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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Dec 03. 2024

대온실수리보고서

김금희






 제가 사는 동네 한 원형로터리 옆 길가에는 특이한 구조의 집이 한 채 있습니다. 마치 엎드린 강아지가 눈과 코만 삐죽 내밀고 밖을 보는 것처럼 창문과 벽이 도로를 향해 세워져 있어요. 벽의 3분의 2 정도가 땅 속에 파묻혀 있는데, 다른 집 벽이 갖고 있는 높이가 아니라 더 그런 생각이 드는가 봅니다. 궁금했어요. 오래되어 보이는 벽을 미루어 짐작하건대 지금 흙 속에 파묻힌 정도의 높이만큼 허리가 굽어 있을 할머니가 주인일 듯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분은 어떤 삶을 살아오셨을까란 생각이 내내 맴돌았죠. 문이 열리는 걸 못 보아서 정말 주인이 살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어느 날 밤 불이 켜져 있는 걸 보았더랬죠. 건물을 두고 혼자만의 상상으로 날개를 펼치다 정말 멋진 작품으로 이런 상상을 그려낸 작가, 김금희의 신간 <대온실수리보고서>를 펼쳐듭니다.










  다만 그 주체가 건물일 뿐, 사람이 살면서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듯 건물에도 각종 신상문제가 동일하게 일어난다고. 탄생부터 죽음까지, 그러니까 설계부터 완공을 거쳐 건물로서 사는 내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다 겪는다고.
 
"어떻게 보면 사람보다 더하죠. 사람은 백 년을 살지만 건물은 그쯤은 우습게도 사니까요."
                                               - p.36 중






 강화 석모도에서 태어난 박영두란 여인이 있습니다. 석모도 헤밍웨이라 불리는 그녀는 친구 은혜의 강권으로 바위건축사무소의 문화재 공사 백서 기록담당자로 채용되죠. 창경궁의 대온실 수리를 맡게 된 건축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한 그녀는 오래전 중학교 때 자신이 머물던 창경궁 근처 원서동에 있는 낙원하숙에서의 인연을 떠올립니다. 사랑했던 순신, 문자 할머니,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던 할머니의 손녀 리사까지 말이죠. 기억은 고여있던 곳에서 흘러나와 그녀를 깨웁니다. 도망치듯 돌아간 석모도에서 고요히 흐르는 삶을 살던 그녀가 이 일을 맡음으로 다시 분주해져요. 들여다보지 못한 자신의 상처를 마주할 용기도 비로소 내게 되었죠.


 선장인 영두의 아버지는 같이 일하던 부인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뒤 더 이상 배를 몰지 못하게 됩니다. 섬을 떠나지 않으면서, 선장 일을 접은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여러 가지 막노동이었죠. 어린 영두의 진학문제를 위해 서울에서 하숙집을 하는 자신의 어머니 친구분인 문자 할머니께 영두를 의탁합니다. 어린 나이에 섬을 떠나 처음 가 본 서울에서 영두는 하숙집 운영과 일수일을 하며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문자 할머니와 만나게 되죠. 할머니는 영두에게 스케이트를 선물로 줍니다. 그걸 신고 대온실 근처 춘당지 빙판 위를 달리며 외로움을 달래며 서울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영두는 애를 씁니다. 영두를 의지하고 예뻐하는 문자 할머니와 달리 손녀 리사는 같이 다니는 학교에서도 아는 척하지 말라며 영두를 못살게 굴었죠. 차갑고 퉁명스러운 리사는 문자 할머니가 자신의 집안에 입양된 사람이고, 마치 빚을 받으러 온 사람인 듯 할머니와 하숙집 사람들에게 가시를 잔뜩 세운 고슴도치처럼 굴었죠. 그러던 중 리사와 그녀의 친구로 인해 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큰 상처를 받은 영두는 다시 섬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나를 우울증에서 구해낸 건 결국 섬에서의 시간이었다. 적어도 섬에서 나는 이상한 아이가 아니었다. 집에 틀어박혀 있다가도 나쁜 생각들이 못 견디게 우글거리면 밖으로 뛰쳐나가곤 했는데 막상 그렇게 나가보면 거기에는 내 불안과 긴장 그리고 해리 상태를 붙잡아줄 근친처럼 가깝고 친숙한 풍경들이 있었다. (중략)
 
"영두야. 아픈 건 다 나았냐?"
 섬에 소문이 어떻게 났을까 나는 잠깐 당황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주머니는 모자를 벗어서 내 머리에 씌워주며 올해가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위로했다.

