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들이닥친 문화 충격
내가 진학한 런던의 대학원 과정은 ‘극장과 공연 Theatre and Performance’이다. 수업의 일환으로 함께 공연이나 전시를 보는 시간도 있었다. 같이 보게 된 첫 공연은 쉿 시어터의 <에비타 투>라는 공연이었다. 소호는 펍 밖으로 맥주잔을 들고 나와 좁은 도로에 서서 마시며 떠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지러운 낙서로 뒤덮인 빨간 전화부스와 쓰레기봉지가 쌓여있는 곳을 지나 빨간색 네온사인이 빛나고 있는 소호 시어터를 찾을 수 있었다. 런던 극장들에는 대부분 술을 포함한 음료를 판매하는 바가 함께 있다. 바에서 일하는 인원도 극장에서 뽑는 걸 보면 바가 극장에 입주해 있는 형태가 아니라 극장에서 주 수입원으로 직접 운영하는 듯했다. 우리나라 공연장과 다르게 공연장 안에 음료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어 관객들은 공연 중에도 술이나 음료를 즐긴다. 공연 티켓을 예매할 때 음료나 주류를 미리 주문할 수 있도록 하는 웹사이트도 있다.
극장 건물 안에는 3개의 극장이 있었는데 각기 다른 공연이 시간차를 두고 진행되고 있었다. 바는 붐볐다. 사람들은 줄을 서서 음료를 주문했다. 안주를 먹는 사람은 없다. 교수님도 도착하시고 친구들도 속속 도착했다. 우리 공연 입장이 시작됐다. 좌석 번호를 확인하고 자리를 찾아 앉으니 내 옆옆 자리에 교수님이 앉아 계셨다. 옆에 앉은 남학생은 다른 학교에서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있는 학생이라며 서로를 소개해주셨다. 객석 안은 소란스러웠지만 아주 가까이 앉은 그와 나는 대화를 나눴다. 미국에서 왔다고 했다. 우리 반 미국아이는 말을 너무 빨리 하는데 이 아이는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는 것이 점잖게 느껴졌다. 나는 온 지 얼마 안 됐고 오늘 이 공연이 런던에 와서 처음 보는 공연이라고 말했다. 공연은 예정된 시간을 넘겼는데 시작되지 않았다. 우리 극장은 시간을 칼같이 지켰었는데 이곳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공연장에서 일하면서 여러 공연을 봤고, 다양한 장면들을 접했다. 그래서 웬만한 장면에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마술도 아니고, 무대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 봐야 거기서 거기이려니 태만한 생각으로 차 있었다. 그리고 이 공연장이나 단체의 특성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물론 예매를 하면서 공연에 대한 정보를 읽어보고 단체에 대한 기사도 읽어봤지만 익숙한 이름 에비타를 다룬다는 것뿐, 포스터의 별 다섯 개가 기대를 줄 뿐이었다. 그러나 포스터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로는, 내 스타일은 전혀 아닐 거라는 느낌이 있었다.
공연장이 가득 차고 팔걸이가 없는 벤치형 의자에 관객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았다. 강한 비트의 음악과 함께 무대에 조명이 켜지며 두 출연자가 등장했다. 둘은 완전히 나체였는데,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아주 빠르게 객석 앞까지 왔다. 내 코앞에까지 들이닥친 느낌이었다. 오색찬란한 가운을 입었지만 어떤 중요 부위도 가리지 못한 채 무용하게 펄럭였다. ‘이렇게 시작한다고?’ 방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눴던 남학생이 내가 당황한 것을 눈치챌까 봐 미동도 없이 앞만 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면 한 사람 건너 옆자리에 나이 지긋한 남자교수님이 앉아 계신데, 이런 공연이라고!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 난감했다. 더 이상 놀라운 것은 없다고 생각했던 스스로가 무색했다. 공연을 시작하고 잠시 후에 의상을 입기는 했지만 그전까지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르는 채로 당황스럽게 공연을 지켜봐야 했다. 노출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전부 다 벗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조명으로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거나 특수 효과도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건 빨간불에도 눈치껏 횡단보도를 건너는 문화 충격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늘 그랬듯이 초록불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사람들이 길을 건너 당황스러웠다. 대부분 차가 오는 쪽을 살핀 뒤 차가 보이지 않거나 서있으면 건너는 모양이었다. 나에게는 차가 오는 방향이 이들과 반대였기 때문에 무단횡단을 하기에는 일단 순발력 면에서 떨어졌다. 몇 번을 경험하고 나서 눈치껏 사람들이 건널 때 물 흐르듯 휩쓸려 건너곤 했다. 그런 눈치를 살피는 것마저 피곤할 때는 그냥 초록불을 기다리기도 한다. 이곳 보행신호는 유난히 짧은 느낌이다. 늘 길을 건너기 촉박하다. 그래서 그렇게들 신호를 무시하고 건너 다니는 것일까? 아무튼 사람들이 우르르 무단횡단을 할 때의 충격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에 비하면.
