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안 반스와 남편 이야기
(흔치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요리를 너무 좋아해서 가정에서 매일매일의 요리를 본인이 담당한다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가끔 듣는다. 영국 작가 줄리안 반스도 그중 하나였음을, 그가 낸 요리에 대한 에세이를 읽고서 알게 됐다. 수 십여 년을 일상적으로 요리하면서 겪은 다양한 일들과 단상들을 담은 책인데,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나온 것을 최근 읽게 됐다.
그중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그의 나이 서른이 갓 넘었던 20여 년 전, 손님을 초대해 저녁식사를 준비하면서 있었던 일이다. 그는 요리책에 나온 프랑스 비쉬 지방 스타일의 당근 요리인, “비쉬 당근”을 만들어 보기로 했는데, 책 속의 설명이 1, 2번 다음에 4번으로 건너뛴 것을 발견했다. 이미 당근을 다 자르고 다음 순서로 넘어가야 했던 그는 이 3번 부분이 사라진 것에 당황해서 아내를 불렀다. 그러나 아내도 별 수 없이 당황했고, 그 요리책의 저자에게 직접 물어보라며 전화기를 건넸다고 한다. 저자에게는 귀찮은 일이 아닐까 고민하다가 용기를 낸 줄리안 반스는 전화기 건너 저자에게 해당 부분을 읽어주며 질문을 했다. 그러나 정작 저자는 “제가 보기엔 문제가 없는데요” 하더라는 것이다. 아니, 3번이 빠졌는데 인쇄가 잘못된 건지, 편집에서 누락된 것인지 확인해 달라고, 그 내용을 알고 싶다며 다시 질문을 했고, 요리책의 저자는 다시 한번 레시피를 읽어보라고 하더니, “제가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했다고 한다. 이런 과정으로 반스는 요리를 잘 한다고 해서 반드시 요리를 잘 가르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물론, 유명 셰프라고 해서 그의 요리책이 늘 훌륭한 것은 아님을, 설레는 마음으로 신간 요리책에 돈 좀 써봤던 우리 애호가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요리법에 순서가 하나 빠졌다고 저자에게 전화까지 하고, 집요하게 같은 질문을 몇 번씩이나 하는 독자도 범상치 않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 나의 생각을 앞서가며, 반스는 요리하는 스타일에 있어 스스로가 “강박적”임을 인정한다. 요리를 하는 사람은 강박적인 사람과 강박적이지 않은 사람, 두 부류로 나뉜다며, 본인은 레시피의 한 자 한 자를 꼼꼼히 살피고, 있는 그대로를 따르는 부류라는 것이다.
“강박의 요리사” 가 왜 “직관의 요리사” 보다 더 나은 지를 한참 설명하던 그는, 글의 마지막에 본인의 취향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비쉬 당근” 레시피의 한 부분을 인용했다.
비쉬 지방의 물에 데친 당근과 탄산이 약간 섞인 수돗물에 데친 당근, 그냥 일반 수돗물에 데친 당근 사이에 차이가 있을지 의심합니다.
그러면서 덧붙여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문장이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이 글을 읽고 혼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르겠다. 예기치 못했던 작가의 재치와 유머감각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당근 데칠 물의 차이까지 고민하는 열정과 “강박성”은 내게도 너무나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요리에 대한 열의만큼은 줄리안 반스 못지않을, 이미 몇 년 전부터 주방을 혼자서 차지하고 접수해버린 남편 얘기다.
남편은 기본적으로 줄리언 반스가 구분한 두 종류의 요리사 중 “강박”에 속할 수밖에 없는 습성을 구비한 사람이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정보를 찾고 집요하게 파고들어 실체를 파악해야 만족을 하는 면이 있기 때문인데, 이에 대해서도 친구들 사이에서 내내 회자가 되는 일이 있었다. 연애 초기, 한국에 놀러 온 남편과 친구 몇 명이 함께 제주도에 놀러 갔었을 때다. 여름밤, 콘도 베란다의 식탁에 모여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벌 한 마리가 날아와 우리 주변을 빙빙 돌았다. 제주도의 야외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남편의 동요가 느껴졌다. 그냥 가만히 있어주길 내심 바랬지만, “저 벌 무슨 벌이야? 저런 종류는 처음 보는데...” 귓속말로 묻기 시작했다. “글세... 잘 모르겠는데... 신경 쓰지 마” 그의 궁금증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대화에 끌어들이며 화제를 돌렸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일행 중 누구도 그 벌의 종류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고 심지어 관심도 없는 듯 보이자, 그는 조용히 실내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20분쯤 지났을까, 베란다 문을 벌컥 열더니 다급한 표정으로, 하지만 조곤조곤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실 컴퓨터에서 검색으로 찾아낸 (그렇다, 스마트 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 벌의 이름과 종, 성격과 습성에 대해. 친구들에게 통역을 해주라면서. 난데없이 자연 백과사전에 나올법한 설명을 듣던 친구들은 물었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그는 말했다.
“위험하니까 들어와서 마시자고...”