 "올해 비가 어찌나 많은지 염전도 다 망했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그러면 어떡해요? 하고 조그맣게 물었다.

 "장마가 그런데 어쩔 것이야, 다음을 기다려봐야지. 그런다고 바다 소금이 어디 가버리는 것도 아니고. 사는 게 말이야, 영두야. 꼭 차 다니는 도로 같은 거라서 언젠가는 유턴이 나오게 돼. 아줌마가 요즘 운전을 배워본 게 그래."

 "유턴이요?"

 "응, 그러니까 돌아올 곳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알고 있으면 사람은 걱정이 없어. 알았지? 잘 왔다. 잘 왔어."          -p. 67 중




 그렇게 도망치듯 다시 돌아간 섬에서 그녀는 사람들의 따뜻한 위로와 아버지의 노력으로 다시 일어섭니다. 특히 강화에서 겨울을 나는 철새 흰 꼬리수리와 흰 죽지수리에 관한 책을 시의 지원을 받아 쓰게 되었고, 그 책을 통해 이 사무소에 채용되어 어린 시절이 묻어있는 창경궁의 대온실 수리과정에 참여하게 된 것이었죠. 창경궁 가보셨나요? 그곳의 대온실에는 다양한 식물들이 존재합니다. 유리창 안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햇살아래 다양한 이국의 식물들이 잎을 펼치고 몸을 부딪히며 저들만의 화음을 만들며 살아가는 공간이죠. 식물들이 뿜어낸 숨들이 달큰하고 따뜻해서 큰 숨으로 들이마시게 되는 곳이죠. 이곳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드디어 영두와 함께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도면작업을 하던 은세창이 대온실 바닥에 특이한 공간이 있는 걸 발견하게 되는데, 그곳에 놀랍게도 뼈로 추정되는 것들이 묻혀있는 걸 알게 되죠. 오래전 이곳에 있었던 동물들의 뼈인지, 사람의 뼈인지 알 수 없기에 비밀리에 건축사사무소의 동료들은 본격적인 문화재 공사가 들어가기 전 묻혀있는 존재에 대한 조사를 하려고 고군분투하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문자할머니로 알고 있던 분이 마리꼬라고 하는 대온실에서 근무했던 박목주의 딸이며 일제강점기 때 창경궁 안에 있는 동물들에 관한 동화를 써서 일본의 소년잡지에 발표도 한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어린 소녀의 시선으로 기록된 창경궁 동물원의 폐사 사건과 6.25 전쟁이 발발하며 위험에 직면한 소녀의 이야기 또한 알게 되죠. 친황의 밀서를 전달하기 위해 마리꼬와 그녀의 동생 유진을 창경궁 온실 비밀장소에 숨겨두고 길을 나섰던 아버지 박목주의 생환을 기다리며 전쟁의 포성 속 두려움에 떨고 있던 남매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결말을 알기 위해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게 됩니다. 한국 근현대사의 속도감 있는 묘사와 그 속에서 적국으로 선언된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아 일본에 있는 엄마를 그리워하는 어린 소녀의 이야기에 점점 더 몰입하게 되죠. 그들은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영두가 떠나온 낙원하숙에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지금은 굳게 닫힌 문과 상속권 문제로 소송을 벌이고 있는 리사만 남았을까요? 궁금하시죠?




  소설 속에 영두가 사랑했던 순신이란 남자아이와 나눈던 대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내가 성호를 그으며 기도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순신이 "너 성당 다니는 애였어?"하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거기서 뭘 배우냐고 다시 물었다.
 "구원에 대해 배워." 나는 성당에서 늘 들었던 단어를 답했다.

 "구원이 뭔데?"
 어려운 질문이었다. 누가 그것에 답을 할 수 있을까.
 
 "그건 수난이 그치는 거야."
 그러자 당연한 수순처럼 순신이 수난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순신에게 손바닥을 펼쳐보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얼음조각이 놓여 있다 상상해 보라고. 그러면 어떻겠어? 하고 물었다. 순신은 아주 시원할 것 같다고 해서 내 김을 빼놓았다. 나는 지금이 겨울이라 생각해 보라고 다시 조건을 달았다. 이제 더 이상 매미도 울지 않고 나뭇잎도 일렁이지 않는다고, 길이 얼어 자전거를 탈 수도 없고 옷 밖으로 몸을 내놓으면 아플 정도로 바람이 차고. 그런 겨울에 손바닥에 얼음이 있으면 손이 얼겠지, 아프고 따갑고 시렵겠지,

 그런데 얼음을 내던질 수는 없고 가만히 녹여야만 한다고 생각해 봐. 그 시간이 너무 길고 험난하게 느껴지겠지, 그런 게 수난이고 그럴 때 하는 게 기도야.
 