전체적인 내용은 에비타에 대한 것이었겠으나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야기를 따라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장면들이 튀어나오면서 쉴 새 없이 사람들을 웃겼다. 엉성해 보이거나 조악한 소품들도 있었고 무대 연출도 투박했지만 관객들 반응은 뜨거웠다. 더 이상 자신들을 지원해주지 않는 영국문화예술위원회를 신나게 까기도 했고 직접 아르헨티나로 취재를 다녀온 진지한 영상도 보여주었다. 그 영상 안에서 그들은 상당히 평범한 티셔츠를 입었는데 도입부의 충격이 가시지 않아 오히려 그 모습이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교수님은 학기 중에 이런 역사적인 퍼포머의 런던 전시를 볼 수 있는 것이 행운이라고 말씀하셨다. 미국 퍼포머 캐롤리 슈니먼 Carolee Schneemann의 전시였다. 미리 퍼포머에 대해, 전시에 대해 살펴봤다. 메일로 받은 자료를 열심히 번역해서 읽어보고 갔다. 공연만 보러 왔던 바비칸에서 처음으로 들러본 전시장은 멋졌다. 디스플레이도 공간 구성도 좋았다. 그러나 벗은 몸으로 뒤엉킨 남녀들의 1964년 영상을 보면서부터 피로가 몰려왔다. 한 어두운 방 안에는 그녀가 파트너와의 정사를 기록한 영상 작품이 상영되고 있었다. 그 앞에는 전시 안내원이 앉아 있었는데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도 민망하여 나는 그 영상 보기를 포기했다.
도망치듯 전시장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참으로 유교우먼이구나를 느꼈다. 벗은 몸들을 보는 것이, 은밀한 행위를 촬영하여 전시하는 것이 못내 불편했다. 거부감이 들었다. 다음날 다른 수업이 끝나고 한 중국 친구에게 "어제 전시 잘 봤어?’"라고 물었다. 그 친구는 "잘?"이라며 웃었다. "동양 애들 중에 잘 본 애는 아무도 없을걸." 나만 그렇게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니 조금 위로가 됐다.
내가 오랜 시간 사랑한 ‘공연’이라는 것은 내가 공감하며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적인 공연 중 극히 일부였다. 공연은 이토록 넓고 다양한 것이었다.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거부감이 드는 행위들도 들여다 봐야 했다. 배우는 과정이니 이런 예술가가 있었고 그녀가 미친 영향이 적지 않다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면 될 텐데 나는 이것을 예술 작품으로 받아들이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데 모두들 그 행위들을 예술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만 예술을, 공연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교수님은 전시가 왜 불편했는지 설명하라고 하셨다. 이 깊숙한 곳에서 반응하는 거부감을 표현하기엔 어휘가 턱없이 모자랐다. 예술가는 누가 정의하나요? 예술가로 인정받으면 그의 모든 행위는 예술이 되는 것인가요? 기록해 놓았다가 전시를 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작품이 되나요? 수많은 물음이 떠올랐지만 결국은 내가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묻지 않았다.
공부라는 것은 계속 나의 무지와 마주하는 일이었다. 모르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은 분명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주 더뎠기 때문인지 공부를 할수록 나는 정말 아는 게 없구나, 아무것도 모르는구나를 더 크게 깨닫게 됐다. 한국 친구라도 한 명 있으면 이건 너무 어렵지 않아? 이건 너무 다르지! 수다라도 떨며 우울감을 덜어냈을 텐데.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자유롭게 말할 수도 없다는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 더해져 나는 점점 초라해져 갔다.
과연 이 과정을 마칠 수는 있을까?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러나 이런 고민을 길게 할 사이도 없이 매일 기절하듯 잠들었다. 서울에서는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날들이 많았다. 타트체리도 마셔보고 수면을 유도한다는 약도 먹어봤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런던에 온 이후로 시차적응이 덜 된 것인지, 체력이 달려 피곤한 것인지, 문화 충격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환경과 생활이 바뀌어버린 충격에다 공연에서도 전시에서도 충격이 거듭되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