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생활비 아끼기 대작전
아이들을 데리고 박물관에 갔던 날이었다. 과학 박물관은 잘 짜인 전시를 볼 수 있고 여러 체험을 할 수 있으면서 무료여서 좋은 곳이다. 아이들은 커다란 모니터 앞에서 버튼을 누르는 게임 같은 체험에 빠져 있었다. 뒤편에 마련된 널찍한 의자에 앉아 남편과 나는 휴대폰을 확인하고 있었다. 잠깐의 평화를 깨며 남편이 말했다.
수도요금이 270파운드가 나왔어.
1달도 채 되지 않은 기간에 사용한 수도요금이 45만 원이라고? 고지서에는 우리가 사용한 물의 양이 환산되어 나왔다. 424,000잔의 차, 1,413회의 샤워, 1,325회의 목욕을 한만큼의 물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한두 번 욕조에 물을 받아 놀기는 했지만 1,325회라니 무언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밝혀야 했다. 식기세척기와 세탁기로 그만큼의 물을 써버린 것인지, 어디선가 물이 새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미터기를 찾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마당 어딘가에 있다고 하는데 여덟 가구 수도 미터기를 다 열어보며 찾을 수도 없었고, 미터기를 찾는다고 해도 우리가 입주하던 날의 기록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비자를 신청하면서 지불한 의료보험료와 거주자가 내야 하는 세금, 가스와 전기요금은 우리의 계산에서 한참 벗어나는 금액들이었다. “우리 오래 못 있겠는데?” 박물관 전시물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정말 곧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수도 있었다.
그날부터 물을 아끼기 위해 애썼다. 설거지할 때 물에 담가 두었다가 그 물을 버리고 비누질 한 뒤, 물을 틀어놓고 거품을 헹구는 것도 고쳤다. 한 그릇 분량의 물을 받아 번갈아 옮겨 그릇을 불렸다. 영국 사람들은 싱크대에 물을 받아 주방세제를 풀고, 그 물속에서 그릇들을 문질러 씻은 뒤 건져 마른행주로 거품을 닦아내고 쓴다고 들었다. 한국 사람들 설거지 방식이 유난히 물을 많이 쓴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밥풀이 눌어붙기 때문에 불려야 닦이는 특성 탓도 있을 것이다.
나도 오랫동안 흐르는 물에 씻는 설거지를 해온지라 그릇에 남아 있을 세제가 찜찜해서 도저히 영국 방식으로 할 수는 없었다. '잔류세제'라는 단어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릇 하나를 헹군 물로 최대한 다른 그릇들에 있는 거품도 씻길 수 있도록 모아서 헹궜다. 손으로 하는 설거지보다 오히려 물이 절약된다는 식기세척기를 더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세척기에서 말린 그릇에도 세제가 남아 있을까 싶어 괜히 물에 한 번 헹구어 썼던 것도 안 했다.
욕조 목욕은 금지됐고 샤워는 가끔 했으며 빠르게 씻고 나왔다. 세탁할 때도 두세 번씩 헹굼을 추가하던 것을 멈췄다. 이것 역시 아이들 피부에 닿는 옷에 세제가 남아 있을까 싶어 몇 번씩 헹궜던 것이다. 오랜 시간 해온 습관을 바꾸기는 쉽지 않았지만 충격적인 수도 요금은 그 버릇을 당장 고치게 만들었다. 그동안 마음 놓고 물을 콸콸 썼던 것을 반성했다. 추울 땐 옷을 껴입었다. 내복 위에 플리스나 얇은 패딩을 겹쳐 입었다. 두꺼운 수면 양말을 신었다. 영상 통화를 할 때마다 집 안에서도 옷을 잔뜩 껴입은 나를 보고 엄마가 안타까워하셨다.
마시는 물은 브리타 정수기를 썼다. 주전자에 수돗물을 받으면 필터에 정수되어 나오는 플라스틱 주전자이다. 여기 사람들은 수돗물을 그냥 마신다. 식당에서 생수는 돈 주고 사야 하는데 탭워터를 달라고 하면 무료로 준다. 도서관에서도 몇몇 학생들이 작은 브리타 물병을 들고 다니며 사용하는 것을 봤다. 집에서 물을 싸갖고 다녔는데 가방 무게가 부담되기도 해서 그 물병이 꼭 사고 싶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끼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며칠을 고민했다.
‘그래도 물은 많이 마셔야지’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물병을 샀다. 사려고 그토록 별렀던, 그만큼 기대했던 물병을 개시했다. 사용 전 안내에 따라 따신 물에 필터를 담갔다가 깨끗이 씻은 물통에 필터를 장착해서 물기를 닦아 들고 나왔다.
그날은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의 이름을 딴 건물에서 수업이 있었다. 런던에는 생각보다 스타벅스가 많지 않고 Pret이나 Costa가 더 자주 눈에 띈다. 이 건물로 가는 길에 스타벅스가 있어 수요일 수업을 들을 때는 커피를 한잔씩 사들고 가곤 했다. 스타벅스에서는 주문할 때 이름을 말하는 것이 숙제였다. 나는 Jane이라고 말했는데 많은 이들이 나의 J발음을 알아듣지 못했다. 어느 날은 Jaid였다가 Jay이기도 했고 심지어 Zing이기도 했다.
7층에 있는 컴퓨터에 로그인해서 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커피는 마셨고, 집에서 싸 온 샌드위치도 먹었다. 물을 마실 시간이었다. 휴대용 약통에 넣어온 비타민 B와 혈액순환제를 손바닥에 덜어 손에 쥐고 7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1층에서 봐둔 식수대에서 새 물통에 물을 담은 뒤 마실 요량이었다.
알약 두 개를 입안에 털어 넣고 물통 뚜껑을 열어 물을 담았다. 주둥이를 잡아당겨 열고 물통을 입 위로 들어 올렸다. 어라? 그런데 물이 안 나온다. 한 방울, 두 방울... 뭐야 물이 이렇게 나온다고? 마우스피스를 더 잡아당겨 봤지만 그게 다였다. 필터를 잘못 끼웠나? 빨대 쓰듯이 빨아 마셔야 하는 걸까. 알약은 입안에서 쓰게 녹아가는데 물은 나오지 않았고. 급해서 뚜껑을 열고 수돗물을 마셨다. 필터 달린 물병은 뭐 하러 산 건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물통 하나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런던이다. (쪽쪽 빨아 마셔야 하는 게 맞았다. 나는 물이 콸콸 나오는 물병이 편하다.)
한동안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 집은 수도요금이 얼마나 나오는지 물어보고 다녔다. 번역기를 화면 한쪽에 띄워놓고 수도 회사인 템즈워터와 상담도 했다. 부동산에 메일을 보내 문의했다. 누구도 이렇다 할 답변을 주지 않았다. 물이 샐 수도 있다는 무섭고 애매한 대답만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참을 있다가 어느 날 다시 확인해 보니 반의 반 금액으로 바뀌어 있었다. 전 세입자가 뒤늦게 마지막달 요금을 지불한 것 같았다. 부동산도 수도회사도 사과하지 않았다. 아무런 설명조차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으리라 짐작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