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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Dec 17. 2024

인생의 역사

신형철








20년 후, 어린 지芝에게

                                          최 승 자


지금 네 눈빛이 닿으면 유리창은 숨을 쉰다.
지금 네가 그린 파란 물고기는 하늘 물속에서 뛰놀고
풀밭에선 네 작은 종아리가 바람에 날아다니고,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눈만 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네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때로 너는 두 팔 벌려, 환한 빗물을 받으며 미소 짓고......
이윽고 어느 날 너는 새로운 눈을 달고
세상으로 출근하리라.


많은 사람들을 너는 만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네 눈물의 외줄기 길을 타고 떠나가리라.
강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너는 네 스스로 강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


그러나 나의 몫은 이제 깊이깊이 가라앉는 일. 봐라,
저 많은 세월의 개떼들이 나를 향해 몰려오잖니. 흰 이빨과 흰 꼬리를 치켜들고
푸른 파도를 타고 달려오잖니.
물려 죽지 않기 위해, 하지만 끝내 물려 죽으면서,
나는 깊이깊이 추락해야 해.
발바닥부터 서서히 꺼져 들어가며, 참으로
연극적으로 죽어가는 게 실은 나의 사랑인 까닭에.


그리하여 21세기의 어느 하오,
거리에 비 내리듯
내 무덤에 술 내리고
나는 알지


어느 알지 못할 꿈의 어귀에서
잠시 울고 서 있을 네 모습을,
이윽고 네가 찾아 헤맬 모든 길들을,
-가다가 아름답고 슬픈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동냥바가지에 너의 소중한 은화 한 닢도
기쁘게 던져 주며
마침내 네가 이르게 될 모든 끝의


시작을!


         -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이른 새벽 버스에 오른다. 내 입김으로 흐려지는 차창에는 무수한 형상이 맺혔다 흩어진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어릿한 꿈의 조각들. 잡으려 해도 닿지 않는 날들을 응시하다 손바닥으로 창을 문지른다. 삶의 한 날도 이렇게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다면... 우리들은 어떤 모습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요양원에 있는 아버지를 보러 가는 버스 안,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것만 같다. 정신이 이미 저만큼 앞서 달려가고 있는데 몸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채 침대 위에 있는, 마치 유체이탈이란 겪어보지 못한 체험을 하고 있는 기분이다. 표현할 수 없는 절대 고독의 시간이다.



 이럴 때 한 권의 책이 수많은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되는 때가 있다. <인생의 역사>가 그렇다. 신형철 작가의 다른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정확한 사랑의 실험>, <느낌의 공동체> 등 다양한 책을 접할 때마다 해박한 지식과 깊은 사유에 감탄하곤 했는데, 이번 책 <인생의 역사>에서는 더욱 깊어진 그의 시선을 따라 다양한 시들을 만나는 순간이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어린 지芝에게"라는 최승자 시인의 시를 언급한 작가는 '사랑받지 못한'이란 말로 그녀를 명한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급진적 허무주의자의 자리에서 너무 솔직해 오히려 듣기 불편한 말을 토해낸 한 여성을, 유신시대에서 세기말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가 '정확하게 사랑하지'못했다는 뜻을 집어넣고 싶다.

             - 인생의 역사, p.65



 라고 언급한 작가의 표현을 통해 한 세대를 온몸으로 아파하며 겪어 낸 최승자 시인의 시를 다시 들여다본다.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라 노래하는 시인이 어린 지芝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어린 지芝는 누구였을까?



 어린 생명체가 처음 만나는 세계와 조응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경탄하던 시인의 마음이 혹여나의 아버지의 마음은 아니었을까? 아이가 바라보는 경이로운 세계를 노래하는 마음이, 그러나 곧이어 닥쳐 올 세상의 부조리함이 어떻게 어린 영혼을 훼손시킬지, 변화시킬지 염려하는 마음이 나의 아버지의 마음은 아니었을까?



 나는 책을 읽다 가만히 문 장 사이 갇혀버리고 만다.










 세상을 경이롭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었을 어린아이의 내면세계가 변모되는 과정을 먼저 겪어버린 시인이 느끼는 찰나의 회한과 내밀한 호흡까지  신형철 작가는 예민하게 읽어내 린다. 그의 시선을 통해 만나는 최승자 시인은 화려한 매화꽃잎을 떨구고 가지만 남은 홍매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자신에게 남은 것이 "깊이깊이 가라앉는 일"뿐이라고 말하는 30대의 젊은 시인이 "참으로 연극적으로 죽어가는 게 실은 나의 사랑"이라며 자신의 마지막 여정을 위한 오늘을 가만히 읊조리는 목소리를 소리 내어 따라 읽는다. 삶의 진실이 기쁨이 아닌 비가, 모든 이들이 비껴가기를 바라는 비가에 있음을 이 시를 통해 진솔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신형철 작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벗어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이루고 있는 언어의 연결고리들을 따라 걸어보라 말한다.


1부 고통의 각

2부 사랑의 면

3부 죽음의 점

4부 역사의 선

5부 인생의 원

6부 반복의 묘

에필로그 돌봄, 조금 먼저 사는 일에 대하여


 작가는 우리 삶의 습지의 감정들이 어떤 형태로 삶을 만들고 형태를 이루고 나를 완성하는지. 또한 그렇게 완성되는 나는 어떤 형태로 다른 이들과 조응을 하며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지를 다양한 시를 보여준다.









 나는 21세기의 어느 하오, 뿌옇게 흐려진 햇살과 쏟아지는 눈발이 한없이 가벼워 문득 소름이 돋는 날. 살아 있음이 절대 고독이고 투쟁이었을 한 남자를 바라본다.



 감은 눈은 쉼 없이 움직이며 항해 중이다. 어디로 가는지 목적지를 묻지 않아도 될 순간이지만 귓가에 대고 묻고 싶다. 가고 싶은 곳이 있는지, 그곳에서 무얼 하고 싶은지, 언젠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날지 아니면 곧 일지 모를 날들을 거쳐 나도 그곳에 갈 수 있다면 우리가 편안하게 마주 앉아 서로의 날들을 꺼내보며 웃을 수 있는지를. 사랑받지 못해 슬펐던 시인의 시를 통해, 그가 내게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꾹꾹 눌러 적는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분절되어 흐르고, 눈금과 눈금 사이 느려진 속도가 나의 눈물을 닦아 준다.

돌아서서 나오는 길,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시인의 영생을. 그 영혼의 축복을 기원하며 내가 받아들이지 못했던 또 다른 영혼의 안녕을 기원한다. 숨을 불어넣으며 가문비나무처럼 오래 서 있어 시큰한 통증이 느껴지는 무릎을 오므렸다 펴본다. 내가 갈 길은 어디인지 보이지 않아 눈앞이 하얗게 흐려진다.



 시린 빛에 감은 눈꺼풀 뒤로 또 한 번 흩어지는 잔상들. 두 손으로 눈을 누르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가방 사이 삐죽 튀어나온 책을 밀어 넣는다. 반쯤 풀린 신발끈을 다시 동여매고 허리를 편다. 발갛게 튼 볼을 감싸고 앞을 향해 걷는다. 어린 지芝가 만났을 세상의 한 귀퉁이를 향해 나는 다시 걷는다.  











* 같이 듣고 싶은 곡


브람스 교향곡 3번 3악장




https://youtu.be/VR49WCES28A?si=pe2oXuaExAlIEN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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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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