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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로비에서 쿨쿨

시차적응이란

by 정재은

도착한 이튿날 아침. 당장 마실 물이 필요하기에 배낭 하나씩을 메고 마트에 다녀왔다. 템즈강 위로 안개가 자욱했다. 런던에 와 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마트에 있는 낯선 식재료와 제품들은 신기했다. 우선 쌀과 빵, 물과 우유, 달걀, 몇 가지 채소 등 익숙한 재료들을 사 왔다. 간단하게 아침을 만들어 먹고 학교에 다녀오기로 했다. 도착한 지 열흘 안에 꼭 받으라고 했던 거주 허가증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비자 신청할 때 받았던 유심을 갈아 끼우고 학교까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검색했다. 온 가족 여권과 서류를 챙겨 집을 나섰다. 기차역을 찾아가서도 아이들 티켓을 어디서 사야 하는지 한참 헤맸다. 물어물어 아이들 티켓을 샀고, 어른들은 휴대폰을 태그 해 도심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튜브도 기차 노선도 한참 찾아야 했다.


캠퍼스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건물 입구에 붙어 있는 약도를 살펴 가야 할 건물을 찾았다. 아직 외우지 못한 학생 번호와 이름을 적고 방문증을 받았다. 온라인으로 등록한 증명사진이 인쇄된 학생증을 받았다. 출입을 위해 늘 목에 걸고 다녔던 회사 사원증 대신 학생증이 생긴 것이었다. 또 다른 소속이 생긴 안도감, 걱정 반 기대 반 여러 감정이 피어났다. 네 식구의 거주 허가증도 받고 학교 앞에서 기념사진도 찍었다.


도심까지 나왔으니, 지인이 공연을 하고 있는 공연장에 들러보자고 했다. 그때가 오후 4시쯤이었으니 들렀다가 가도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빨간 2층 버스를 타고 드넓은 공원을 지나갔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차창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근사했다. 그렇게 타고 싶어 했던 2층 버스를 탄 아이들은 신나 하더니 곧 졸리다고 했다. 아직 자면 안 된다고 했지만 쏟아지는 잠을 어쩌랴. 아빠 옆에 앉은 둘째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버스에서 내려 다시 열심히 구글지도를 검색했다. 살짝 잠들었던 아이를 깨웠다. 비를 좀 맞기는 했지만 무사히 공연장에 도착했다.


붉은 카펫이 깔려 있는 로비에는 그동안 공연했던 작품 사진들이 깔끔하게 편집되어 벽면에 걸려 있었다. 오래된 타자기와 크리스털 유리잔들이 전시된 화장대 위에는 작은 촛불이 일렁였다. 유리로 된 장 안에는 대본과 소품들이 있었다. 제각각 다른 등받이가 설치된 기다란 벤치 의자도 멋스러웠다. 객석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의 로비 가운데에 크고 널찍한 소파가 있었다. 검은색 소파에 누군가의 얼굴이 커다랗게 프린트된 모던한 흑백 쿠션이 놓여 있었다.


무대에서는 리허설 중인 듯했다. 로비를 구경하다가 소파에 앉아서 연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둘째가 먼저 잠들었고, 곧이어 첫째마저 졸리다고 하더니 금방 잠들었다. 갤러리 같이 근사하고 고풍스러운 공간에 트레이닝 복을 입은 아이 둘이 누워 있었다. 비에 젖은 패딩을 껴입고 잠에 빠져 있었다. 다행히 공연 시간은 아니라 다른 관객들은 없었다. 소파에 누워 있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지인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 지인이 소개해주는 이들과도 인사를 나누면서 양해를 구했다. "한국에서 어제 도착했는데 아이들이 아직 시차 적응을 못했네요, 하하하..."


생전 처음 와보는 곳, 비까지 주룩주룩 내리는 날씨. 우산도 없었다. 우산이 있었대도 아이를 업고 우산을 쓰기에는 아이들이 너무 커버렸다. 숙소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택시뿐이었다. 밖에서 쓰는 돈을 아껴보겠다고 점심으로 샌드위치까지 야무지게 싸서 나왔는데, 이렇게 빨리 우버를 타게 될 줄 몰랐다. 느린 와이파이를 견뎌 어렵사리 우버를 부르는 데 성공했다. 하나씩 둘러업고 택시를 탔다. 숙소는 차도에서 내려서 걸어 들어가야 하는 위치에 있어서 아이들을 깨워 보았다. 밤잠을 깊게 자는 중인 아이들은 눈도 못 뜨고 고개를 떨구었다. 가까스로 아이 둘을 번갈아 업어가며 숙소 계단을 올라 침대에 뉘었다. 서늘했던 날씨였음에도 땀이 났다. 그러고는 어떻게 잠들었는지 모르게 나도 잠이 들었던 것 같다.


큰애가 나를 깨웠다.

"엄마, 배고파."

핸드폰을 켜보니 새벽 4시였다.


수건으로 친친 감아 이민 가방에 넣어온 소중한 전기밥솥을 꺼내 창가에 설치해 둔 멀티탭에 연결했다. 아침에 사다둔 쌀을 씻어 밥솥에 안쳤다. 감자 당근 양파를 씻어 깍둑 썰어 끓이다 카레 가루를 풀었다. 감자가 푹 무른 카레를 한 숟갈 떠서 간을 봐달라며 아이에게 건넸다. 허기진 아이는 맛있다고 빨리 밥에 얹어 달라고 재촉했다. 전기밥솥이 익숙한 목소리로 백미밥을 완성했다고 알려줬다. 밥을 푸려는데 런던 에어비앤비에 밥주걱은 없었다. 부피도 무게도 얼마 안 하는데 하나 챙길 것을. 숟가락으로 여러 번 퍼서 어서 식으라고 펼쳐줬다. 구수한 밥 냄새가 거실에 가득 찼다. 템즈강 너머로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KakaoTalk_20231103_150717207.jpg 새벽 4시에 밥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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