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곽미성 Sep 15. 2016

생굴과 볼로네즈 스파게티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식사 

«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라는 영화가 있다. 프랑스어 원제는 "La Vie d'Adèle" , "아델의 삶" 이다. 2013년 깐느 영화제가 최초로 작품이 아닌 두 명의 주연배우와 감독에게 황금종려상을 수여해 화제가 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레즈비언 커플의 현실적인 사랑 이야기와 과감한 정사 장면으로 유명해진 영화다. 내게도 같은 이유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엠마 와 아델 (레아 세이두, 아델 에그자르코풀로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영화를 생각하면 볼로네즈 스파게티와 생굴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의 영화들이 대부분 강렬하고 인상적인 식사 장면을 보여주지만, 이 영화에서는 특히 커다란 상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영화는 주인공 여고생 아델이 파란색 머리를 한 아티스트 엠마를 만나 사랑을 하고, 동성애자로 « 살아가는 »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의 앞부분은 아델의 내밀한 욕망이 친구들, 부모님과 같은 외부 세계와 충돌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그녀의 첫사랑은 엠마를 만나면서 시작되지만 두 사람은 같은 고민을 공유할 수 없다. 몇 살이 더 많은 엠마는 이미 몇 해 전에 그 과정을 끝낸 후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엠마가 사는 세계와 아델이 사는 세계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서로 다른 세계를, 그 차이를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은 두 가정의 식사 장면을 통해 비교한다. 


아델이 일상적으로 사는 세계는 매일 같이 볼로네즈 스파게티를 먹는 세계다. 

토마토와 마늘, 셀러리 등과 분쇄한 소고기를 넣고 오랫동안 졸여 만드는 볼로네즈 소스는 커다란 냄비에 다량을 만들어놓고 몇 끼를 먹을 수 있는 저렴하면서도 간단한 서민 음식이다. 

아델의 가족들은 거의 매번의 식사 장면에서 볼로네즈 스파게티를 먹고 있다. 어떤 장면에서는 다 함께 모여 별다른 대화 없이 게걸스럽다 할 정도로 흡입하듯 먹기도 하고, 때로는 대화 없는 식사를 하다가 입을 벌리고 텔레비전에 정신을 놓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들에게 있어 식사의 목적은 허기를 채우기 위한 것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반면, 엠마의 세계에서 식사는 의미가 좀 달라 보인다. 아델이 처음 엠마의 집을 방문했을 때, 엠마의 부모님은 화이트 와인과 생굴을 먹으며 딸의 여자 친구를 맞이했다. 딸의 사랑을 축하하며 건배를 하고, 와인의 향에 대해 서로의 취향을 물었다. 식탁 위에서도 이들은 생굴의 식감과 먹는 방식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눈다. 이들에게 식사는 대화의 즐거운 매개체가 되는 듯 보인다. 

영화 속 볼로네즈 스파게티의 세계는 위의 만족을 위한 세계이고, 질보다는 양의 세계이며, 생계를 위한 노동이 축복받는 세계이고, 무엇보다 동성애는 감히 꺼내놓을 화제가 되지 못하는 세계이다. 반면 영화 속 생굴의 세계는 내장의 부름 따위는 하찮게 여겨지는 세계이고, 예술과 철학이 중요한 화제가 되는 세계이며, 생계보다는 개인의 적성과 행복을 이야기하는 세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티스트이면서 동성애자인 구성원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는 세계이다.  


연인이 된 아델과 엠마가 서로의 집을 방문해 저녁식사를 하는 장면은 상반된 분위기로 나란히 배치되어 두 사람의 « 다른 세계 »를 비교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영화는 계속적으로 엠마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식성과 집요한 식탐을 아델의 세계에서 직접적으로 보여주며 두 사람 간의 계층적 차이를 드러내려고 한다. 예를 들어, 아델은 과자와 초콜릿 같은 군것질 거리들을 늘 곁에 두고 있으며 심지어 한밤중에 자다가도 군것질을 한다. 엠마와 가까워지기 시작한 후 서로를 탐색하는 대화에서도 먹는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서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이야기할 때, 생굴을 이야기하는 엠마에게 아델은 소시지와 생 햄은 온종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좋아하지만, 해산물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특히 생굴은 그 식감 자체부터 싫다고 말한다. 



이런 장면들의 의도에 대한 사색은 뒤로하고, 우선 아주 현실적이고 단순한 의심을 해 본다. 과연 볼로녜즈와 생굴은 사회적 계층을 대표할 수 있을 만큼 프랑스 사회에서도 상징적인가? 해산물을 선호하면 더 세련되고 고급스럽고, 육류를 좋아하면 단순하고 서민적이라는 구분이 실제 프랑스 사회에서 존재하는 걸까? 그간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프랑스 남부에서 온 친구들은 샐러드와 과일, 올리브 오일, 생선등을 즐겼고, 북부에서 온 친구들은 고기 요리와 버터, 빵류를 일상적으로 즐겼다는 지역적 특성이 있긴 했다. 하지만 « 식성 »에 있어서 계층적인 특징은 크게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도 일종의 한 « 계층 »에 속해 있을 테니 만나는 사람들이 다들 비슷한 부류여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지금과 같은 대형 유통의 시대에도 그런 차이가 존재할까 하는 의심도 든다. 지방의 시골 마을 사람들도 도시와 같은 대형 유통 라인에서 장을 보는 시대인데, 우리는 계층을 떠나 개인적 취향에 따라 소비하고 있지 않을까? 생굴과 볼로네즈 스파게티를 모두 다 일상적으로 먹고사는 나로서는 왠지 영화 속 도식적인 구분이 억지스럽게 여겨졌었다. 


