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no Apr 24. 2024

영원회귀의 길목에서




 손 없는 날인가 보다. 동시에 두 대의 크레인이 교차하며 움직이고 있다. 4라인의 13층과 1라인의 7층 사이를 오가는 판 위에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일부분이 빠르게 비워지고 있다. 울컥 대며 토해내는 삶의 흔적들은 성급한 갈무리와 함께 서둘러 치워 지고, 이사 올 누군가가 빼곡히 서둘러 집 안을 채울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진다.



 현대인의 공동거주공간 아파트는 추억이란 이름이 스며들 틈이 보이지 않는다. 마음의 방도 때에 따라 한 번씩 거풍을 하고 재바른 손길로 비워내고 다시 정리할 수 있는 순간은 없을까? 어떤 날의 기억들과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까지 함께 꼼꼼히 포장해 오래 열어보지 않아도 되는 단단한 돌집 안으로 이사시킬 수 있으면 좋겠는데...



 저기 어디쯤, 나의 일상들이 이어지는 공간을 바라본다. 버킨 콩고의 연초록빛 잎사귀들과 작다란 화분들이 보인다. 봄을 입은 아이들이 손을 흔들고 있다. 다행이다. 오늘은 초록의 세상에 그늘이 보이지 않는다.  








 바다 건너 날아온 친구를 만났다. 오랜 지기이나 호주로 이주한 덕에 뽕나무밭이 바다가 될까 말까 고민하는 중에나 한 번씩 만날 수 있는 나의 순이. 순이와 꼭 닮은 딸과 늘 유쾌한  또 다른 지기이자 순이의 남편인 배자까지. 얼굴을 마주하고 같이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평범한 순간이 마치 꿈처럼 아득하고 다정하다. 보지 못했던 시간들의 틈은 대화 속에 묻어나는 정겨움으로 메워진다. 느릿하게 담소를 나누며 먹는 한 끼의 식사가 이렇게 소중할 줄이야. 온기가 온몸을 채운다.


 이주 초기 고생했던 날들을 이야기하는 친구들을 바라보다, 문득 나였다면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맏딸이란 무게감으로 엄마와 동생들 곁을 감히 떠나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비단잉어 코이를 보고 있으면 조바심이 생길 때가 있었다. 자라는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는데, 조그만 수조 속에 갇혀 항상 제자리를 오가는 꼬리가 나의 발끝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인 물속에서 성장을 멈춘 채 일상의 흐름을 따라 부유하는 코이인 것 같아 조바심에 발버둥 치던 밤의 고독을 친구가 달래준다. 마치 알고 있다는 듯, 나의 맘 언저리를 다독이는 환한 미소가 어린 날의 모습과 닮았다.


 마침 김준만 작가의 <빛의 사상가> 전시회 도록이 나왔다. 작가님 전시작품들 사진과 함께 내가 쓴 시가 실려 있는 책자를 친구에게 보여주었다. 평소 도록을 잘 만드시지 않는다던 분께서 자신의 작품과 함께 내가 쓴 시를 멋스럽게 편집해 주셨다.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겨보며 세상 누구보다 더 기뻐해준다. 자랑스러워하며 책을 넘기는 친구의 모습에 내 어깨가 춤을 춘다. 엄마도 하지 않는 칭찬을 친구에게서 받는다. 잘 지내고 있다, 회춘(?)했다, 빛이 난다 등등의 애교 있는 친구의 입 바른말에 배시시 미소가 나온다. 나는 팔랑귀였다. 이렇게 칭찬해 주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시고르자브종처럼 꼬리를 붕붕 돌려 풍차로 풍력발전도 일으킬 수 있는 팔랑귀가 확실하다.








 다정했던 시간이 순식간에 끝나고 친구네 가족이 떠나자 갑자기 내가 있는 공간이 텅 빈 기분이 든다. 금방 아이들이 밀려와 자리를 채우고, 또 날마다의 또 다른 사건들이 시간을 채우겠지만 잠시의 정적 사이 비워진 온기에 마음이 허해진다. 또 언제 볼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여기 남아, 낡아가는 동네를 지키고 커가는 아이들의 장기기억으로 가는 회로들에 공식을 새겨가며 동네의 표지석처럼 풍화되어 가고 있을까?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굴러간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꽃 피어난다. 존재의 세월은 영원히 흘러간다. 모든 것은 꺾이고, 모든 것은 새로이 이어진다. 존재의 동일한 집이 영원히 세워진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영원 회귀'로 반복되는 매일. 순환하는 시간에 갇힌 기분이 들 때 니체의 목소리를 듣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난쟁이에게 '순간'이라고 적혀 있는 성문과 길을 보라고 말한다. 서 있는 곳 뒤쪽의 기다란 길은 과거, 앞쪽으로 뻗어 있는 골목길은 아직 끝까지 가 본 사람이 없는 미래를 말한다.



 시간의 교차점 한가운데 내가 서 있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이들의 발자국이 새겨진 이 길을 나는 매일, 똑같이 걷고 또 걷고, 심지어 다시 태어나서 똑같은 삶의 무게를 지고 걸어야만 한다. 지치고 않고 걸을 수 있는 힘은 삶을 살아가는 이의 몫. 그가 갖고 있는 열정이리라. 열정의 독일어 단어를 살펴보면 'Liedenschaft'인데, 이 안에는 고통을 뜻하는 'Leiden'이란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 삶을 끌어가는 원동력인 열정에 필수로 포함된 핵, 고통.



 나의 영역을 지키고 보존해 가며 살아간다는 건 내게 때로는 상실의 고통을 줄 때도 있다. 놓아야 하는 인연들, 잊혀 가는 사람들, 한 번씩 느끼는 고립감과 서서히 내가 퇴화하고 있는 것만 같은 두려움들이 나를 숨을 고통스럽게 옥죄어 올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아오는 나의 하루에 새겨지는 이런 소중한 만남의 시간들로 조금은 다른 결로 회귀한 시간의 태엽을 감을 수 있어 행복해진다. 나날의 변수를 만들자.  


 순아. 다시 돌아 너를 만나는 날, 오늘보다 더 숙성한 모습으로 네 앞에 서 있을 수 있기를. 고향에 돌아와서 좋고, 가 있어서 더 좋다는 그 말을 환하게 웃으며 다시 말할 수 있는 날까지 난 여기서 나의 길을 걷고 있을게. 언제든 날아오렴. 언제든.


















* 같이 듣고 싶은 곡

수잔 잭슨 : Evergreen


https://youtu.be/i4oYyZrmVsA?si=mPkXiRcDMYM4DTZM



작가의 이전글 나날의 증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