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와 문 열고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밤새 이름 모를 새와 동물이 울어댔다. 아침이면 커다란 새가 창문 밖에 와서 푸드덕거렸다. 아들은 자다가 깜짝 놀라 움찔움찔했다. 산 밑 허름한 집에 10개월 된 아들과 임신 6개월째인 연약한 나뿐이었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은 춘천을 지나 산길을 계속해서 달렸다. 차창으로 38선 팻말이 보였다. 산으로, 산으로 달리던 차는 내리막길을 내려가더니 시골 읍내를 지났다. 강원도 화천이다. 그리고 20분을 평화의 댐 쪽으로 더 달리더니 아주 낡은 집 앞에 멈췄다. 산 밑에는 5층짜리 작은 아파트와 몇 채의 집이 있었다. 최전방에 근무하는 군인들이 모여 사는 군인 아파트였다. 그중에 가장 후미지고 허름해 보이는 집이 우리 집이라고 했다. 새로운 벽지와 장판을 바꿔달라고 부탁했더니 집 내부는 깨끗이 단장되어 있었다. 간간이 보이는 벽지의 주름진 부분에서 서투른 손길의 흔적이 보였고, 시골집의 분위기가 풍겨 났다.
남편은 이삿짐을 이방, 저 방에 내려놓고 다음날 전방 GOP로 들어갔다. 풀다 만 이삿짐 박스는 남편이 10일 후에 외박 나올 때까지 정리되지 못한 채 썰렁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10월인데도 벌써 겨울 날씨였고 연탄불은 수시로 꺼졌다. TV는 KBS1 한 채널만 나왔는데, 바람 불고 비가 오는 날에는 화면 상태가 고르지 못해 소리만 들어야 했다. 반찬은 김치와 달걀뿐이었다. 아들은 달걀에 비벼서 먹이고 나는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먹었다. 다행히 남편 동기 한 가족이 살고 있어서 전방 생활을 처음 하는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거의 매일매일 어떻게 지내는지 관심을 가져주었다.
화천으로 이사하기 1달 전까지 직장에 다녔었다. 친정엄마가 아들을 돌봐주시느라 엄마 몸무게는 10kg이나 빠졌고, 나도 늘 바쁘고 힘들었다. 피곤이 겹쳐 벽만 쳐다보고 1달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좋은 직장이었지만 과감히 내 던지고 지친 몸으로 들어간 화천은 산골 마을이라 휴가를 보내고 있는 기분이었다. 밤에 무서웠고, 집은 춥고 열악해도 그곳의 생활이 그냥 편하고 좋았다. 생각해보니 학교와 직장 다니고 결혼한 후 오래간만에 맞는 여유였다. 아들을 돌보며 뜨개질을 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산 중의 겨울은 빨리 찾아왔다. 눈이 오면 30cm 이상이 쌓였고 며칠 동안 밖을 나가지 못했다. 어느 눈 쌓인 날 아들이 과자를 먹고 싶어 해서 아들을 등에 업고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서 가게에 다녀온 기억이 난다. 남편이 외박 나오는 날 눈이 많이 오면 차를 타지 못하고 3-4시간씩 산에서 걸어 내려와 집에 왔다. 남편이 오는 날은 집이 꽉 찼고 썰렁하던 집은 훈훈해졌다.
봄이 되고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이 연년생 어서 둘 다 우유병 빨고, 둘 다 기저귀를 사용했다. 이웃들은 산으로 나물을 뜯으러 다녔지만 나는 그림의 떡이었다. 혼자 애기 두 명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 힘들었지만 누가 도와줄 사람도 없고 내 아들이니까 이겨 내야 했다.
두 아들을 집에서 돌보는 일은 애기 데리고 밖에 나가는 일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였다. 5일 장 서는 날, 버스로 30분 거리에 있는 화천에 가는 일은 거의 전쟁을 치르는 수준이었다. 동기 가족도 아들이 한 명 있으니 우리 아들 둘과 함께 아기 세 명을 데리고 시장에 갔다. 접이식 유모차를 가져가서 우리 둘째 아들을 태우고 물건을 사서 유모차에 손잡이에 걸었다. 손잡이가 무거워져 유모차가 뒤로 넘어가 아들이 뒤로 벌렁 넘어지는 일도 있었다. 집으로 오는 길은 시장에서 산 물건도 있으니 더 험난했다. 버스에서 내릴 때는 산 물건을 차 밖 길바닥으로 먼저 던지고 애기 두 명과 유모차를 가지고 내렸다. 버스에서 내려 애기를 태운 유모차에 물건을 걸고 두 돌도 안 된 큰아들을 걷게 해서 비포장 길을 걸어 집에 오면 몸은 완전 녹초가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뭔 시장을 가느냐 하겠지만 그토록 힘들게 다녀오는 일이 나에게는 그나마 유일한 외출이었다.
나에게 시장가는 일보다 더 힘든 일이 또 한 가지 있었다. 관사의 수돗물은 지하수를 끌어올린 상태이고 물이 충분하지 않아 24시간 나오는 게 아니었다. 순번을 정해 아침 일찍 시간 맞춰 물 밸브를 열어주고 점심때쯤 잠가 줘야 했다. 산 중턱에 있는 수돗물 밸브까지 하루에 두 번 가는 일은 남들에게는 쉬운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무척 힘든 일이었다. 애기 두 명을 두고 방문도 나갈 수 없는 나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구든 예외는 없었다. 처음에는 나의 순서가 되는 일주일 동안 친정 엄마가 오셨었다. 매번 엄마가 오실 상황은 안 되었고 난 그 일을 위해 아기를 업고 산을 올랐고 큰 아들은 산 밑에서 울고 서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그 일 절대 못한다.’고 나가떨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난 화천에서 그렇게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