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졸업식을 앞두고 사은회가 열리는 날, 학과 교수님들을 모시고 저녁식사를 한 우리들은 졸업 후 이렇게 편안하게 모일 날이 언제 있겠냐며 대학교 근처 나이트클럽에 2차 뒤풀이를 예약했다. 마지막 학기에 임용고시 준비를 포기하고 바로 학원강사로 돈을 벌기 시작한 나는 친구들과 내내 복수전공까지 하며 버텼던 시기들에 대한 마땅한 작별인사도 못했기에 이날만큼은 미리 근무하는 학원에다 이야기해 수업을 조정하고 보강까지 마친 뒤 달려갔다. 기분 좋은 2차 뒤풀이 시간, 추지도 못하는 춤을 추며 웃고 떠들던 중 전화가 왔다.
벌써 여러 차례 찍힌 부재중 전화표시를 보고 확인하니 엄마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하니,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엄마 암 이래. 위암." 그리고는 툭 끊기는 전화. 다시 걸어보아도 연결이 되지 않는 전화기를 바라보고 난 넋이 나갔다. 갑자기 생기 없이 멍해진 내 표정에 옆에 있던 친구들도 놀라 내게 이유를 묻는데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던 나는 같이 자취방에서 생활한 친구한테만 사정을 이야기했다. 집에 가는 막차도 끊긴 시간.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친구가 다가와 술잔을 건넨다.
"옥아,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지금 할 수 없는 일이 있어. 일단 마셔. 마시고 그동안 고생한 너를 위로부터 해주자. 걱정은 내일부터 해도 돼."
이 하루를 위해 달려왔는데, 어떻게 대처할지 모를 내일이 시작된다는 암담함에 무너지던 마음이 친구가 건네는 위로로 추스러진다. 왜 하필 엄마는 이 순간까지 내가 잠시라도 친구들과 내 또래의 모습으로 즐기는 걸 보지 못하는 걸까? 원망이 쏟아져 나온다. K-장녀라는 원하지도 않고 맡기도 싫었던 직책이 태어나면서부터 내게 부여된 이후로 엄마와 아빠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이 원하는 자랑스러운 딸로 살기 위해 노력하며 사는 동안 많은 것들을 뒤로 미루고 지내야만 했다. 이런 모임에도 정말 드물게 참석하는지라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암이라는 엄청난 폭탄을 이 자리에 와 있는 내게 전화로 알리는 엄마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친구가 건네준 그 술잔을 시작으로 그동안 취업하고 일하느라 바빠서 제대로 마셔보지 못했던 술을 들이붓기 시작했다. 마셔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편이라 아무도 내가 얼마만큼을 마시고 있는지 눈치재지 못했다. 술자리가 파하고 더 놀자는 친구들을 뿌리치고 친구와 함께 살던 자취방으로 돌아온 뒤, 손발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기억까지는 나는데 그 이후로 암전이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소란한 응급실에 누워 한쪽 팔에는 링거까지 연결된 채로 누워있다. 제일 먼저 시계를 찾으니 벌써 10시가 지나있었고, 출근과 엄마소식 확인을 하기 위해 혼비백산이 되어 소지품을 찾으니 화장실에 갔던 친구가 깨어난 나를 보고 달려와 내 등을 세차게 내리치기 시작했다. 오매, 아픈 거!
"야, 너 어제 죽을 뻔했어, 미쳤어? 빈속에 그렇게 들이붓고? 너 안 그래도 위염증세까지 있다고 약까지 받았어. 대체 가서 뭘 먹고 어떻게 살았길래 이 모양이야. 몸상태가? 그럼 이게 지금 못 먹어서 부어서 찐 거야? 엉?" (지지배, 마지막 말이 그게 뭐여?)
어제 엄마 소식을 듣고 나서 제대로 폭주한 난 급성 위경련으로 응급실에 실려온 것이다. 극심한 고통으로 배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는 걸 보고 친구가 체교과 오빠들에게 연락해 나를 업고 병원까지 온 거라는데, 아... 곧 졸업이라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학교 다닐 일이 걱정이었을 내 생애 최악의 새벽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성 장애 비슷하게 일부러 기억을 지운 건 아님)
그 뒤로 나는 이렇게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 한 번도 이렇게 만취해 본 적이 없다고 자부한다. 타인 앞에서 내가 기억도 못하는 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몹시도 창피한 일이라 생각했기에 술을 마시더라도 취한다 싶으면 알아서 자리를 피한다.
그러나 이런 나의 의지력을 시험에 빠지게 한 여인이 있으니 바로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에 나오던 르네 젤위거가 연기한 브리짓이다. 엄청난 예민함으로 세상을 보고, 충동적인 감정으로 일을 벌이고, 엄청나게 술을 마시고 줄담배를 피우고 굉장히 큰 할머니 속옷을 입는 그녀지만 영화 속에서 무려 콜린 퍼스와 휴 그랜트의 사랑을 받는 그녀처럼 살고 싶었더랬다. 하지만 용기 있게 그녀처럼 행동하기엔 내가 설정한 대외적 나의 이미지와 편모슬하에서 자란 딸에 대한 사람들의 엄중한 잣대(흥, 누가 만들었는지 아주 그냥, 똑... 부러뜨리고 싶은...)가 늘 나를 향해 있다고 생각하니 내 조그만 염통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그래서 즐겨하는 일이 혼술이다. 일이 끝나고 집에 와 조촐하게 꺼내놓은 안주와 함께 마시는 맥주. 첫 모금이 식도를 타고 내려갈 때의 짜릿함. 드디어 오늘 하루가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와 함께 내 위를 적시며 나를 위로해 주는 알코올. 낮에 열심히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내게 '왜 그렇게 몸을 혹사하냐?'라고 묻는 동생에게, "맥주 마시려고 한다. 왜!"라고 대답하는 나. 이건 진심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마시던 술이 언제부턴가 늘어간다는 점이다. 350ml 캔이 간에 기별도 안 간다는 핑계로 어느새 500ml가 되어있고, 최근엔 영국산 맥주가 700ml짜리가 있어 가성비가 좋다는 이유로 그걸 찾고 조금씩 늘어가는 주량이 내 배둘레도 열심히 늘려가고 있는 거 같은 걱정이 들었다. 그러던 차 <금주 다이어리>란 책을 읽게 되었다.
