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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집에 없는 세 가지

어플로 본 집 실물 영접기

by 정재은

3주간 헬리콥터 소리를 들으며 시차적응을 했던 템즈 강가의 에어비앤비를 떠나 드디어 집으로 들어가는 날이 왔다. 최대한 늘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당장 필요한 것들과 먹을거리 등 짐가방은 늘어나 있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캐리어 4개와 배낭 4개에 커다란 에코백과 장바구니까지 동원해 다시 짐을 꾸렸다. 네 명이 타고 짐까지 실을 수 있는 우버 XL를 부르고 체크아웃을 했다. 해치백 차량 트렁크에 테트리스 하듯 짐을 채워 넣었다. 남편은 앞자리에, 나는 뒷자리 양쪽에 아이들을 앉히고 가운데 앉았다. 도심을 벗어날수록 동네 분위기가 달라졌다. 우리가 살게 될 곳은 어떤 모습일지 두근거렸다. 뾰족한 지붕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을 지나 언덕길을 올라 차가 멈춰 섰다. 어플로 봤던 바로 그 집 앞이었다.


길에서 약간 내려가 기울어져 있는 정원에는 낙엽이 뒹굴고 있었다. 삐죽 키만 큰 장미가 듬성듬성 피어 있었다. 건물은 ㄱ자 모양이었는데 8세대 정도가 사는 빌라 형태였다. 마당 안쪽으로, 이름 모를 나무들을 끼고 왼쪽으로 꺾으니 나란히 붙어 있는 문 두 개가 보였다. 아이비 덩굴이 감싸고 있는 기둥 옆에 있는 것이 우리 집 대문, 대문이라기엔 작은, 문이었다. 정원 사이로 난 좁은 길 위에 짐들을 끌어다 놓고 부동산에서 하는 최종 점검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데이트 어플로 대화를 나누던 사람을 실제로 만나면 이런 느낌일까. 휴대전화 화면으로만 확인했던 집에 들어가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고 멍하게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작았다. 사진상으로는 신발장도 놓여 있었던 곳은 방과 거실, 주방 사이, 거실도 주방도 아닌 이름 붙이기 어려운 ‘공간’이었다. 부엌도 방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내가 충격을 받아들이고 있는 사이 부동산에서 온 이는 집을 다 둘러보고서 묵직한 열쇠 꾸러미와 주의사항이 적힌 종이 두 장을 주고 갔다. 꾸러미에는 집, 차고, 창문 열쇠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그렇다, 이 집은 열쇠로 문을 열어야 했다. 서울에서는 열쇠를 챙겨 다녔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불투명 유리로 된 하얀 프레임 문에는 동그란 열쇠 구멍 하나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문 중간에 가로로 편지함이 달려 있었다. 밖에서 안으로 우편물을 밀어 넣으면 현관 바닥에 떨어지는 형태다. 서울에서는 건물 밖에 설치된 우편함 중에 우리 집 호수에 꽂힌 우편물을 가지고 들어 오면 됐었다.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면 집 안에 있는 화면에 누가 왔는지 보였다. 도어록은 손을 대면 숫자가 표시되고, 터치 패드는 내가 누르는 비밀 번호를 기억했다가 문을 열어줬었다.


현관 입구를 아무리 둘러봐도
초인종이 없었다.
도어록도 없었다.
그리고 또 없는 것은 방충망이었다.


창문을 열면 바로 바깥이었다. 처음 며칠간은 방충망 없는 집이 어색했다. 내가 살았던 집 창문에는 늘 방충망이 달려 있었는데, 아무것도 없다니 영 허전했다.


