각하거든. 자기 목소리 없는 무딘 사람들한테는,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너무 날 선 것처럼 보이겠지. 낭중지추라는 말도 있잖아. 목소리 뾰족한 사람이 시도 잘 읽어. 자기 목소리를 가진 타인의 소리골에 접촉할 수 있으니까.

난 너한테서 그런 뾰족함이 보이거든. 솔직히 육 년 넘게 사귀면서도 긴가민가했었어. 그런데 지금은 딱 보이네. 너만의 뾰족함.

이 말들이 김은 자신을 향한 대사가 아니라, 선배의 방백처럼 들렸다. 그래서 듣는 둥 마는 둥했다.

촤라락― 짠― 어때?

구부러진 시집의 낱장들이 바람을 일으키다 멈췄다. 지면과 지면의 열린 경계에 손바닥 크기만 한 김의 얼굴이 꽂혀 있었다. 김은 정성 들인 낙서 같은 제 캐리커쳐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이 그림, 앞으로 김 군 인생의 표지로 쓰도록. 그리고 늘 소지하도록.

선배가 노교수의 말투를 흉내 냈고, 김은 네, 하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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