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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와 쌀국수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

by 정재은

런던에 온 이유 중 하나는 좋아하는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부지런히 공연을 찾아다녔다. 공연장에서 오래 일했던 나는 다른 공연장에 가보는 것만으로도 신났다. 시설이며 좌석배치, 객석 구조와 의자 재질부터 일하는 사람들을 비교하며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공연을 보면서도 여러 번 언어의 장벽에 부닥쳤다. 다른 관객들이 다 같이 웃는데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전에는 연극을 훨씬 더 좋아했었는데 런던에 온 후로 발레와 현대무용도 즐기게 됐다. 바비칸에서 했던 마임페스티벌에서 여러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대사 없이도 감정과 의미를 전달하는 마임의 매력에도 푹 빠졌다.


발레 공연을 예매한 날, 공연 전에 따뜻한 음식을 먹고 싶어 검색을 해보니 그날 가는 극장 근처에 마침 베트남 쌀국숫집이 있었다. 지도를 보며 찾아간 가게의 유리창에는 김이 서려 있었다. 밖에서 보기에도 따뜻해 보였다. 테이블이 4개 있고 창가에도 자리가 있었다. 창가 쪽 높은 의자에 올라앉았다. 키가 작지만 다부져 보이는 아저씨가 주문을 받으러 오셨다. 스프링롤, 딤섬 등이 있었지만 따뜻한 국물을 먹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소고기 쌀국수 한 그릇을 주문했다.


너무 배가 고파 자꾸 주방을 돌아봤다. 아저씨 혼자 요리도, 테이블 정리도 하고 계산도 해야 했기 때문에 쌀국수가 나오기까지는 무척 오래 걸렸다. 한참만에 나온 음식을 내 앞에 놔주시며 Sorry라고 하셨다. 미안하다고 하시며 미소 짓는 아저씨 얼굴에는 그 표정 그대로 아주 깊은 주름이 파여 있었다. 아저씨의 주름을 보니 이민자로서 이곳에서 자리 잡기까지 얼마나 고생하셨을지 그려졌다. 몇백 번, 몇천 번이나 쏘리를 말해왔을까.


쌀국수와 별도로 접시에 가지런히 놓아주신 숙주와 고수 고추를 남김없이 뜨거운 쌀국수 국물에 싹싹 긁어 넣었다. 라임도 짜 넣었다. 그릇 아래에 뭉쳐 있는 쌀국수를 살살 풀어주고 우선 고기 한 점에 숙주를 얹어 한 입 먹었다. 아삭아삭한 식감이 어찌나 좋던지! 고기와 고수의 조합도 끝내줬다. 창가 자리에 나 혼자였으므로 나는 후룩후룩 쌀국수를 먹었다. 고기는 물론이거니와 숙주, 양파와 파까지 깨끗이 비웠다. 먹고 난 그릇에는 덩그러니 라임 껍질만 남았다.


아저씨께 큰 소리로 땡큐라고 말하고 나왔는데 설거지하시느라 못 들으셨나 보다. 구글에 로그인해서 별점을 남겨야겠다 생각하며 공연장으로 향했다.




화제가 되는 무용 공연을 올리고 있는 새들러스 웰스 Sadler's Wells Theatre는 1,500석 규모의 극장이다. 새들러의 우물이라는 이름처럼 공연장은 우물이 있던 자리였다고 한다. 이 지역 일대가 약효가 있는 물로 유명했던 지역이라고. 극장 안 객석으로 가는 통로에 예전 우물 자리를 남겨놓아 관객들이 입장하면서 내려다볼 수 있게 해 놓았다. 지금은 말라버린 우물 자리를 메꿔버리지 않고 전시해 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1층 박스석. 출입구와 가장 가까운 자리라서 박스석 중에서는 무대가 제일 잘 보이는 자리였다. 좌석 앞 난간에 좁게나마 테이블이 있어 수첩과 맥주를 올려놓고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좌석 위치에 따라 금액 차이가 있는데 이 정도 시야라면 돈도 아끼고 공연도 잘 볼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약간 높은 박스석에 앉아서 다른 관객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연극 공연장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세상 멋쟁이들이 여기 다 모여 있었다. 누가 봐도 무용하는 몸을 가진 이들, 우월한 길이와 남다른 패션을 자랑하는 이들. 그리고 다른 극장에 비해 남남 커플이 유난히 많았다.


공연을 볼 때면 나와 다른 몸을 보는 경이로움이 있다. 무용 공연, 발레는 특히 더 그렇다. 군살 따위는 숨길 데 없는 전신 타이즈. 똑같은 의상을 입고 같은 동작을 하는 각각의 무용수들이 아름다웠다.


이렇게 여러 사람의 깊은 고민들이 무대에 겹겹이 표현되는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벅차오른다. 아주 오래 갈고닦은 기술들,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고민들을 풀어낸 흔적들. 그것도 아주 여러 명이 모여서 조율하여 만들었을 작품. 재료가 뭉근해지도록 끓여 맛이 어우러진 느낌이었다.


무용수의 단련된 근육과 쌀국숫집 아저씨의 미소를 따라 깊게 파인 주름을 보며 생각했다. 나의 오늘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런던 Sadler’s Wells Thea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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