2013년 프랑스 농림부에서는 « 식재료에 따른 계층 간 다양성 [1]»이라는 자료를 발표했는데 이 질문에 대해 객관적이고 흥미로운 결과를 보여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짐작과는 달리, 사회적 계층에 따른 식성의 차이는 여전히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생선의 경우, 실제 그 계층에 따라 소비량이 여전히 많이 달랐다. 최저 소득층의 경우 지난 15일 동안 한주에 최소 2번의 생선을 소비했다고 대답한 사람은 39%에 지나지 않았으나, 소득 수준이 그 두 배인 집단에서는 52%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답했다. 또한 전통적으로 가난한 자들의 음식이었던 감자는 여전히 그들에 의해 과소비되고 있었다. 하지만 계층별 식생활이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렸던 고흐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고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조사는 계층별 식성이 존재는 하지만 그것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는 흥미로운 결론을 내려 주었다. 10년 전 가난한 자들의 음식이었던 것이 10년 후에는 중산층의 선호음식이 되기도 하고, 이전에는 부자들의 음식이었던 것이 지금은 가난한 자들의 음식이 되어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취향이라고 하기엔 구매력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식생활이 아니냐는 의문도 든다. 본래는 캐비어와 샴페인을 사랑하지만 너무 비싸다 보니 어쩌다 한 번만 먹는 것을 두고 그 사람의 식성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캐비어와 같은 고가의 음식은 그렇다 해도, 과일, 채소와 특히 생선의 경우엔 사람들이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가격의 수준과 실제 가격의 수준은 많은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생선이나 과일은 너무 비싸서 « 못 먹는다 »고 생각하지만, 실제 그 가격들은 생각만큼 비싸지 않아서 결국엔 « 안 먹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영화 속 아델도 익숙하지 않고 낯선 것에서 느끼는 무의식적인 거부감 때문에 생굴을 싫어한다고, 그게 본인의 취향이라고 정리했을 수도 있다. 아니, 최소한 감독이 의도한 바는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니 애초의 의문, 영화 속 볼로네즈와 생굴의 구별 짓기도 많은 부분 현실적인 도식이었던 셈이다.




영화 속에서 아델은 결국 엠마의 세계에 섞이지 못하고 튕겨나간다. 이 연인이 헤어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에 계층적 차이는 직접 이야기되지 않지만, 내내 잘 섞이지 않는 두 사람의 세계, 화려하고 빛나지만 위선적이기도 한 엠마의 세계와 소박하고 생활 친화적이지만 솔직한 아델의 세계는 계층에서 비롯된 차이로 볼 수밖에 없다. 영화 속에서 감독이 궁극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지점이 두 사람의 사랑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


생굴을 먹고 샴페인을 마시는 일이 누구에게나 허락되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일인 것처럼, 너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동성이든 이성이든 마음 가는 대로 사랑하며 살지 그러니, 하며 천연덕스럽게 미소 짓고 있는 어느 사회의 얼굴을 감독은 그려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누구나 알고 있는 냉혹하고 야만적인 논리는 모른 척 감추고 미소 짓고 있는 그 얄미운 얼굴을 감독은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화려한 파티 속에서 물 위의 기름 한 방울처럼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있던 아델에게 유일하게 말을 걸고 친구가 되어주었던 한 아랍인 청년은 이렇게 말했다. 영화계에서 나 같은 아랍인 배우에게 원하는 것은 수염을 기르고 "테러리스트"를 연기할 아랍인일 뿐이라고. 그 역에 충실하게, 보다 선정적으로 "신은 위대하다"까지 외쳐주면 다들 매우 만족스러워한다고. 그리 비중 없이 지나가는 인물인 듯 하지만, 이 청년은 아델이 영화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된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우연히 아델과 재회한 그는 부동산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한다. 더 이상 영화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며 살고 싶지 않다고, 위선적으로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영화계가 아닌 다른 곳에서 하는 게 낫다고 말한다. 그 대화를 끝으로 아델은 밖으로 나와 걷는다. 그녀가 그렇게 홀로 걸어가며 멀어지는 모습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감독은 성적 취향은 같지만 입맛은 너무 다른 젊은 연인의 이야기를 통해, 그 다른 입맛이 상징하는 씁쓸하고 비릿한 현실을 내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1] Les différenc »es sociales en matière d’alimentation / centre d’études etde prospective n°64-Octobre 2013/ Ministère de l’agriculture del’lagroalimentaire et de la forêt

매거진의 이전글 가난한 연인의 우아한 식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