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아침마다 어부들에게 생선을 얻으러 갔다. 가오리, 생태, 철갑상어, 털게 등 갓 잡은 싱싱한 생선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터어키 남부 지중해변 별장에 1달 동안 머물면서 주로 한 일이 생선 다듬기였다. 남편은 2년 동안 공부하느라 힘들었던 스트레스를 생선 얻는 일에 다 푸는 모양이었다.
지중해 해변에서의 휴양
터어키에서 석사 논문을 마치자 교수님은 동양인 제자에게 자신의 여름 별장 열쇠를 주었다. 한국 귀국 전에 머물고 싶은 만큼 가서 있다가 오라 하셨다. 남편이 2년간 공부하며 교수님을 잘 모시고 다녔고, 정이 들어서였다. 우리 가족은 귀국 준비를 어느 정도 마치고 별장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게 되었다. 별장은 터어키 남부 ‘다짜’라는 곳인데 지중해 마르마리스(Marmaris)에서 멀미 나는 길을 2시간 정도 더 내려가 만나는 곳이다. 예쁜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에 우리도 예쁜 집을 차지하고 1달을 보내게 되어 지중해의 부자가 된 듯 행복했다.
멋진 2층 집인데 여름에만 쓰는 집이라 온 집안에 먼지가 수북했다. 2일 정도 꼬박 청소하고 지친 몸을 바다에 담갔다. 4,5살인 두 아들과 바쁘지만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아니 여름 별장이니 감미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어느 날 아침 남편은 바닷가로 산책 다녀오면서 싱싱한 생선을 가져왔다. 터키 인들이 먹지 않는 가오리 및 철갑상어와 그물에 걸려 팔 수 없는 생태를 어부들에게 얻어 왔다고 했다. 기분 좋게 생선을 다듬어서 맛있게 요리해 먹었다.
“아직 생선이 많은데 뭘 또 얻어와요?”
“그냥 주는데 받아와야지. 싱싱하잖아. 한국에서 이런 생선 먹기 쉬운 줄 알아?”
“더 이상 냉장고에 넣을 곳이 없어요. 고추장이나 간장도 없고요. 여긴 시골이라 아시아 음식 파는 곳도 없고. 휴양지에 와서 생선 다듬고 밥해먹느라 해변 갈 시간도 없잖아요.”
생선 얻는데 재미를 붙인 남편은 아침마다 어부들에게 다녀왔다. 매일 오전 껍질 벗겨 다듬고, 회쳐서 먹고, 튀겨먹느라 매일 바쁘고 바빴다. 부엌과 냉장고가 생선으로 넘쳐날 지경인데도 남편은 생선을 계속 얻어왔다. 요리 도구나 양념이 있다면 근사한 요리나 해 먹지만 소꿉장난처럼 끼니를 때워 가는 판에 매일 얻어오는 생선은 고역이었다. 명색이 여름 별장에서 휴가 중인데 매일 생선과 시름할 수 없는 노릇, 하루 한 번씩은 애들과 숙제하듯 바닷가에 다녀왔다. 한 달을 어찌나 바쁘게 보냈는지 다짜~ 하면 여유 있는 휴가가 아니라 생선만 생각난다.
앙카라의 생활
1991년 터어키로 석사과정을 간다고 하니 터키가 어디 있는 나라냐고 친구들이 물었다. 요즘은 터어키가 많은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 나라지만 그 당시는 터어키라는 나라를 잘 알지 못했다. 여름에 터어키 앙카라에 도착하니 별천지와도 같았다. 출국 준비하느라 10개월을 시댁에서 지내다 가니 자유로웠고 대 저택은 궁궐 같았다. 매일 화창한 날씨가 계속되고 과일은 싸고 굉장히 맛있었다. 초급장교 시절이라 경제적인 여유가 없지만, 신경 쓸 것 없고 풍요로운 생활은 ‘이게 바로 천국이구나’ 싶었다.
터어키에서 지내는 일이 천국에서 현실 세계로 바뀌는 데는 오래가지 않았다.
