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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CHO Dec 1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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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바램

업보 시리즈를 '자폐인의 사회적 관계성을 맺는 방식의 차이' 마무리를 하였다.

이 글들을 쓰는 과정에서 우리 아이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해 (아마 그들의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가슴에 못이 박혔던 사건들이 트라우마처럼 떠올랐다. 우리 아이와 18년 동안 살면서 겪은 무수히 많은 일 들 중, 이 사건 둘을 잊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그 당시 우리가 부모로서 느꼈던 불쾌감이 상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불쾌감이 아니라 좌절감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업보 시리즈의 뱀발이지만, 그때 이야기를 여기에 풀어놓으려고 한다.  이유는 '당신 때문에 내가 이렇게 힘들었다!' 원망을 하기 위함이 아니다.  상황을 공유함으로써,  글을 읽는 분들 중 분명 우리아이같은 아이를 만났을 때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을지 몰라 당황한 적이 있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자폐 아동은 이제 우리 주변에서 찾기 힘든 존재들이 아니므로. 그럴 때 ‘이렇게 행동하시면 된다’는 가이드라인을 드리기 위함이다.

장애가 특권이냐'라고 묻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랬었기에 이해한다. 특혜를 달라는 것이 아니라, 눈높이를 맞춰 달라는  엄마의 개인적인 부탁 정도로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다행히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배려를 받으며 살고 있지만,  많은 자폐인들이 사회에서 배려를 받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모쪼록  경험이 일반인들이 자폐인과 함께 어울려   있는 작은 팁으로 기능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공정이란 무엇이며, 정의란 무엇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equality가 아닌 Equity이다. 출처: https://achievebrowncounty.org/wp-con


동네 어린이 도서관에서의 일화, 하나


남편이 겪은 일이다.

울 호야가 초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한다. 보통 이 또래의 아이들은 그림보다는 글밥이 제법 되는 챕터북을 읽는다. 우리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그림책을 보는 시기인 유아 때에도 그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글자에 집착을 했고, 특히나 한글 읽는 데 재미를 들여서 무슨 내용인지 이해도 제대로 못한 채 글만 읽었었다. 그러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뒤늦게 그림책 보는 재미에 빠졌다. 고등학생인 지금도 그림책은 여전히 좋아하는데, 초등학교 2-3학년 시기에는 더더욱 그랬었다.


학교 부근에 새로 지은 어린이 도서관에 아이를 데리고 자주 책을 보러 갔었는데, 이 부근 아파트에 한인들이 제법 많이 살아서 이 도서관에서 한국 아이들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물론 그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 역시도 많았었고.


그날도 아이는 미취학 아동들이 주로 보는 그림책을 쌓아놓고 보고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본 한 한국 엄마가 우리 아이에게 한 마디를 했다.

다 큰 형아가 아직도 이런 그림책을 보니?

지금 같았으면 '우리 애가 무슨 책을 보든, 댁이 무슨 상관이냐'라고 했었을 텐데, 하필 이때 아들 옆에 남편이 있었고, 설령 내가 있었다 해도 이렇게 대차게 반응하진 못했을 것이다.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남편은 급하게 짐을 챙겨 아이를 데리고 도서관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나에게 말했다.

우리 애를 데리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죽어도 여기서 죽겠노라고.




교회 한글학교에서의 에피소드, 둘


아이가 사회성이 부족해 눈치 없이 행동하는지라 어디든 아이를 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이 다 가는 한글학교도 괜히 보냈다가 민폐만 끼칠까 싶어 못 보내고 있었는데, 친한 친구가 자기가 일하는 한글학교에 등록시켜 보면 어떻겠냐고 권했다. 마침 자기가 가르치는 학년이 호야 나이라서 아마 자신이 가르치게 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한 번 등록시켜 보라기에 이 친구를 믿고 일주일에 한 번씩 가는 한글학교 과정에 등록을 했다.

