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목적지, 런던
그전부터 호야가 가장 가고 싶은 곳을 물어보면 제일 일 순위로 꼽았던 곳은 바로 런던이었다. 그곳에는 런던 버스가 있기 때문이다. 버스와 기차, 비행기를 좋아하는 호야에게 새빨간 2층 버스는 분명 눈을 뗄 수 없는 매력적인 대상이었을게다. 호야는 레고에서 런던 버스가 출시된 것을 알자마자 이 세트를 사고 싶어 안달이었다. 이 레고 세트를 사고 나서는 좋기는 무척 좋았었나 보다. 생전 롤 플레이라고는 모르던 녀석인데, 이 레고 버스는 다 만들고 나서 비디오까지 찍어두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LeMiUiB484
그렇다.
호야는 런던이라는 도시를 레고로 먼저 알았다.
스스로 관심 가는 것 아니면 아예 무관심한 자폐아이들의 특성상, 아무리 호야에게 런던이 여기고, 파리가 저기고.. 이야기해 줘 봐야 내 입만 아플 것은 뻔했다. 그래서 2015년에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유럽 여행을 갈 때 아이들은 한국에 있는 시부모님과 친정 엄마께 맡기고 우리 부부만 다녀왔다.
아이들은 한국에서 즐겁게 지냈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는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 아침마다 두 녀석이 서로 부둥켜 앉고 엄빠를 보고 싶다며 눈물을 찔끔댔었단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니 아이들은 '왜 자기들은 안 데려갔냐'며 아우성을 쳤는데, 그때 호야는 엄빠가 다녀온 곳, '런던'에 대해 처음 인식한 듯 보인다.
그 후로 런던과 관련된 레고 상품들을 하나씩 모았다. 런던 버스, 호그와트 익스프레스 기차와 버스, 그리고 빅벤까지 샀다. 타워브리지 세트를 엄청 갖고 싶어 했는데, 막상 사주려고 마음먹었을 때에는 단종되어 못 사주어 안타까웠던 기억이 난다.
호야에게 런던은 자기가 레고로 경험한 것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유독 런던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이런 호야의 바람을 이루어 주러 2019년 봄방학 때 런던 가는 티켓 네 장을 끊었는데, 안타깝게도 코로나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취소해야만 했다. 계획된 여행이 취소되고 나니 호야가 런던에 가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간절해졌다. 그래서 호야는 이번 여행에서 런던 방문을 더더욱 손꼽아 기다렸다.
툴루즈에서 스텐스테드 공항까지 가는 RK282편은 밤 10시 45분에 출발해 약 1시간 반 후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라이언 항공이 저가 항공이므로 이런저런 명목으로 뜯어가는 운임들이 많다고 해서 상당히 걱정이 많았는데, 생각보다는 수월하게 넘어갔다. 아예 티켓을 살 때, 20kg까지 부치는 수하물이 포함된 요금으로 샀던 것이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20Kg이 넘으면 안 되기에 저울로 재 보고 싶었으나, 툴루즈 블랴냑 공항에서 이 저울을 쓰려면 유로화 동전이 필요했다. 파리에서 모든 결제는 카드로 했기에 환전한 유로화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감에 의존해 짐을 부쳤다. 다행히 짐 두 개 중 더 무거운 가방은 19.6kg이었다.
라이언 항공에서 인력 부족으로 항공기 수급에 차질이 있다고 낮에 연락이 왔었는데, 그로 인해 우리의 항공편도 1시간 딜레이 되었다. 라이언 항공 체크인 카운터가 8시에나 오픈이 되었기에 미리 들어가 라운지에서 시간을 보낼 여유도 없었지만, 딜레이 된 김에 보세 구역에서 저녁으로 샌드위치도 사 먹고 면세점에서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우리 일정은 그 후로는 더 딜레이 되지 않아 11시 반에 라이언 항공 282편에 탑승했다. 툴루즈 공항에서 출발하는 마지막 비행기였다.
결국 자정을 넘어 도착한 스텐스테드 공항에는 사람들로 버글거렸다. 출국장으로 나오니 공항 바닥에 누워 자는 사람들로 그득했다. 잠시나마 그들의 젊음이 부러웠다. 사람이 많으니 내셔널 익스프레스 버스 타는 곳 찾기도 수월했다. 7월 19일 토요일 새벽 2시 넘어 숙소인 Hyatt Regency London Albert Embankment에 짐을 풀었다.
엄마, 우리 빨리 나가요! 빨리! 빨리!!