20여 년 된 벤츠 차를 싼값에 샀다. 탱크처럼 튼튼하고 묵직한 차였다. 차는 편리함을 가져다주기도 했지만 나를 힘들고 신경 쓰이게 했다. 남편이 그곳에서 초보운전을 시작한 거라 늘 걱정이 되었고, 오래된 차라 고장이 잘 났다. 특히 디젤 차여서 겨울에는 시동이 잘 걸리지 않아 보통 애먹는 게 아니었다. 차를 세워 놓았다가 아침에 시동이 안 걸리면 경사진 길로 내려가다 브레이크를 밟아서 시동을 걸었다. 시동이 안 걸려 차를 굴려 타고 가는 남편을 배웅하고 나면 하루 종일 맘 조려야 했다. ‘시동은 잘 걸고 갔나, 사고는 나지 않았나’하고 올 때까지 궁금했다. 지금은 휴대폰이 있으니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닌데 말이다.
논문지도 교수님은 국립 앙카라 대학교에서 권위 있는 교수님이셨다. 어찌나 깐깐하던지 수업받고 논문 쓰면서 남편은 굉장히 힘들어했다. 국내 터어키어과에서 위탁교육을 받았으나 현지에서 어학과정 없이 2년 만에 석사과정을 마쳐야 되는 상황이라 매일매일 바쁜 나날이 계속되었다. 남편이 바쁜 만큼 내조하랴, 연년생 어린 3,4살 아들 들 챙기랴 나는 나대로 지쳤다. 나 혼자만의 여유시간은 바늘구멍만큼도 없었다. 그때의 스트레스로 그 후 15년 동안은 편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거친 여행
터어키에서 학생으로 사는 일은 꽤 매력적이었다. 터어키라서 여행할 곳이 많았고 학생이라서 여행 떠날 기회가 많았다. 1년간 논문을 쓰면서 교수님이 학술회를 가시면 특별한 준비 없이 무조건 떠났다. 그때 한국에서 배낭여행이 한참 붐이 일기 시작한 때였고, 여행 책으로 ‘세계를 간다’ 터키 편을 준비해 간 게 큰 역할을 했다.
터어키의 최초 여행은 앙카라(Ankara)를 출발해 이즈미르(Izmir)에서 에페스(Efes)와 마리아 하우스(Maria house)를 보고, 트로이 유적지가 있는 차나칼레(Çanakkale), 이스탄불(Istanbul)과 옛날 수도 브르사(Bursa)를 들러 오는 것이었다. 특히 돌마바흐체 궁전, 소피아 사원과 보스포러스 다리는 정말 멋있었다. 지금이야 많은 여행으로 나의 머릿속이 세계화가 되어 있지만 그때의 이스탄불(Istanbul)의 모습은 내가 본 최초의 이국적인 모습으로 각인되어있다.
갑바도기아(Cappadocia)에서 지하도시를 걷고, 안탈리아(Antalya)에서 바라본 지중해는 내가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동이었다. 해변의 모래가 얼마나 밀가루처럼 고와서 애들과 함께 맨발로 비비고 뒹굴며 놀았다. 콘야(Konya)로 가는 길은 똑바로 뻗은 평평한 길이 어찌나 긴 지 120킬로의 엄청난 속도로 달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무식해서 용감했지 그 낡은 차로 펑크라도 났으면 큰일 날 뻔했다. 콘야(Konya)에서 본 메블라나(Mevlana) 춤은 신기하고도 아름다웠다.
그동안은 순조로운 여행을 한 셈이었다. 지금은 터어키가 IS 때문에 좀 위험하지만 그 당시는 쿠르트 족 때문에 좀 혼란스러웠다. 쿠르드 족이 있는 동부 여행은 꺼렸다. 위험하다고 안 갈 우리 가족이 아니고 탱크차를 몰고 어디든 다녔다. 닥터 피쉬가 있는 캉갈과 높은 산 위에 석상이 있는 렘루트 산에 갔다. 동부이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으로 갔는데 정작 위험한 것은 우리 낡은 차였다. 동부와 북부로의 여행은 차 때문에 위험한 순간을 여러 번 만났다. 렘루트 산에 올라가는 길에 비가 왔는데 길은 온통 진흙탕이었고 차가 미끄러져 박혀 옴짝 달싹도 하지 않아 근처에서 작업 중인 포클레인을 불러와 끌어냈던 적도 있다.
