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부부가 있습니다. 요즘 성별에 대한 논란, 성 정체성에 대한 논란이 많으니 성별을 특정하지 않은 두 사람이 부부라고 가정해봅시다. 그리고 이 두 사람에게는 갓 태어난 아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세 사람이 된 이 가족에게는 이 때부터 새로운 업무가 생깁니다. 육아라는 성스럽고도 고되지만,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신비로운 행복감을 전해주는 일입니다.
아이를 돌보려면 항상 그 아이의 곁에 있을 사람이 한 명 필요합니다. 그런가 하면, 아이가 지낼 환경을 꾸미고 준비해야하는 사람도 한 명 필요합니다. 누군가 아이를 안고 밥을 먹이고 트림을 시키고 재우는 사이, 다른 한 사람은 청소를 하고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해야합니다. 아이가 먹은 분유통도 깨끗이 씻고 소독해야하고, 아이가 지낼 공간을 구석구석 깨끗이 청소해야하죠.
이 때 두 사람 중 누가 육아를 하고 있느냐 묻는다면, 모두가 둘 다라고 대답할 겁니다. 아이에게 밥을 먹이는 것은 육아고, 청소와 빨래는 육아가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없겠죠. 아이의 곁을 지키지 않는다고 육아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모두 아이를 위한 일이고, 각 업무에 따른 능력이나 남아있는 체력에 비교 우위가 있는 사람이 일을 나눠서 맡을 뿐입니다. 육아라는 하나의 큰 업무를 상황에 따라 분업을 한 것이죠.
그렇다면 이번에는 눈을 좀 더 넓혀봅시다. 경제학 공부를 하면 미시 경제에서 거시 경제로 나아가고, 폐쇄경제에서 수출입, 환율 등으로 차근차근 범위를 넓혀가는 것처럼요.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고, 아이가 지낼 곳을 청소하고, 그러면서 육아를 맡은 두 사람도 밥을 챙겨 먹고, 가장 중요하게는 세 사람이 모두 건강하기 위해서는 돈이 듭니다. 분유, 기저귀, 그리고 기저귀를 버리는 쓰레기 봉투를 사는 데에도 돈이 듭니다. 두 사람 중 누군가는 육아라는 업무에 따르는 비용을 구해와야합니다.
결국 한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해 집을 잠시 떠나게 됩니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두 사람의 사랑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집에는 한 사람이 남게 되고요. 집에 남은 한 사람은 아이를 먹이고 놀게 하고 재운 뒤, 청소와 빨래 등 환경을 준비하는 업무도 맡게 됩니다. 청소와 빨래에 드는 비용, 분유값, 기저귀값, 집을 유지하는 관리비 등의 비용은 집 밖으로 나간 구성원이 충당하는 사이, 집에 남은 사람은 아이의 곁에서 아이와 환경을 함께 가꾸는 업무를 맡는 셈입니다. 이 때, 앞서 누군가 던졌던 질문을 조심스럽게 던져보겠습니다. 두 사람 중 누가 육아를 하고 있는 건가요?
육아라는 업무는 많은 일을 포괄합니다. 아이의 곁을 지키고 살피는 일, 아이에게서 잠시 떨어져서 환경을 준비하는 일, 그리고 이 모든 일에 드는 비용을 벌어오는 일. 앞선 상황에서의 답변에 동의를 한 상황이라면, 같은 흐름으로 위의 두 사람에게도 같은 대답을 듣게 될 겁니다. 두 사람이 상황에 따라 분업을 한 것이며, 둘 다 육아를 하고 있는 것이라는 대답.
그런데 요즘에는 이런 상황에서 집에 있는 사람이 독박으로 육아를 하고 있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일이 육아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같은 논리로, 그 사람은 독박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서로 독박을 쓰는 두 사람이 만나면 할 일은 한 가지 뿐입니다. 누가 더 독박을 썼냐, 누가 더 힘드냐의 일이죠. 독박 육아를 맡은 사람과 독박 밥벌이를 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서로의 수고를 재고 경쟁하게 될 겁니다.
두 사람이 상황에 맞게 분업을 하고 있다고 받아들여봅시다.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사람 덕분에 밥 벌이를 하는 사람은 맘 놓고 돈을 벌어올 수 있고, 또 그 사람의 수고 덕분에 아이의 곁은 지키는 사람은 아이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 어렵지 않은 서로에 대한 존중이자 배려이며, 그 덕분에 자연스레 아이에게 가는 사랑도 커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렇듯 같은 일을 하더라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고, 우리가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 역시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