주방 찬장을 열어보고 있는데 아이들이 복도 천장을 가리키며 나를 불렀다. 온라인 뷰잉에서 슬쩍 봤던 정사각형 문이었다. 부동산에도 물어봤었지만 그곳을 들여다볼 수도 속시원히 설명을 들을 수 없어 답답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복도 구석에는 스테인리스 막대가 놓여 있었다. 집은 아무것도 없이 비워져 있었기 때문에 저건 왜 저기 있을까 의아했다. 막대는 알파벳 J 모양으로 생겼는데 한쪽은 납작했고 구부러진 쪽은 통통했다. 면테이프로 감아진 막대 끝을 동그란 버튼 가운데 1자에 맞춰 끼우고 시계방향으로 돌리니 문이 아래로 열렸다. 열린 문 안으로 사다리가 보였는데 맨 아래쪽 가운데 작은 고리가 있었다. 막대 구부러진 곳을 그 고리에 끼워보니 꼭 맞았다. 막대를 당기니 드르륵 큰 소리와 함께 사다리가 내려왔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아무리 당겨도 사다리는 반 밖에 내려오지 않았다. 어른 눈높이 정도에 멈춰버렸다. 이리저리 사다리를 내려보려다가 사다리가 고장이 나서 사용하지 않는 공간인가 보다, 이 높이에서 올라가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다시 올리려고 했을 때였다. 두 개가 겹쳐있던 사다리 아래쪽에 아주 작은 레버가 있었다. 그것을 당기자 겹쳐 있던 사다리 중 하나가 아래로 뻗어내려와 바닥에까지 닿았다. 아이들은 환호했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게 되어 신이 난 아이들은 가방에 챙겨 왔던 랜턴을 꺼내 들고 사다리를 올랐다.


기울어진 천장을 보니 그곳은 지붕 바로 아래쪽인 모양이었다. 수납을 고려한 것인지, 안 쓰는 책장을 보관해 둔 것인지 크기가 제각각인 책장들 여러 개가 한쪽 벽면에 놓여 있었다. 바닥에는 집에 깔고 남은 카펫이 조각조각 깔려 있었고 배관들은 노출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전등도 달려 있었고 꽤 널찍한 공간이어서 창고로 쓰기에 적당했다. 어릴 적 동화책에 뾰족한 지붕 아래 작은 창문이 달린 다락방을 상상하곤 했다. 아쉽게도 창은 없었지만 아이들에게는 멋진 공간인 듯했다.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어했다.


우리는 한국에서 캐리어 네 개만 들고 왔으므로 가구와 가전이 있는 집을 구했다. 더블 침대와 화장대, 4인용 테이블과 의자, 소파, 주방 가전들이 있었다. 그러나 당장 덮을 이불도 베개도 없었다. 물건을 사서 들고 올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어 첫날은 접시와 그릇, 물컵, 이불을 사 왔다. 더블 침대에 나란히 누운 아이들에게 새로 사 온 이불을 덮어주고 남편과 나는 거실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나마 나는 그날 사온 놀이용 매트 위에, 남편은 카펫 위에 누웠다. 가져온 옷들을 접어 베개를 만들어 베고 롱패딩을 덮었다. 자다가 몇 번을 깼다. 발이 시렸고 등은 배겼다. 아무것도 없는 낯선 이 집에서 지내야 한다는 걱정과 기대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는 며칠 동안 이케아와 마트를 부지런히 오가며 필요한 것을 사 모았다. 특히 전기 주전자를 사고 나서 참 좋았다. 전기 주전자가 없는 동안 작은 냄비에 물을 끓여서 먹었다. 물이 끓으면 뜨거워진 손잡이를 행주로 감싸 쥐고 머그잔에 조심조심 따라야 했다. 버튼만 누르면 순식간에 부르르르 물이 끓어오르는 퉁퉁한 주전자를 사고 기뻤다. 이렇게 물을 빨리 끓일 수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이케아에서 꼭 필요한 수많은 물건들 중에 몬스테라 화분 하나를 끼워 넣고도 흐뭇했다. 차도 없고 짐은 많은 데다 아이들까지 챙겨야 하니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화분이 짐스러울 것이 분명했지만 삭막한 이 집에 그 초록이라도 꼭 데려오고 싶었다.


빵이 살짝 노릇해지도록 구울 수 있는 토스트 겸 미니 오븐, 눌어붙지 않는 코팅된 베이지색 우유냄비, 예쁜 머그잔을 샀을 때도 나는 참 좋았다. 그러면서 익숙해져서 감사함을 느끼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떠올렸다. 가져올 수 없었던, 그래서 나누거나 버려야 했던 물건들이 그립기도 했다. 물건뿐이었을까. 정든 집과 동네 회사 가족과 친구들까지 모든 익숙한 것들을 두고 떠나와, 모든 것이 새삼스러운 날들이었다. 런던 집에는 디지털 도어록도 비디오폰도 없지만 다락방이 있었다. 우리는 문을 두드려 사람을 부르고 열쇠로 문을 열고 계단을 오르는 런던 집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거실 창밖으로 커다란 나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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