클레어 풀리라는 이름난 광고회사 임직원에서 세 아이의 엄마로 전업주부가 되기로 결심한 그녀에게 찾아온 알코올중독. 제목만으로도 이 세상에 알코올은 분명 사라져야 한다고 확실하게 외치는 책이라니. 읽기 전에 고민을 했다. 감히 내게서 가장 큰 기쁨인 퇴근 후 맥주를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책이라니. 복복 서가에서 출간하는 책들이 좋아 한번에 샀다가 이런 낭패를 경험하게 될 줄이야. 제일 뒤로 미루고 미루다가 드디어 잡은 이 책을 보다 흠칫 놀라기만 수십 번이다. 나와 같은 모습들이 너무 많다.
*103일째 다음은 내가 십 대 아이들에게 권하는, 그리고 누군가 나에게 권했더라면 싶은 규칙이다. 1. 저녁 6시 이전에는 술을 마시지 말자. 2. 아주 약간이라도 통제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면 바로 잔을 내려놓자. 3. 음주 횟수는 일주일에 세 번을 넘지 말자. 4. 절대, 절대로 혼자서 술을 마시지 말자. 5. 1-4번을 지키지 못하면, 그리고 /또는 술에 관해서 스스로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도움을 청하자. (p.156)
우리나라에 고기능 알코올의존증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고기능이라 함은 일상생활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제대로 수행하고 생활하는데 아무 문제가 안 되는 이들을 뜻한다. 말술을 들이부어도 다음날 아침이면 멀쩡하게 일어나 하루를 생활하는 인조인간에 버금가는 이들, 과연 삶에서 균열이 생기지 않을까? 그만 마셔야 하는 걸 알면서도 술잔을 내려놓지 못하는 경우 나의 이런 심리적 불안감을 호소할 수 있는 가까운 이가 있는가? 주변을 먼저 둘러볼 차례이다.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서.
*158일째 우리는 우울해서 술을 마실까, 술을 마시기 때문에 우울할까?... 결국은 술과 도파민의 문제다. 우울할 때 술을 마시면 도파민이 급격히 분비되어 기분이 좋아지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되지만, 자주 마시면 뇌가 도파민 분비량을 자연스럽게 줄인다. 즉, 알코올이 없으면 우울해진다는 뜻이다.... 애초에 문제를 일으킨 것은 나쁜 친구인 알코올이다. (p.217)
이 대목에서는 브리짓 존스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빨개진 볼과 코 끝, 부은 얼굴로 한숨을 쏟아내던 얼굴이 말이다.
*248일째 나는 '고기능'알코올중독자였다. 나는 절대(음, 거의) 실수를 하거나, 경계를 늦추거나, (절대로) 팬티를 벗지 않았다. 나는 하루에 와인 한 병을 마시면서도 절대 배를 침몰시키지 않았다. 내가 축복받은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이제야 알겠다.... 그러나 삶은 때로 당신에게 레몬을 던진다. 이혼, 사별, 병든 아이, 심각한 질병, 갑자기, 난데없이, 삶의 축이 바뀌고 두 번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러면 '고기능'은 금방 '밑바닥'으로 바뀐다. (p.332)
*293일째 이 게임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은 다른 사람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절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주변 사람들의 완벽한 세계를 보면서, 수준 높은 행사와 유명한 곳에 다녀온 사진이 가득하고 좋아요와 하트 이모티콘이 군데군데 뿌려진 페이스북과 보덴화보 같은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면서,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생각하기는 너무 쉽다. 그리고 술은 그런 불만을, 실현되지 못한 가능성을, 혼자만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을 둔하게 만들어주는 위안이다. (중략)
그러므로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의 삶을 질투하는 것은 그만두고 내 삶을 살 것이다. 진정으로 살아갈 것이다. 조개 속에 들어간 모래알이 진주가 되듯이, 우리 삶의 불완전함이야말로(결국에는) 우리를 강하고 독특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불완전함을 침몰시키려고 와인을 양동이째 들이붓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녀의 처절한 맨 정신 체험기를 읽으며 내 경험과 견준다. 이토록 유머 있게 자신의 중독과 극복 과정을 이야기 한 책이 또 어디 있을까? 중간에 유방암 진단까지 받은 저자는 암투병과 함께 절주를 위한 처절한 노력을 한다. 366일의 기록들을 유쾌하게 따라 읽으며 음주가 우리 생활에 미치는 해악에 대해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내게 속삭이는 말, "조금만 마시는 건 괜찮아. 쟤처럼 안 마시잖아. 넌?"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시 책 맨 앞 장을 연다. 클레어 풀리가 쓴 첫 장.
"1부터 10 중에서, 오늘은 마이너스 5 근처 어딘가다."로 시작하는 첫 장의 첫 줄을 다시 읽는다.
연말, 연시 다양한 모임으로 지친 간에게 희망이 될 절주, 혹은 소少주를 다짐할 수 있는 책 한 권에 여러분의 바쁜 시간을 허락해 보심은 어떨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