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넘어 쏟아진 잔소리 폭탄
아이들은 영국으로 오면서 한 달가량 학교에 가지 않고 지냈다. 그러다가 겨우 학교에 가게 된 무렵이었다. 남편이 다쳤다. 아이들과 운동 겸 놀이를 했다가 발목을 접질렸던 것이다. 남편은 가만히 있어도 아프다며 통증을 호소했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발목 보호대를 찾아 사 왔다. 찜질을 해도 차도가 없었다. 온라인으로 튜브형 약품을 주문했다.
모든 것이 나의 몫이 되었다. 절뚝거리며 걸을 때마다 통증에 얼굴을 찡그리는 남편은 아이들을 데려다주기도, 데리고 오기도 힘들었다.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거기서 기차를 타고 수업을 들으러 갔다. 수업 후에도 부지런히 아이들 학교로 가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왔다. 곧 나아지겠지 생각했는데 남편은 점점 더 아파했다.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도 벅찬 내가 모든 것을 내가 해야 한다는 사실에 힘들고 답답했다.
할머니와 영상통화를 하면서 첫째가 말했다. 둘째가 교실 앞에서 울었다고. 그 말이 발단이었다. 할머니 두 분이 자신들 방식으로 난리가 난 것이다. 안쓰러운 마음에 한 분은 당장 날아오겠다고 하셨고 한분은 수시로 영상통화를 걸어오셨다. 둘째에 대한 걱정으로 두 분이 한참이나 통화하셨다고도 했다. 톡으로 전화로 문자로 아이에 대한 걱정을 쏟아내셨다. 나라고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엄마는 내 동생을 유학시킨 경력이 있으셔서 구체적인 조언을 해주셨다. 튜터를 붙여서 연습시켜라, 친구를 만들 수 있도록 나눠 먹을 간식을 싸줘라, 친구를 집에 초대해라 등등. 엄마니까 딸에게 충분히 할 수 있는 말들이었고 경험에서 우러나온 유용한 팁들일 것이었다. 차량을 구입하는 문제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남편과 내가 의견을 절충하지 못하기도 했고 멀리까지 가서 차를 살펴보고 계약하는 모든 일들이 벅찼다. 엄마는 차가 있어야 장도 보고 여기저기 다닌다, 생활이 달라진다는 말로 차를 사라고 재촉하셨다.
아이가 잘하고 있다고 사진이나 영상도 보내드리고 생일 파티에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모습도 흐뭇하게 공유했다. 차 없이 멀리 떨어진 생일 파티 장소까지 가는 것도, 다른 엄마들과 이야기해야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내 딴에는 열심히 하고 있는데 차량 구입 문제, 아이 영어 과외 문제를 통화할 때마다 말씀하셨다. 문제는 나도 적응하기 힘든 마당에 이런 말들을 들을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알겠다, 하겠다며 답을 이리저리 피했지만 더 이상 갈 곳 없이 몰리고 있었다.
할머니가 나이 들어 걱정이 많다면서 애가 타서 죽겠다고 하셨다. 말하고 듣는 거라도 시키라고. 영국 사람에게 말하는 것만 좀 시켜도 적응 기간을 훨씬 단축시킬 수 있다고. 애들이 생소한 곳에 가서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냐며. 애들 고생시키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아이에게 나쁜 엄마라고 하시는 말에 터지고 말았다. 그만 좀 하시라고 말했다.
답답한 마음에 집 밖으로 나왔다. 청명한 가을날, 예쁜 집들이 나란히 줄지어 있는 동네를 걸으며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방향도 없이 계속 걸었다. 이 나이 먹도록 영어도 하나 제대로 못한다는 자괴감에 힘들었는데 내가 아이를 힘들게 만들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못내 서러웠다. 공부를 그다지 잘하지도 못했는데 과외며 사교육을 받았던 일, 그럼에도 딴짓 - 덕질하느라 시간과 돈을 낭비했고, 실망을 안겨 드린 딸이었다. 그래, 나는 한 번도 자랑스러웠던 적 없던 딸이지. 엄마한테 이런 말을 톡으로 보내며 스스로 상처를 냈다.
