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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Nov 19. 2024

인생의 의미

토마스 힐란드 에릭센







 도시의 소음을 막기 위해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비집고 옆 자리에 앉은 젊은 여성들의 대화가 들니다.

 "잇템이라잖아. 할부로 긁었지. 근데 너무 쪼꼬매! 핸드폰에 지갑 넣고 뾱뾱이 넣으니 끝이야. X나 비싼 게."

"스티커 받으려고 케이크 시킨 건데 개 느끼해. 토 나올 거 같아."

 분명 둘이 같이 앉아 나누는 대화인데, 상호 소통이나 공감이 없는 6살 아이들의 집단독백 같은 말들에 나도 모르게 곁눈으로 그녀들을 바라보게 되었죠. 한 손에 든 핸드폰 화면을 쉴 새 없이 스크롤하며 밀고 있는 엄지손가락, 한꺼번에 여러 개를 오가고 있는 화면창. 앞에 친구를 두고도 다른 이와 문자를 통해 대화를 하고 있어요. 젊음이란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는 그녀들의 화사한 얼굴은 미소와 권태로 가득하더군요.  눈에 권태의 비율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그녀들은 모르는 삶의 권태가 백태가 되어 그들의 시야를 가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어요.


 지하철을 타고 가며 들고 있던 책 너머로 사람들의 표정을 살핍니다. 손안에 놓인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며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눈동자를 봅니다. 온전한 응시를 잊은 일방적인 추종들이 시간과 공간을 잊은 채 이어지고 있었죠. 순간 오싹해졌어요. 이 모든 각각의 표정과 말들과 행동들이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이 었어요. 저도 저들처럼 저렇게 몰입해 있을 때가 많지 않았을까란 생각이요. 의식적으로 화면을 열어 스크롤하고, 염탐하듯 열어보고, 필요하지도 않은데 주문하고, 남들 갖고 있다는 건 저도 갖고싶어하는... 욕망의 덩어리로 말이죠. 갑자기 지하철 한 칸 가득 타 있는 사람들이 모자이크 조각으로 흩어져 게 몰려들어 숨구멍을 막는 것만 어요.


 보려던 전시를 포기하고 터미널로 향했죠. 어디든 앉아 잠시라도 정적 속에 호흡을 고르고 싶었던 는 센트럴시티 호남선 대기실 가장 안쪽 코코 호두 앞 의자와 화분 사이로 숨어들었어요. 음악을 재생시키고 눈을 감고 호흡을 다스립니다. 생각나는 건 시원한 맥주 한 잔. 절실한데 여의치 않죠. 고기능알코올의존증 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선택한 금주인데 매번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하는 듯 결심이 흔들려요. 디지털 디톡스를 하듯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최소한으로 만든 채 앉아 얼마나 멍하니 있었을까요?



 심박수가 느릿한 리듬을 되찾자 가방에 든 책을 꺼냅니다. 토마스 힐란드 에릭센의 <인생의 의미>. 붕 떠버린 버스 시간표 사이 는 책을 통해 나와의 대화를 시작합니다.  










Max Foster 사진




 높다란 나무가 빼곡하게 자란 산과 그 앞에 놓인 투명하고 맑고 고요한 호수와 조그만 쪽배가 있는 표지가 눈과 마음을 동시에 진정시킵니다. 췌장암 판정을 받은 사회 인류학자인 저자가 치료 후 회복의 과정에서 삶의 의미 7가지에 대해 다양한 은유와 해박한 지식으로 쓴 책이죠. 자신의 삶이 아프기 전과 후로 달라졌다 등의 투병기가 아닌 우리 스스로가 주어진 삶을 영위하며 스스로에게 필요한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 그 필요성에 대해 부드러운 어조로 다정하게 말을 건넵니다. 




