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다만 그 주체가 건물일 뿐, 사람이 살면서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듯 건물에도 각종 신상문제가 동일하게 일어난다고. 탄생부터 죽음까지, 그러니까 설계부터 완공을 거쳐 건물로서 사는 내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다 겪는다고.
"어떻게 보면 사람보다 더하죠. 사람은 백 년을 살지만 건물은 그쯤은 우습게도 사니까요."
- p.36 중
나를 우울증에서 구해낸 건 결국 섬에서의 시간이었다. 적어도 섬에서 나는 이상한 아이가 아니었다. 집에 틀어박혀 있다가도 나쁜 생각들이 못 견디게 우글거리면 밖으로 뛰쳐나가곤 했는데 막상 그렇게 나가보면 거기에는 내 불안과 긴장 그리고 해리 상태를 붙잡아줄 근친처럼 가깝고 친숙한 풍경들이 있었다. (중략)
"영두야. 아픈 건 다 나았냐?"
섬에 소문이 어떻게 났을까 나는 잠깐 당황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주머니는 모자를 벗어서 내 머리에 씌워주며 올해가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위로했다.
"올해 비가 어찌나 많은지 염전도 다 망했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그러면 어떡해요? 하고 조그맣게 물었다.
"장마가 그런데 어쩔 것이야, 다음을 기다려봐야지. 그런다고 바다 소금이 어디 가버리는 것도 아니고. 사는 게 말이야, 영두야. 꼭 차 다니는 도로 같은 거라서 언젠가는 유턴이 나오게 돼. 아줌마가 요즘 운전을 배워본 게 그래."
"유턴이요?"
"응, 그러니까 돌아올 곳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알고 있으면 사람은 걱정이 없어. 알았지? 잘 왔다. 잘 왔어." -p. 67 중
내가 성호를 그으며 기도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순신이 "너 성당 다니는 애였어?"하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거기서 뭘 배우냐고 다시 물었다.
"구원에 대해 배워." 나는 성당에서 늘 들었던 단어를 답했다.
"구원이 뭔데?"
어려운 질문이었다. 누가 그것에 답을 할 수 있을까.
"그건 수난이 그치는 거야."
그러자 당연한 수순처럼 순신이 수난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순신에게 손바닥을 펼쳐보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얼음조각이 놓여 있다 상상해 보라고. 그러면 어떻겠어? 하고 물었다. 순신은 아주 시원할 것 같다고 해서 내 김을 빼놓았다. 나는 지금이 겨울이라 생각해 보라고 다시 조건을 달았다. 이제 더 이상 매미도 울지 않고 나뭇잎도 일렁이지 않는다고, 길이 얼어 자전거를 탈 수도 없고 옷 밖으로 몸을 내놓으면 아플 정도로 바람이 차고. 그런 겨울에 손바닥에 얼음이 있으면 손이 얼겠지, 아프고 따갑고 시렵겠지,
그런데 얼음을 내던질 수는 없고 가만히 녹여야만 한다고 생각해 봐. 그 시간이 너무 길고 험난하게 느껴지겠지, 그런 게 수난이고 그럴 때 하는 게 기도야.
"그 얼음 나중에 녹아 없어지기는 하는 거지?" 순신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당연하지."
나는 녹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답을 들을 사람이 순신이라서 힘주어 말했다.
- p.158 중
"산아야, 더 억울해지는 건 그 억울한 일에 내가 갇혀버리는 일 같아. 갇혀서 내가 나 자신을 해치는 것."
산아는 고개를 들고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았다. 얼굴을 적신 눈물이 어둠 속에서도 눈길처럼 반짝였다.
"이모는 하루 마감하면서 가끔 이렇게 기도한다. 오늘 다행히 아무도 안 죽였습니다."
산아가 어이가 없는지 약간 웃었다.
"그럼 하나님이 칭찬하셔?"
"침묵하시지. 기도는 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다리기 위해서 하는 거니까."
- p. 318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