이런 사람이 요리를 하는데, 요리책이 중요하지 않을 리 없다. 레시피 앞에서의 자세가 어찌나 꼼꼼하고 집요한지, 거의 연구자 수준이다. 요리는 맛도 중요하지만 속도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와 달리, 그는 레시피가 시키는 대로, 시간이 들더라도(아니, 시간 가는 줄을 모르는 것 같다) 하나하나 정확하게 요리한다. 그러니 예전에 한국 요리 레시피에 자주 등장하던 “적당량을 넣는다” 와 같은 표현 앞에서는 머리를 쥐어뜯기 일쑤였고, 또 요즘처럼 전 세계 나름의 요리 고수들이 각자의 블로그를 통해 레시피를 공개하는, 그러다 보니 별별 요리법이 다 난무하는 시대에는 그 “진짜”를 찾는데 또 엄청난 공을 들인다.
얼마 전의 일이다.
우리 부부에게는 일요일 밤마다 다음 주 금요일 저녁에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월요병을 극복하는 지혜가 있다. 집에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라자냐는 어떨까 하며 생각이 모아졌다. 라자냐는 사실 누구에게나 인기 있을만한 대중적인 맛이지만, 개인적으로 그 안에 들어가는 묵직한 크림소스인 베샤멜을 좋아하지 않아서 매번 꺼리게 된다. 나는 “베샤멜을 넣지 않는다” 는 조건을 걸고 라자냐도 좋다고 했다. 남편은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라자냐에 베샤멜을 안 넣을 수가 있지?"물었고, 나는 최근에 갔던 이탈리아 식당들에서도 베샤멜을 넣지 않은 라자냐를 먹었다면서 당연히 가능함을 주장했다.
그 한 주 동안, 라자냐 속 베샤멜의 유무에 대한 논쟁은 매일 밤 계속됐다.
월요일엔 남편이 여러 가지 레시피를 찾아본 결과 베샤멜을 넣지 않으면 라자냐의 모양이 유지될 수 없다고 주장했고, 내가 베샤멜을 넣지 않는 최근의 경향을 검색해 알려주자, 화요일 밤 남편은 베샤멜을 넣지 않은 라자냐 레시피를 찾을 수 있었으나, 예상컨대 너무 건조해서 맛이 있을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나는 물론, 먹어봤는데 그리 건조하지 않았다며 다른 레시피를 찾아보자고 했다. 수요일에 남편은, 한 이탈리아 파워 블로거의 글을 찾았는데, 그 사람도 평생을 베샤멜을 넣지 않은 라자냐만을 먹다가 남들은 베샤멜을 넣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하더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남편은 급기야 고등학교 때 배운 이탈리아어를 바탕으로 현지 블로거를 뒤진 것이다. 목요일엔 라자냐의 기원과 역사, 최초 태생 지역에 대해 ”연구“한 내용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베샤멜을 넣은 라자냐와 넣지 않은 라자냐 중 어떤 레시피가 정통 일지, 무엇이 나을 지의 고민을 토로했고, 그쯤 되니, 나는 더 이상 라자냐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아졌다. 베샤멜을 넣든 말든, 뭐든 아무려면 어떠냐, 먹기만 하면 되겠다는 상태로, “그럼 반쪽만 넣는 건 어때”하는, 한국식 해결책, “반반”을 제안했다.
이윽고 금요일 밤, 이미 한 주 내내 라자냐를 수 십 번은 먹은 것 같은 기분으로 식탁에 앉아 있다가 불현듯 생각이 났을 땐, 이미 접시를 반쯤 비우고 난 상황이었다.
남편은 그제야 기세 등등하게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정한 정통 레시피를 찾았지. 이탈리아에는 자국 요리를 연구하는 요리 아카데미아라는 기관이 있었어! 변형되고 사라지는 레시피들을 보호하는 정부 기관이지. 대단하지 않아? 프랑스에도 그런 곳이 있어야 할 텐데. 아무튼 그 연구소 사이트에 들어가서 찾아봤어. 정통 라자냐는 베샤멜을 넣어야 한데. 다만, 정확한 양을 넣으면 이렇게 담백한 맛이 나지. 전혀 무겁지 않지?”
라자냐 한번 먹는데 이 정도의 신중함이라니, 줄리안 반스가 들으면 “이것이 바로 내가 좋아하는 태도다” 할 일이 아닐까. 이 글을 쓰다가 반응이 궁금해 남편에게 줄리안 반스의 일화를 이야기해주었다. 평소 작품에서 보여주던 분위기와는 딴판이지 않냐면서, 낄낄 웃으면서 말이다. 남편은 내내 시큰둥하게 듣더니 말했다.
“요리책 저자 연락처를 알고 있었나 보네? 부럽군... 연락처만 알아도 나도 전화해서 물어보고 싶은 레시피가 많았는데...” 아니, 이건 나에게만 웃긴 얘기였나, 연락처만 안다면 전화하고 싶은 레시피 저자 하나쯤은 다들 가지고 있는 건가, 생각해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 덧붙이자면, 남편의 이런 꼼꼼함은 철저히 본인의 관심분야에서만 발휘된다. 남편 혼자 멀리 떠날 일이 있어 아침에 현관에서 배웅을 했는데, 5분 후쯤 다시 돌아와서 무슨 일인가 보니, 정작 여행 가방은 안 들고 자기 몸만 나갔던 일, 혹은 같이 여행을 가면서 카메라를 남편이 챙겼는데 도착해서 보니 카메라 가방만 있고 카메라는 없던 일이 부지기수다. 요리를 제외한 일상에서 필요한 꼼꼼함은 불행히도 나만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