아이는 보낸 지 딱 6주 만에 읽고, 쓰기를 한꺼번에 해 버렸고, 진심으로 한글학교 가는 것을 좋아했다. 시키지 않아도 숙제도 알아서 꼬박꼬박 잘해 친구인 한글학교 선생님이 칭찬을 해 주니 그게 너무 좋았는지 아이는 칭찬을 받으려고 더 기를 쓰고 열심히 한글 공부를 했다.


그러던 중 이 친구가 이사를 가게 되어 더 이상 이 한글학교에서 일하지 않게 되었고, 이 교회에는 우리 아들이 갈 마땅한 레벨의 클래스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한글학교로 아이를 등록시키러 아이와 함께 갔다. 줄이 제법 길어서, 꽤 오랜 기간 동안 우리 차례를 기다리며 서 있었는데, 이 날 등록 질서 유지를 맡은 한국 여자분이 지나갔다. 그분에게 우리 아들이 아무 망설임 없이 다가가 물었다.

이모, 우리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요?


우리 아들의 질문에 대한 이 분의 답이 압권이다.


어머, 내가 왜 니 이모니?? 너 나 아니??


우리 아들이 HTe로 전학 가기 전 학교에는 한국 아이들이 정말 많았고, 이 친구들의 엄마들을 모두 'XX 이모'로 불렀다. 아마도 아이는 한국 아줌마들은 모두 다 '이모'로 불러야 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 여자분 입장에서는 어린아이가 갑자기 불쑥 들이대니 놀랐을 것이다. 불쾌했지만 처음엔 그분을 이해해 보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쾌함은 여전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아이를 등록하려고 하는 우리가 '을'의 관계니 참자'고 다짐했다. 우리 아이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한글학교에 보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불쾌감은 가시지 않았고, 스텝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자세로 볼 때, 설령 여기에 등록한다 한들 얼마 못 다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아이 손을 잡고 한글학교에서 나와버렸다. 그리고 그날 그 여자분의 저 두 문장은 내 머릿속에서 화인처럼 각인되었다.


이 일들이 벌어졌을 때 호야는 어렸기 때문에, 그 당시 호야의 기분이 어땠는지 나는 정확하게는 모른다. 다만 짐작만 할 뿐이다. 아이는 '눈치(Socail Cue)'는 없지만 대신 타인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귀신같이 알아챈다. 배제의 언어는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는데다 기억력까지 비상한 녀석이라 이 사건들을 기억하고 있을 것 같지만, 그 기억을 꺼내기에는 나나 남편이나 너무 마음이 아파 아이에게 차마 묻지 못하고 있다. 대신 나는 이 사건들을 계속 되짚으며 나는 어떻게 해야 했었나..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나는 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했었는지,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했었는지조차도 한동안 몰랐다.


지금은 그 답을 안다. 두 번의 경우 모두 다 나는 엄마로서 당황하지 말고, 속상해하지도 말고, 우리 아이를 방어해야 했었다.

첫 번째 같은 경우에는 '댁하고 상관없는 일이니 우리 애가 무슨 책을 읽든 가던 길 가시라'고 쌈닭처럼 반응해야 했었고, 두 번째 사건 같은 경우는 '아니, 다른 곳도 아니고 애들 상대로 교육을 한다는 학교에서 애가 궁금하면 물어볼 수도 있지, 뭘 그렇게 예민하게 나오냐, 한국 아이들이 아줌마들한테 '이모'라고 부를 수 있는 거 모르냐'라고 반박했었어야 했다.


그 당시에 나는 우리 스스로를 죄인처럼 여겼던 것 같다. 아이가 자폐 성향을 가진 것은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님에도 말이다. 당연한 이 사실이 한인들이 모인 자리에만 가면 내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모든 모임이 불편했고, 그렇게 우리는 점점 한인 사회에 발길을 끊게 되었다. 심지어 종교 모임까지 끊었다.