렘루트 산을 내려와 다시 겁 없이 남쪽으로 달렸다. 안타크야(Antakya)에서 안디옥 교회 등 종교 유적지를 보고 아다나(Adana)로 가는 길은 꼬불꼬불 내리막 산길이었다. 비 맞으며 산길을 내려가는데 브레이크가 안 잡혔다. 브레이크가 망가진 것이다. 속도를 내지 않아서 다행이지 내리막길에서 속도를 냈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차를 고치는데 2-3일 걸릴 겁니다. 부품도 없어요.”
“그렇게 오래 걸려요? 그 긴 기간 동안 어쩌죠?”
“괜찮으시다면 차 고칠 동안 저희 집에서 묵어도 좋습니다.”
“정말인가요? 감사합니다.”
터키 인들은 한국인에게 호의적이고 순진하고 착했다. 택시 운전수에게 길을 물으니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반대쪽인데도 리드해하며 알려주기도 했다.
터키의 바이람(Bairam) 기간에 시바스(Sivas)에 사는 남편 친구가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터키 가정집 방문인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터키의 바이람은 우리나라 명절처럼 모든 가족들이 모이고 희생양으로 소나 양을 잡아 받친다. 그 집은 양 대신 소를 잡았다. 집 현관 바로 앞에서 소를 잡으면서 나오는 피를 문지방 앞 땅속으로 전부 스며들게 했다. 소 한 마리의 고기는 온 가족과 친척들이 나누어 가졌다. 집에서 피대와 바클라바(Baklava)도 만들었다. 같이 하며 배우며 함께 하는 것으로 모두가 즐거워했다. 온 가족들이 우리 가족을 특별대우해주었다.
친구 집에서 바이람을 즐겁게 보내고 북쪽 흑해로 가기로 결정했다. 시바스(Sivas)에서 흑해 삼슨(Samsun)까지 150km가 안 되는 거리라 부담 없이 출발했다. 아무리 산을 넘어도 3-4시간이면 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 무거운 탱크 차는 산 길을 오르고 또 올랐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고 산길이 계속되었다. 드디어 150km 정도의 거리를 8시간 만에 도착했다.
문제는 평지에 다 내려가서 발생했다. 차가 길에서 조용히 섰다. 뒤돌아보니 우리가 지나온 길에는 오일이 줄줄 새어 나와 길바닥에 오일 줄을 긋고 있었다.
점검해 보니 산길을 넘어오느라 차가 쿵쾅거리며 바닥에 계속 닿아 통에 구멍이 생겨 오일이 다 새어 나와 버린 것이다. 산 중에서 차가 멈췄으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터키 여행 시에 본 끝없이 이어지는 구릉과 초원에서 노니는 양 떼들의 모습은 25년이 지난 지금에도 잊히지 않는다. 길 위를 달리는 차는 우리 탱크차 외에는 앞도 뒤도 보이는 차가 없어서 운전 초보 남편이 달리기에는 딱 좋았다.
외국에 다니면서 느끼는 한국은 1991년과 최근을 비교해 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요즘은 세계 속의 한국의 위치가 무척 커졌다. 그 당시에 터키인 들은 동양인을 보면 한국은 잘 모르고 무조건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냐고 물었다. 한국을 좀 아는 어른들은 그들이 한국전에 참여했고 형제의 나라라고 좋아했다. 그들은 터키어를 말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바가지 씌우지 않고 무척 잘해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2002년 월드컵 이 후로 터키와 한국은 더 친해졌다. 7년 전에 다시 이스탄불에 갔을 때 터키인들이 전보다 덜 순진하게 느껴져 아쉬웠다. 터키에서 2년 동안 공부하는 남편 내조하고 연년생 아들 키우느라 힘들었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터키 여행을 최대한 많이 한 게 나에게는 큰 소득이다. 직접 찾아다니며 거칠게 여행하고 다닌 것이 나이 들어 여행작가에 도전하고 글을 쓰는 데 큰 터전에 되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