 이 책 중 가장 마음에 와닿던 네 번째 의미 <느린 시간>이란 챕터를 다시 펼쳐 읽습니다. 이 챕터는 나무로 시작합니다. 캘리포니아의 브리슬콘 파인은 므두셀라 나무라고 별칭이 붙은 나무죠. 단면의 나이테가 무려 9000개라고 합니다. 도대체 얼마의 시간을 버텨 왔을까요? 저자는 브리슬콘 소나무의 느린 성장을 시작으로 곤충학자 안네 스베르드루프튀게손의 말을 인용합니다. 바닷물 한 줌에 수십만 마리가 들어 있는 박테리아 프로클로로코커스는 전 시계 총 광합성의 5%를 담당하는데 바다의 오염으로 이 개체수가 눈에 띄게 줄고 있다고 합니다. 하찮아 보이는 작은 개체지만 사라지면 모든 종이 영향을 받는 생명의 여정을 들려주며, 세상의 그물망이 이토록 단단하고 견고하게 조성되어 우리 인간의 삶을 감싸고 있다고 말하죠. 인드라망의 생태계 버전에 감싸인 그제서야 안심하며 전철 안 사람들의 엄지손가락 아래 재빠른 스크롤에 지워지고 묻혀가는 수많은 존재들의 생몰 속도에 두렵던 마음을 달래봅니다.






세상을 계속 움직이게 하는 것은 느리고 반복적인 요소인데, 현대 사회는 불안하고 독창적이며 변화무쌍한 것에 중독되어 있다. 과열된 현대 세계는 속도에 눈이 멀어 물질적 풍요를 주된 목표로 삼기 때문에 미세한 프로클로로코커스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지나친다. 삶의 전체성과 생명의 그물망을 성찰할 때는 다른 가치관, 다른 종류의 지식, 느림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중략) 느림은 필요불가결하다. p. 164





 음식에 대한 의견 교환은 결국 삶의 의미가 살마과 사람 사이, 때로는 다른 존재와 사람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가는 흐름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뜻한다. 마오리족은 '와카파파'라는 말로써 시간의 여명기부터 먼 미래까지 이어지는 사람들의 연결고리를 묘사한다. 와카파파에서 내 존재를 느낄 수 있으면, 내면의 자아와 타인 사이의 접점, 우주의 합창단이나 지구의 태피스트리처럼 시공간을 넘어 무한히 뻗은 사슬 속에 위치한 내 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와카파파에서는 나와 공통점을 갖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지만, 시선을 높이면 공간을 가로지르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이전에 살았던 모든 존재 그리고 앞으로 살게 될 모든 존재와 나를 연결하는 무한한 실을 보게 될 것이다. p.171




 기억은 우리의 실을 뒤로 향하게 하고 상상력은 앞으로 향하게 한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과거로 향한다. 이 과정에서 공간을 거스르는 패턴을 엮어내면서 닻을 내리고, 연결을 형성하여 살아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사건들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더 많이 공유할수록 시공간적으로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한 주변 환경과의 관계는 더욱 풍성해지고 긴밀해진다. 현대사회의 문제는 온통 새로움에 중독되어 과거를 잊고 지금의 여기만 우선시한다는 것이다. 미래는 과거에 달려 있다. 미래와 과거가 연결된 경첩이 부서지면, 남는 것은 미친 듯 흘러가는 현재의 시간뿐이다. p. 177






 저자가 이야기하는 느린 시간은 단순히 쉬면서 여가를 보내라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당장 한 시간 뒤의 주식시장의 결과도 예측할 수 없게 흘러가는 급변하는 현대사회의 급류 속에서 나 자신의 좌표를 찾으라는 것이죠.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 권리와 의무가 공존하는 친밀한 <관계>를 맺는 일부터 인생에서 발생하는 <결핍>을 인정하며, 그걸 이겨 낼 <꿈>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삶의 완급을 조절할 수 있는 <느린 시간>과 삶의 지혜를 완성시키는 찰나의 <순간>에서 얻어내는 통찰,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파도타기를 할 수 있는 <균형>을 잡는 방법을 배우고 나면 마지막 <실 끊기>를 배우며 삶을 의미 있게 마무리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에 대한 이야기로 오늘을 살고 있는 나를 다독일 수 있게 죠.





 토마스 힐란드 에릭센이 만들어 준 < > 사이에서 삶의 의미를 곰곰해 보실래요? 마지막 <실 끊기>의 장까지 소란한 세상과의 창을 닫은 채 온전한 몰입으로 마음이 평온해지는 순간을 만나실 수 있을거에요. 여러분 안에서 채워지는 의미는 어떤 색과 형태일지 궁금합니다.















 
* 같이 듣고 싶은 곡

류이치 사카모토 - 메리 크리스마스. Mr. Lawrence


https://youtu.be/g8W5MeMTpmA?si=Br3H9Otml4KYbdCd





* 표지사진 출처 Pearl&Lyla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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