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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인데 자퇴하고 우리 함께 가자

고3이 자퇴하고 해외 미국 학교로 가는 도전기

by 여행작가 히랑

고3인데 자퇴하고 우리 함께 가자


“아들! 우리 아빠 따라 함께 가자. 가방 싸서 빨리 와.”

“정말이요? 그래도 돼요?”

“그럼, 정말이지. 일단 지금 바로 와. 와서 얘기하자.”

그해 들어 가장 춥다는 1월 어느 날 방학인데도 학교에서 야간 자율 학습하고 있는 고3이 되는 아들에게 전화했다. 큰 아들은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 겨울 찬바람을 몰고 의아한 얼굴로 집에 왔다. 큰 아들 얼굴에는 전에는 보지 못한 밝은 기운이 감돌았다.

두 아들이 고1, 고2가 끝나갈 무렵 남편의 3년 예정인 해외근무가 결정되었다. 남편이 국방무관이 되기를 희망하고 그 방향으로 매진해 오던 일이라 우리 가족에게는 굉장히 기쁜 일이었다. 문제는 해외로 데리고 나가기에는 꽤 늦은 고등학생 두 아들이었다.

“아빠, 축하드려요. 전 고3인데 한국에서 대학교 가야 되잖아요. 대학교 입학하고 놀러 갈게요.”

“그래, 열심히 해서 1학기 수시 합격하고 여름방학에 엄마랑 같이 와.”

아빠의 격려를 받은 큰 아들은 웃음기 없는 지친 얼굴로 공부하러 제 방으로 들어갔다.

남편의 출국이 4월로 잡혔다. 고1을 마치는 둘째 아들은 아빠와 함께 가고, 큰아들과 나는 일단 한국에 남아 대학교를 보낸 후 가기로 했다. 해외 국방무관은 배우자의 역할도 중요해서 나도 같이 가야 되는데 어쩔 수 없다며 남편은 아쉬움을 표현했다. 출국을 준비하면서 가족이 두 곳으로 나뉘어야 하니 굉장히 혼란스럽고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다.

큰 아들은 어떻게 해서든 1학기 수시로 좋은 대학교를 가서 엄마를 빨리 아빠에게 가시도록 하겠다고 공부에 더 매진했다. 그 당시 1학기 수시를 시행하는 학교가 별로 없었는데, K 대학교가 수리논술로 1학기 수시를 뽑았다. 수리논술!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논술을 준비해오긴 했지만 몇 달 동안 수리논술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막막했다. 수소문 끝에 수리논술을 잘 가르친다는 강남 어느 학원을 찾아가 보았다. 집에서 1시간 반이 걸리는 곳이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가서, 아들이 테스트를 하고 난 후 학원 관계자와 면담을 했다.

“우리 아들 테스트해보니 어떤가요? 지금부터 수리논술 준비하면 K대 갈 수준이 될까요?”

“어머니, 아드님이 그동안 논술 쓰기를 많이 해온 것 같습니다. 열심히 하면 가능할 것 같지만 알아두셔야 할 게 있어요. 1학기 수시이기 때문에 전국의 공부 좀 한다 하는 학생들은 모두 지원합니다. 그래서 K대학교 합격은 로또 맞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로또요?”

난 로또라는 말에 아들의 손을 잡고 학원을 급히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철 창밖으로 본 세상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대학교를 잘 가려면 중3 겨울방학과 고2 겨울방학을 가장 알차게 보내야 한다고 했다. 중3 겨울 방학이 되니 공부에 대한 부담감이 밀려왔다. 수학, 논술, 과학 등 할 공부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다행히 영어는 중학생 기간에 집중해서 실력을 쌓아 놔서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방학 동안 시간 계획표를 잘 짜서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하자마자 바로 시작되는 평가(모의고사, 중간·기말고사, 수행평가)들이 숨 막히게 했다. 내신, 수능과 논술의 압박은 모든 분야에서 잘하는 만능의 아이들이 되기를 요구했다. 요즘의 고교시절은 뭔가를 배우는 시기가 아니라 그동안 공부한 것들을 테스트하는 기간인 듯했다. 인생의 꽃봉오리를 향해 가고 미래의 꿈을 찾고 만들어가는 중요한 때인데 부모 세대인 우리 고등학교 때와 너무 달랐다. 그들의 미래는 어찌 됐든 최대한 좋은 대학을 가고 보자는 대입 양성소에서 발버둥 쳐 적응해야 하는 생활이었다. 그 역할을 다하기에 버거운 고등학교 아이들의 머리는, 바늘을 대면 금방 터질 것 같은 팽팽하게 부푼 풍선 같았다.

큰아들은 중3 겨울방학 때까지 키가 쑥쑥 크더니 고1에 입학한 3월 초부터 성장이 멈춰버릴 만큼 힘든 시절이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논술이었다. 논술 준비용 교재를 보면 고등학교의 수준에 맞지 않는 대학원생 연구 · 참고용 교재, 철학책 등 단 한 페이지도 쉽게 읽히지 않는 그런 책들이었다.