우리의 이런 죄의식이 점점 치유된 것은 학교를 옮기면서부터였다.

한인들은 물론 아시안들조차도 보기 힘든 곳이 우리 학교다.

전학 오기 전, 실은 아시안들도 불편했다. 우리 아이의 행동에 대해 가장 경멸적인 눈빛을 보내는 아이들은 한인들이 아니었다. 일본 아이들이었다. 중국 아이들이나 인도 아이들은 그보다는 나았지만 딱히 아이를 끼워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무관심했다. 아시안이 없는 환경. 이것이 우리에게는 더 낫다고 그때 알았다.

거의 절반이 백인과 멕시칸으로 구성된 곳이 우리 학교다. 흑인들도 제법 있지만, 아시안은 절대적으로 소수다. 일부러 이런 학교를 찾아간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환경이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다.

물론 그들 모두가 다 우리 아이에게 진심으로 대했다고는 볼 수 없다. 형식적인 친절을 보이는 이들도 많았지만,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더 정확하게 아이가 고등학교에 올라와 만난 선생님들과 스텝들, 그리고 학부모들의 태도를 통해 우리 가족은 점차 치유가 되었다.

일단 우리는  아이들의 실수에 대해 그들의 너그러운 자세와 포용에 대해 감탄했다. 그들은 호야의 이해 못 할 행동에 대해서 '그럴 수도 있지'라는 여유 있는 태도를 보여 주었다. 오히려 내가 안절부절못하면 그들이 나를 위로하며 괜찮다고, 그러면서 우리 모두 배우는 거라고 다독인다. 아이가 심지어 하면 안 되는 행동을 해서 학교에서 나에게 리포트가 올 때도 있었다. 너무 속상한 나머지 선생님들이나 스텝들 앞에서 눈물을 보일 때도 그들은 옆에 있어주었다. 펑펑 울 수 있게 옆에서 배려해주고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물론 위로였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이를 어떻게든 훈육해야 했는데, 그럴 때마다 선생님들은 함께 고민해 주고, 방법을 제시하고, 때때로 중간 상황을 체크했다. 사실 이것이 나와 호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미국인들이 아이들을 무조건 포용하거나 너그럽게만 키우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것은 '방임'이다. 아이의 잘못에 대해 만회할 기회를 주고, 그럼에도 바뀌지 않을 경우 이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제제를 가한다. 이런 부모들 밑에서 커서 그런 것일까. 나는 때때로 예의 바르고, 책임감 있으며, 솔선수범하는 우리 아이들 친구들에 대해 자주 감탄한다.


우리는 흔히 '실수를 통해 배운다'라고 이야기한다. 허나 정작 아이는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 부모는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는 모른다. 나 포함해 많은 부모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 아닐까. 나는 이것을 우리 아이들 학교 선생님을 통해 배웠다. 그러면서 부모로서 내 역할에 대해 자신감을 회복했다. 자존감 또한 생겼다. 이제는 우리 아이들을 부당하게 대하는 이들에게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용기가 있다. 우리 아이들의 엄마로서 품위를 잃지 않고 당당하게. 그러면서도 정확하게.


Be Nice, Specific, and Helpful


이 글의 제목이다.

이 세 개의 형용사는 호야 학교 선생님들이 호야에 대해 프레젠테이션하며 친구들에게 호야를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지 그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다. 또한 내가

엄마로서 지양하는 태도이다.


나는 이 세 형용사가 비단 우리 아이에게만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아이를 포함해 아이들의 실수에 대해 사회가 좀 더 너그러웠으면 좋겠다. 유독 실수가 잦은 아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아이들의 실수에 대해 비난하기보다, 아이들이 이를 통해 무엇인가 배울 것이라는 신뢰의 눈빛을 보냈으면 좋겠다. 나에게 딱히 피해가 가는 것이 아니라면, 때때로 너그럽게 넘어가 주는 것도 하나의 예의다. 설령 모르는 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2022년 12월 14일

E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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