새벽 3시 넘어 들어왔으니 오전 내내 잘 것이라 예상했던 호야는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다. 아침도 나가서 먹고 어서 준비해서 나가잔다. 우리가 묵은 호텔은 Lambeth 지역의 템즈 강변에 있는 호텔로 호텔 바로 앞에서 버스를 탈 수 있었지만, 일단 오늘은 최대한 많이 걸어보기로 했다.
호야랑 웨스트 민스터까지 갈 요량으로 램베스 다리를 지나 웨스트민스터 다리까지 걸어갔다. 가는 길에 쉬기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공원이 플로렌스나이팅게일 가든이었다. 이 공원 벽 너머가 세인트 토마스 병원이다. 이 병원과 웨스트민스터 다리가 만나는 지점에 코로나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The National Covid Memorial Wall이 수 천, 수 만개의 빨간 하트들로 조성되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로 희생되었을까.. 하트 수 만으로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꽃이 헌화된 곳에 잠시 서서 희생자들의 평화를 빌었다. 그리고 그 힘든 시기를 건강하게 잘 넘기고 이렇게 여행까지 올 수 있음을 감사드렸다. 그러고는 웨스트민스터 다리로 올라갔다.
그동안 호젓하게 템즈 강변을 걸을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다리 위로 올라가니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관광객들로 엄청 북적였으며, 인파는 빅벤 주변에 가자 절정에 이르러서 오가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빅벤이 가까이에 있었다. 호야는 파리에서 에펠탑을 보았을 때처럼 눈을 반짝이며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이곳에 오래 있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잘못했다가는 호야를 잃어버릴 거 같아 트라팔가 광장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었다. 호텔에서 트라팔가 광장까지는 약 1.4마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엄청난 인파 때문에 꽤 오랫동안 걸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The National Gallery로 들어가고 싶었다. 날씨도 덥고 걷느라 힘도 들었다. 일단 이 부근에서 점심을 먹으며 재충전을 한 호야는 버스 투어를 하자고 했다. 런던 버스를 실컷 타고 싶다는 뜻이었다. 예전처럼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오이스터 카드를 따로 살 필요 없이 Contactless 신용 카드만 있으면 버스 탑승이 가능했다. 호야의 뜻대로 하기로 했다.
런던 버스가 2층짜리라 2층으로 올라가니 Hop-and-Hop-Off 버스 투어를 하는 거랑 큰 차이가 없었다. 이미 나는 2015년에 왔을 때 버스 투어를 했기 때문에 이 투어를 또 할 생각이 없었다. 대신 호야랑 런던 버스를 실컷 타고 다니면서 원하는 곳에서 내리고, 또 타고 이러기를 반복하면서 런던을 즐겼다.
런던 버스도 에어컨은 작동하지 않았지만 윗 창문은 열 수 있었는데, 그 사이로 바람이 제법 시원하게 들어왔다. 이 정도면 버스 타고 런던을 도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우리가 탔던 버스는 마침 리젠트 길을 따라 매우 느리긴 했지만 움직이긴 했다. 워낙 트래픽이 심해서 속도를 높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소호 쪽으로 가서 리버티 백화점을 들러 원단 쇼핑을 했다. 여기서 사온 원단을 나중에 한국으로 가져가 이불홑청과 딸아이 한복 저고리로 만들어 올 것이다. 원단 가격은 예상대로 싸지는 않았지만 세일 중인 상품 중에 마음에 드는 원단이 다행히 있어 그나마 좀 싸게 사 올 수 있었다. 내가 원단 쇼핑을 하는 동안 잘 기다려 준 아들이 고마워서 같이 애프터눈 티타임을 가질 여량으로 리버티 백화점 2층 카페테리아로 들어갔다. 50파운드로 시작하는, 제법 가격대가 높은 애프터눈 티세트였지만 저녁 대신 먹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아들에게 물어보았다가 그 자리에서 거절당했다. 끙... 아들 핑계로 애프터눈 티를 마시는 사치를 부려 보려 했더니만, 그마저도 아들이 협조를 안 해서 실패.
저녁을 호텔 부근에서 먹으려고 했었으나 막상 돌아오니 갈 데가 마땅치 않다. 마침 호텔 앞 강가에 선상 클럽이 있어 아들이랑 함께 갔다. 아마 세상에 아들이랑 함께 저녁 먹으러 클럽 가는 엄마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싶다..
다들 여러 명이 그룹으로 담소를 나누거나, 암수 한 쌍이 정겹게 앉아 데이트를 하는 중이었는데, 그 속을 아들이랑 비집고 들어가 피자와 내가 마실 맥주 한 잔을 샀다. 클럽 분위기는 살짜쿵 뻘쭘했지만, 해지는 템즈강은 너무 아름다웠다.
이렇게 레고 속 세상의 실사판, 런던에서 보낸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