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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생, 갑자기 2학년이 되다

런던 초등학교 적응기

by 정재은

1년간 살게 될 우리 집으로 들어가고 나서 서둘러 아이들 학교 수속부터 했다. 런던에 오기 전에 인터넷으로 좋다는 공립학교들을 찾아봤고 그 학교를 배정받을 수 있는 위치에 집을 구했다.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순서대로 3 지망까지 학교 이름을 적어 지역 위원회에 제출했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지 않은지 3주가 넘어가고 있었다. 유명하다는 박물관 미술관도 둘러봤고 공원이며 놀이터에도 다녔지만 학교에 가지 않는 하루하루는 길기만 했다.


기다림 끝에 지역에서 연락이 왔다. 그런데 1 지망 학교에는 큰 아이, 2 지망에는 작은 아이 자리가 있다고 했다. 둘을 같이 보낼 수 있는 학교는 희망 순위에 없었던 생소한 학교였다. 다른 한 명의 자리가 언제 생길지 모르는 채로 기다릴 수는 없었다. 비슷한 시간에 아이 둘을 각각 다른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리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둘을 같은 곳에 보낸다는 결정을 하니 답이 나왔다. 정보가 거의 없는 그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기로 했다.


한국에서는 3월생부터 2월생까지 한 학년이었는데 영국은 9월생부터 다음 해 8월생까지가 한 학년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첫째는 Year 3가, 유치원을 다녔던 둘째는 Year 2가 됐다. 첫째는 10월 생이고 둘째는 7월생이라 이렇게 배정된 것이었다. 21개월 차이가 나는 형제인데 학교에서는 한 학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게 됐다. 무엇보다 유치원생이었던 꼬맹이가 갑자기 2학년이 되다니!


그곳으로 가겠다고 입학 지원처에 메일을 회신했다. 산책도 할 겸 다 같이 학교를 찾아가 보았다. 집에서 20분 정도를 걸으니 학교가 나왔다. 구글 지도상으로도 작은 규모였고 겉에서 보기에도 학교인지 구분이 안 갔다. 짧은 방학 기간이어서 학교 문은 닫혀 있었다. 학교 안이 궁금하다고 해서 둘째는 아빠 목마를 타고 담장 너머로 안을 들여다봤다.




정식으로 등교하기 전에 학교를 둘러볼 수 있어 아이들과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입구에서 교직원의 안내를 받아 방문자 명단을 작성하고 비지터 스티커를 받아서 붙이고 들어갔다. 밖에서 보기엔 작고 볼품없어서 내심 실망했던 터였다. 하지만 안에 들어가니 좁지만 그 안에 필요한 것은 다 들어 있었다. 옹기종기 여러 반 앞에 있는 화장실은 꽤 컸고 건물 안쪽으로 운동장과 놀이터가 있었다.


둘째 교실로 안내받은 곳에는 아이들이 없었고 선생님만 세 분이 계셨다. 선생님 중 한 분이 우리를 보고 반갑게 인사해 주셨다. 선생님은 허리를 숙여 둘째와 눈을 맞추며 말을 걸었다. 너무 긴장한 둘째는 얼어붙어서 겨우 인사를 했다.


첫째 교실은 2층 가장 안쪽에 있었다. 교실 가득 빼곡히 앉은 아이들이 수업 중이었다. 어림잡아 30명은 돼보였다. 선생님께서 밝게 인사를 해주셨다. 수업을 멈추고 새 친구를 소개해주셨고 친구들도 첫째에게 인사를 해주었다. 첫째도 역시 얼어붙어 있었다. 선생님은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다. 아이가 코리아라고 대답하자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 손들어보라고 했다. 세 명이 손을 들었다. 여기 없는 친구 한 명이 더 있다고 했다. 생각보다 한국 친구가 많아서 반가웠고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는 운동장을 지나고 목재로 된 놀이기구가 있는 놀이터를 지나 궁금했던 2층 버스로 가보았다. 학교 밖에서는 건물 말고 이 버스만 보였기 때문에 버스가 왜 학교 마당에 서 있는지, 어떤 용도인지 궁금했다. 그곳은 도서관이었다. 사서 선생님이 계셨고 아직 정리를 못했다는 책들이 흩어져 있었다. 도서관은 유난히 따뜻했다. 첫째가 이 버스가 움직이기도 하냐고 궁금해하자 사서 선생님은 엔진이 없어서 움직이지는 않는다고 설명해 주셨다. 아이들에게 책 몇 개를 꺼내 보여주니 조금씩 긴장을 풀며 즐거워했다. 2층에도 올라가 구경하고, 흥미로워할 만한 책들이 꽂힌 책장을 알려주고 내려왔다.