저희 딸이 많이 부족하지요.
늘 부모님께 선생님들을 만날 때마다 하셨던 말씀이다. 나는 항상 선생님들께 잘 부탁해야 하는 부족한 딸이었기에… 부모님이 선생님께 겸손을 표현했던 방식이라는 생각도 든다. 또래보다 작았고 몸이 약했던 나를 잘 부탁하고 싶으셨던 방식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말이 반복될수록 나는 부족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자리 잡았던 것 같다. 엄마에게 부족했던 자식이었던 나를, 이제는 아이들에게도 부족한 엄마로 만드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부족한 것이 너무 많고 이루어 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엄마처럼 키우지 않을 거라는 반발심도 생겼다. 물론 엄마가 원하는 방향대로 아이가 순순히 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나의 성장과정에서 느낀 엄마에 대한 서운함과 지금 당장 어쩌지 못하는 답답함, 나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엉켜 서러웠다. 평생 잘한 것 없어 자랑스러울 것도 없는 딸인 것만 같았고 엄마 말대로 잘나지 못해서 애를 더 고생시키나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손주가 안타까웠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럼 나는? 남편도 아프고 나도 힘든데, 이런 이야기를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있나. 엄마에게도 못하면 누구에게.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서러웠다.
엄마는 엄마대로 쉬이 올 수 있는 거리도 아닌 곳에서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상황이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남동생도 자기 경험을 떠올리며 경험자의 입장에서 양쪽 입장을 들어가며 중재하려고 애썼다. 나는 영국에 동생은 미국에 엄마는 한국에서 메시지로 시차가 있는 말다툼이 이어졌다.
기분은 엉망이었지만 갈 곳도 없기에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마트에서 할인을 하기에 사 두었던 와인을 꺼내왔다. 남편은 우리가 여기에 온 지 한 달 밖에 안 됐고, 아이들은 이제 막 학교에 가기 시작했다는 걸 일깨워줬다.
첫째가 매운 김치를 밥 숟가락에 척척 올려 먹었다. 학교에서 알게 된 한국 학부모님께서 한 포기 가져다주신 김치였다. 한 달 만에 맛본 김치는 정말 톡 쏘는 반갑고, 눈물 나게 맛있었다. 밥을 먹던 첫째가 갑자기 "엄마, 학교 힘들지?"라고 물어본다. 이런 걸 물어보며 엄마를 헤아려주는 나이가 됐다는 것이 신기하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은 이제 제법 먼 곳도 잘 걸어 다닌다. 안아달라고 떼쓰지 않고 꽤 먼 거리를 잘 걷는다. 나는 부족한 딸로 컸지만, 내 아이들은 믿어주면서, 칭찬을 많이 해주면서 키울 것이라고 다짐했다.
다음날 아침, 남편이 불현듯 말했다. 통풍이네. 남편은 전에도 통풍을 앓은 적이 있었다. 바람만 불어도 아파서 통풍이라고 부른다는 그 끔찍한 통증이 발목에 찾아온 것이었다. 영국에 올 때 거의 한 트렁크를 채워왔던, 그래서 창고 선반 한 칸에 약국처럼 정리해 놓았던 약들 중에 통풍 약을 찾아 먹었다. 약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통증이 줄어들었다고 했다.
서울에서 그의 삶은, 저녁에 공연이 끝나고 밤 10시쯤 술자리를 시작해 자정이 넘어 집에 왔다가 그다음 날 아침 바로 출근하는 날들의 반복이었다. 남편은 술이 들어갈수록 안주를 더 많이 먹는 스타일이었다. 술을 깨려고 그러는지 취할수록 더 먹어댔다. 심한 복부 비만에 고혈압, 지방간, 통풍까지 있었다. 남편은 그날부터 먹는 양을 파격적으로 줄였다.
남편이 건강을 회복하면서 생활도 조금씩 천천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둘째도 학교에 갈 때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엄마랑 딸은 서로 미안하다 말했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었지만 옷을 껴입으며 적응해 보려고 애썼다. 조금씩, 더디지만 나아질 거라는 것을 믿었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