"그 얼음 나중에 녹아 없어지기는 하는 거지?" 순신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당연하지."
 나는 녹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답을 들을 사람이 순신이라서 힘주어 말했다.
 - p.158 중



 그리고 영두가 자신의 절친 은혜의 딸 산아와 나누는 대화도 인상적입니다.


"산아야, 더 억울해지는 건 그 억울한 일에 내가 갇혀버리는 일 같아. 갇혀서 내가 나 자신을 해치는 것."

 산아는 고개를 들고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았다. 얼굴을 적신 눈물이 어둠 속에서도 눈길처럼 반짝였다.

 "이모는 하루 마감하면서 가끔 이렇게 기도한다. 오늘 다행히 아무도 안 죽였습니다."
 산아가 어이가 없는지 약간 웃었다.

 "그럼 하나님이 칭찬하셔?"

 "침묵하시지. 기도는 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다리기 위해서 하는 거니까."
                               - p. 318 중







 김금희 작가의 소설은 공간과 시간의 정교한 플롯 속에서 다양한 인물이 스스로를 치유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문자 할머니, 영두, 산아의 친구 스미. 그리고 대온실을 기획한 후쿠다까지. 네 명의 인물이 일본과 석모도라는 섬과 원서동의 낙원하숙, 그리고 이제 영두가 복원작업에 뛰어든 창경궁 대온실이란 공간을 통해 서로 엉켜들며 한 사람의 과거에 큰 영향을 미치는 시대와 공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들죠. 실제로 20대에 출판사에 근무하며 창경궁과 창덕궁에 관한 책을
편집하기도 했던 김금희 작가는 폭우가 쏟아지던 날, 흙바닥인 이 궁이 순식간에 달라지다 비가 그치고 폭우의 엄청난 에너지가 궁 곳곳에 스며들어 사라지던 날의 이야기를 합니다. 쏜살같던 한 날의 변화가 넓게 펼쳐지면서 한 세대가 되어 우리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있죠.


 일제의 내정간섭을 통해 유폐된 왕과 그를 위로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동물원. 6.25 전쟁이 훑고 간 궁과 서울의 모습.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일재잔해 청산을 위한 여러 가지 일들 중 살아남은 창덕궁의 대온실에 얽힌 두 여인의 삶이 무려 8페이지나 되는 참고문헌 목록 사이 철저히 고증된 역사 속에 또렷하게 녹아들며 읽는 이의 마음속에서 피어납니다. 그리고 소설 속에는 정말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진심을 주지 않으므로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공문성애자 장 과장, 작도의 화신 은세창, 호기심 가득한 새를 닮은 제갈도희, 차갑기가 쏜 물 같은 단짝 은혜와 그녀의 똑똑한 딸 산아, 그리고 산아의 친구가 된 학교 폭력의 피해자 스미. 문자 할머니와 낙원하숙 사람들. 그리고 그녀의 여름날 순신까지. 이렇게 생생한 캐릭터들이 위화감 없이 조화롭게 움직이는 걸 보며 영화로 제작되어도 정말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겪게 된 한 시기를 통째로 날려버리고 덮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끌어안고 살아갈 것인가? 어떤 것이 상처를 치유하는데 빠른 길일까?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낼 때면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한 부분만을 핀셋으로 끄집어내어 보관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인간에게 그런 능력은 주어지지 않았죠. 우리는 그런 기억조차 마음의 방에 보관해 두고 용기 있는 사람이라면 진작에 끄집어내 거풍 시키며 비워내겠지만, 대부분 그렇게 닫아두고 잊어버리다 곪아버린 상처로 오래 앓기도 하죠.


 작가는 대온실수리보고서를 통해 그런 상처를 스스로 치유해 나가는 보통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용기와 노력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가죠. 결코 과잉되지 않은 잔잔한 말투로 말이죠. 그래서 더 빛나고 아름다운 책입니다. 여러분의 상처도 이렇게 꺼내고 말리고, 거풍 시키며 하나씩 수리해 갈 용기가 필요하신가요? 그렇다면 이 책과 함께 들여다보시는 시간을 가지시면 어떨까요?








* 같이 듣고 싶은 곡


로제 - Number One Girl


https://youtu.be/A9oByH9Ci24?si=raJogZaC14HoJPDv












#김금희신작

#대온실수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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