건물로 다시 들어가 컴퓨터실도 구경했다. 아이들 모두가 헤드셋을 끼고 무언가를 하고 있어 조용했다. 첫째에게 교실에서 가장 가까운 화장실을 알려주고 작성해서 제출해야 할 서류를 받아서 나왔다. 우리가 출입한 곳은 후문 격이었고, 등하교 시에는 큰 나무문을 열어준다고 했다. 육중한 철문이 아니라 칠도 안된 나무문이었다.


가게에 들러 교복과 체육복, 책가방을 샀다. 체육복은 아래위로 온통 파란색이고 교복은 하늘색 폴로셔츠에 회색 바지로 되어 있었다. 체육복은 일주일에 두 번 입고 가야 한다. 날씨가 쌀쌀한데 학교 플리스가 있어 그것을 입히면 되니 다행이었다. 학교 로고가 있는 책가방도 샀다. 집에 와서 아이들 가방이며 옷에 이름을 써주며 이제 정말 학교에 가는구나 실감이 났다.




영국에 온 지 한 달을 넘겨 드디어 학교에 가게 됐다. 대학원에 다니는 나 대신 육아를 담당했던 남편에게도 숨 쉴 틈이 생겼다. 꼼짝없이 삼시 세끼를 챙기며 종일 붙어있느라 지쳤을 것이었다. 아이들이 등교하는 첫날은 내가 첫 수업을 들으러 갈 때만큼이나 떨렸다. 그러나 내가 긴장한 내색을 하면 아이들이 더 떨릴 테니 아이들에게는 '엄청 재미있겠다!'를 외치며 학교로 향했다. 가는 길에 '화장실 가고 싶으면 뭐라고 하지?' '추우면?' '더우면?' 간단한 영어 단어들을 연습시켰다.


학교 근처 공원에는 아이들이 줄지어 뛰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패딩을 입었는데 아직 반바지인 아이들도 여럿이었다. 저 아이들은 춥지도 않은가 봐. 남편과 마주 보며 놀라워했다.


열린 나무문 안으로 들어가 정면에 보이는 교실이 둘째네 반이었다. 선생님이 웃으며 "How's your day?" 둘째에게 안부를 물었다. 아이는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들어갔다. '무슨 뜻인지 알고 있을까? 대답을 했을까?' 첫째를 교실까지 데려다줄까 망설이다가, 계단 앞에서 올려 보냈다. 건물 안에 어른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였다. 알아서 잘 찾아가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나는 학교에서 걸어 내려와 도서관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아침에 급하게 아이들 아침을 만들어주면서 남은 재료로 내 도시락도 쌌다. 런던에서의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의 학교 생활이 즐겁기를. 좋은 친구를 만나기를. 맛있는 점심을 먹기를. 잘 적응하기를. 길게 걱정하기에는 당장 내 앞가림이 벅찼다.




3시가 넘어 아이들을 학교에서 데려왔는지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둘째가 울었다고 했다. 이유를 말하지 않고 울기만 했다고. 첫날이라 그랬을까. 학교에 강하게 요청해서 억지로라도 한 학년을 내리는 게 맞았나. 이런저런 생각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면서 남편을 재촉해 아이가 먹고 싶은 것을 물어보라고 했다.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저 따뜻하고 맛있는 밥 해주는 것. 힘내라고 해주는 것뿐이 아닐까.


둘째가 요청했던 보들보들한 계란찜으로 저녁을 먹으며 첫 등교 소감을 물었다. 첫째의 대답은 '밥이 맛있었어!'였다. 이 말을 듣고 안심이 됐다. 밥이라도 맛있으면 됐지. 오늘 점심에는 어떤 맛있는 게 나올까 하는 재미라도 있을 테니까.