논술 걱정을 하니 어떤 학부모가 말했다.

“논술이 제일 쉬워. 수능 끝나고 학원에서 두 달 정도 집중해서 하면 돼.”

“두 달 동안 논술 준비를 할 수 있다고요?”

기가막혀 할 말을 잃었다.

문장이란 무엇인가? 학식이 속에 쌓여 그 모양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네. 이는 기름진 음식이 창자에 차면 광택이 피부에 드러나고, 술이 배에 들어가면 얼굴에 홍조가 도는 것과 같은 것이니 어찌 갑자기 얻을 수 있겠는가.

정약용(丁若鏞),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정약용의 말처럼 글이라는 것은 오랜 시간 쌓인 지식과 지혜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므로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국의 대학 논술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알아야 하는 당연하고 기본적인 말씀이다. 아니, 모두 알고 있다. 상황이 그렇게 되질 않으니 못하는 거지.

입시를 위해 아이들에게 시험을 위한 공부, 정답 쓰기만을 가르치는 획일화된 교육을 한 후 시행하는 논술평가는 아이들을 제대로 평가하는 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부 학생들은 논술을 위해 어릴 적부터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써서 첨삭받는 식으로 교육을 한다. 하지만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을 논술에만 맞춰 놓으면 아이들의 ‘생각하는 길’을 막는다고 생각한다. 논술을 잘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논설문 연습만 시켜서는 안 된다.

어린 시절에는 재미있는 책을 읽으며 감상문을 쓰거나, 일기를 쓰고, 동시도 써 보면서 글쓰기의 기초를 다져 가는 것이 중요하다. 자라면서 다양한 분야의 글을 읽고 실제로 쓰는 연습을 해야 한다. 학교도 학생들이 교과목을 배운 후 창의적인 생각을 해서 스스로 표현하는 교육을 해야 자기 주관이 뚜렷한 글이 나오고 논술로 학생을 평가를 할 수 있다고 본다.


수리논술을 해서 1학기 수시로 대학교에 가는 일이 ‘로또 맞는 것’과 같다는 말에 충격을 받고 남편과 진지하게 상의를 했다.

“4월에 그냥 온 식구가 다 같이 갑시다. 두 애들 다 자퇴시키고.”

“네? 고3 되는데 어떻게 대학교 보내게요?”

“큰애는 지금 해외로 데려가면 국내 대학교는 못 가는 거지. 해외 대학교 가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학년을 낮춰서 천천히 보냅시다. 며칠 전에 만난 선배 얘기 들으니 미국으로 대학교 가도 학교 수준을 낮추면 장학금을 많이 받고 갈 수 있다고 하더이다.”

“하기야 요즘 대학생들이 어학연수까지 다녀오니 졸업하는데 최소 5년이 걸린다고 하던데…….

맞아요. 대학교 1,2년 늦게 가면 어때요. 큰 애 의견 들어보고 결정하도록 해요.”

남편과 나는 진지한 대화를 나눈 다음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큰 아들에게 ‘당장 가방 싸서 집에 오라’고 전화를 한 것이다.

큰 아들이 집에 오자 가족회의를 했고, 4월에 함께 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무겁게 가라앉았던 집안 분위기는 순식간에 밝아졌다. 둘째 아들은 아빠 따라간다고 기분이 좋았으나 형 때문에 내색도 못하고 있다가 맘껏 좋아했다. 가족의 웃음소리가 윙윙거리는 밤바람 소리를 따라 빙글빙글 돌며 멀리 퍼져나갔다. 큰 아들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편안한 단잠에 빠져 들었다.

그날 이후 고등학생인 두 아들은 자퇴를 했고 출국 준비를 했다. 푹 쉬면서 수영, 악기, 춤 등등 배우고 싶은 것들을 배웠다.

오늘 하루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며

다른 모든 날을 결정해 주는 날이다.

-몽테뉴-

인생을 살면서 두 갈림길에서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될 때가 있다. 바로 오늘 한 결정이 인생을 바꿔놓을 수가 있다. 어떠한 일을 고민할 때 안갯속처럼 깜깜하다가 뭔가를 결정하고 나면 ‘너무도 당연한데 왜 여태 고민했지’라고 생각한 적이 꽤 있다. 한걸음 물러서서 세상을 넓게 보고, 한 박자 느리게 바라보면 의외로 현명한 선택을 하게 된다.

고등학생인 두 아들을 해외로 데리고 가기로 결정하는 일은 누구에게 닥쳐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 날의 결정은 우리 가족에게 중요하고 잘한 일이었다. 전학 많이 다니다 중학교 때 서울에서 집중해 공부했던 아이들의 저력이 고등학생인데도 함께 가기로 결정하는 데 든든한 힘이 되어주었다. 두 아들이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갔다. 우리 가족에게 새로운 장소는 늘 도전이고 희망이다.

(목차- 고3이 고등학교 자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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