어제 하루 가봐서 분위기를 알아버린 둘째는 학교에 가는 내내 울상이었다. 교실 앞에서는 안 들어가겠다고 버티며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아이를 토닥여 교실로 들여보내려고 애썼다. 선생님이 데이지라는 친구를 불러 그 아이에게 둘째를 데리고 가주라고 부탁했다. 데이지가 유창한 영어로 둘째와 나에게 뭐라고 말을 했는데 아마 전에도 다른 친구에게 이렇게 해준 적이 있다는 이야기였을까? 나도 처음엔 그랬다는 얘기였을까? 정확히 알아듣지를 못했다. 나도 이런데 아이는 어떨까. 아이는 울면서 금발머리 친구 손에 이끌려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둘째는 어린이집도, 유치원도 울면서 간 적이 없는 아이였다. 형이 먼저 어린이집이며 유치원을 다녔기 때문에, 형을 데리러 갈 때 가봐서 익숙했던 곳에 자기도 가게 된 것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드디어 나도 간다는 기쁨이 더 컸다. 그런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울고 있는 모습을 보니 속이 탔다. 교실 안쪽에서 뒤돌아서며 나를 향해 "엄마, 안녕!"하고 소리치는 울음 섞인 목소리에 코가 시큰했다.


아이는 무엇보다 학교에 있는 시간이 너무 길다고 했다. 알아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하는데 그 시간이 얼마나 더 길게 느껴졌을까. 영국으로 오기 전 학기에는 유치원에서 방과 후 수업마저 하지 않아 오후 1시 30분이면 하원을 했었다. 할머니랑 간식을 먹으며 놀다가 형이 하교하면 태권도며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중간에 학교가 정해지지 않아 한 달도 넘게 집에서 놀았다. 그러다가 3시 15분까지 교실에 앉아 있어야 하니 힘들기도 했을 것이다.




그다음 날, 8시 43분에 도착하니 교문이 닫혀 있었다. 우리보다 일찍 온 부모와 아이들이 길을 따라 줄을 서 있었다. 줄 끝에 서서 헤어지기 전에 기운을 북돋아주려고 어젯밤에 했던 말을 다시 해줬다.

"엄마는 진짜 너희들이 자랑스러워. 엄만 일곱 살 때도, 아홉 살 때도 그렇게 못했었어."


나는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었던 약해빠진 아이였다. 툭하면 편도선이 부어 열이 나서 늘어졌고 입맛도 없었다. 안 먹으니 자주 아팠다. 기운이 없으니 뭘 하고자 하는 의욕도 없었다. 그랬던 나에 비하면 아이들은 감사하게도 건강하고 활기차다. 첫째가 물었다.


엄마가 아홉 살이었을 땐 영국에 올 생각을 했었어?
전혀 안 했지.
그럼 왜 우리를 여기 데리고 왔어?
엄마가 보니까 영어를 알면
볼 수 있는 자료도 훨씬 많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도 훨씬 많아지더라!
그래서 엄마도 지금 공부하고 있는 거야!


나는 요즘 정말 이렇게 느끼고 있었다. 뒤늦게 공부를 하느라 목도 아프고 눈도 따가웠지만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이 그저 놀라웠다. 도서관에서는 보물 찾기를 하는 기분이었고 이렇게나 많은 정보가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사무실에서 모니터만 보고 이메일을 쓰고 보고서를 쓰느라 보지 못했던 넓디넓은 세상을 이제야 마주하고 있었다. 그렇게 자주 썼던 말, '다양하다'는 의미도 새롭게 다가왔다. 다양성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를 생김새, 피부색, 언어, 억양, 생활습관, 스타일, 땀 냄새로 감각하고 있었다.


교실 앞에서 아이를 꼭 안고 볼에 입을 맞추며 온몸과 온 마음으로 응원해 줬다. 정말 잘하고 있어!

그리고 돌아서서 학교로 가는 길에 생각했다. 나만 잘하면 된다.


아이들 학교 앞 공원에 있는 아름드리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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