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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CHO Oct 09. 2024

페리 타고 도버 해협 건넌다고? 드디어 여행 마지막 날

일곱 번째 목적지, 브뤼셀에서.

우리가 브뤼셀 북역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 반이 다 되어서였다. 원래 도착 예정시간보다 2시간이나 더 걸려 여기까지 오는데 12시간이 걸렸지만, 잠시나마 섬에 갇힌다는 것이 얼마나 숨 막히는 것인지 경험한 내 입장에서는 일단 탈출했다는 안도감이 컸다. 드디어 왔구나!

오랜 시간 동안 운전하며 여기까지 무사히 데려다준 기사 아저씨가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국제 여객선은 처음 타보는 것이었는데, 국제선 타는 것과 절차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기사 아저씨가 항공기에서 파일럿과 스튜어드 역할을 동시에 하는 것 같았다. 체크인 포인트에서 승선 인원을 보고하고, 여권을 모두 수거해 간 후, 출국 심사 카운터에서 한 명씩 출국 심사를 한 후 스탬프를 찍었다. 그리고 다시 버스에 타면 차량 종류에 따라온 순서대로 차를 댄다. 기사는 약 1시간 반 정도 항구에서 대기해야 하니 내려서 자유 시간을 가지란다. 배가 고팠던 호야는 이곳 휴게소에 입점한 버거킹에서 와퍼 세트 하나를 먹어치웠다. 나는 입맛이 없어 버거킹 옆 Costa Coffee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했다가 지옥의 맛을 맛보았다.

 

도버 항구에 도착한 우리(왼쪽) 버스 타고 배타러 가는 중(오른쪽).

버스에 다시 탑승해 주차한 순서대로 배에 승선했다. 배에 버스가 정차한 후, 승객들은 모두 내려 선상으로 올라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페리 안내도

도버 해협을 건너 칼레까지 약 1시간 반 정도 소요되는 이 페리는 아주 호화로운 편은 아니었지만, 편의 시설들은 다 갖추고 있었다. 사람들은 식당가에서 식사를 하거나, 면세점에서 쇼핑도 했다. 누워서 쉬는 사람들도 제법 많았다.  

Lower Deck에 있는 식당가
Lower Deck에 있는 면세점. 종류가 다양하지는 않았다.


Upper Deck에서 있어도 되는 줄 알고 올라갔다가 건진 도버 해협 출발 사진. 사실 이곳은 운행 승무원들이 쉴 수 있도록 제공된 라운지이다.
저 멀리 육지가 보인다. 저 곳이 칼레항이구나!

영화 '덩케르크'에서 보여준 것처럼, 단 한 명의 목숨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개인 요트까지 동원되었던 이 바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과 절망과 사투를 벌였을 이 바다는 더할 나위 없이 잔잔하고 아름다웠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씨가 영국에 대한 나의 마지막 인상이라니.. 2015년 그날, 나는 남편은 미국으로, 나는 아이들을 데리러 한국행 비행기를 탔어야 했다. 남편과 내 비행기 스케줄이 꽤 차이가 나 남편을 먼저 공항에서 배웅하고 공항 철도를 타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오던 중, 그날도 날씨가 너무 좋아 기차에서 내려버렸다. 지금도 어딘지 모르는 런던 외곽의 작은 소도시였던 그곳은 너무 아름다웠다. 꽃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주택가. 그곳을 정처 없이 걸었던 그 기억이 바로 내가 가진 2015년 런던 여행의 마지막 기억이다. 그때, 그날처럼 오늘도 너무 아름다웠다.  

 

새벽 1시 반이 되어서야 숙소인 Hotel Indigo Brussels에 도착했다. 호텔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긴장이 풀려 맥이 탁 풀렸다.

승선할 때처럼 하산할 때도 다시 입국 수속을 밟아야 하지 않을까 예상했으나 버스는 그런 내 예상과는 달리 앞으로 앞으로 계속 달렸다. 기사 아저씨는 그동안 밀린 시간을 만회할 요량이었는지 엄청 밟았다. 우리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프랑스에서 한 번 정차한 이 버스는 곧 벨기에로 들어갔고, 곧 우리의 12시간에 걸린 대장정은 끝났다.

아마 다시는 겪게 되지 않을 경험일 것이다. 하지만 호야랑 아마 이 날 이때의 경험은 죽을 때까지 이야기하게 될 것 같다. 이렇게 또 하나, 영국에서 행복 포인트를 쌓는다. 아, 맞다. 새벽 1시 반에 아들을 의지해 벨기에 북역에서 우리가 묵을 Hotel Indigo까지 걸어간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다음 날 아침, 이 날이 아마 이 여행에서 마지막으로 관광을 할 수 있는 날이었다. 내일 아침에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기에 호야와 내가 브뤼셀을 오늘 하루 알차게 보내야만 했다.


호야랑 아침을 먹고 나서 브뤼셀 다운타운을 걸었다. 오늘이 이 여행의 마지막 날, 그리고 브뤼셀에서의 단 하루였기에 나는 걷고 또 걸을 생각이었으나, 호야가 힘들어했다. 아들을 호텔에 데려다주고 쉬라고 하고는 나 혼자 다시 나왔다.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브뤼셀은 너무 아름다웠다.



아침 먹으러 가는 중.

브뤼셀도 너무 아름다운 곳이다. 무엇보다 빅토르 위고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불렀다던 그랑 플라스가 있다. 그 외에도 걷다 보면 아름다운 건물들이 마구 튀어나온다. 사실 이곳에서 본 홈리스들이 제일 매운맛이었고 수위가 셌다. 그럼에도 도시는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규모도 크지 않아 걷기에도 너무 좋았다.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며 걷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그랑 플라스에 도착해 있었다. 

그랑 플라스 초입에서.


브뤼셀 시내 스케치. 

브뤼셀은 보통 여행 중에 스쳐 지나가는 경유지로 많이 들른다고 한다. 나도 같은 이유로 브뤼셀로 왔다. 내일 뉴욕으로 가는 비즈니스 좌석이 있었기에 브뤼셀을 이번 여행 목적지로 넣었다. 목적지는 목적지이되, 경유지 같은 목적지랄까? 암튼 별 기대 없이 일정에 넣은 곳이었는데, 호야에게는 이곳이 독일만큼이나 좋았다고 한다 독일에서 유명한 소시지만큼이나 호야가 좋아하는 메뉴가 감자튀김이다. 심지어 브뤼셀에는 감튀 자판기가 있다는 말에 호야는 더더욱 브뤼셀을 기대했다. 나는 호야랑 벨기에에서 먹을 음식들 리스트를 만들었다. 제일 위에는 역시 호야의 최애 음식인 감튀가 있었고, 와플, 나는 맥주, 그리고 홍합요리를 꼭 먹고 가겠다 다짐했다.

브뤼셀에서 먹은 아침은 실패였으나, 점심(왼쪽/위)과 저녁(아래)은 성공했다.

그랑 플라스 쪽으로 와서 예술가의 언덕 쪽으로 올라갔다. 사람들이 삼삼 오오 짝을 지어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바람도 시원하고 주위 가드닝이 너무 잘 되어 있어서 잠시 앉아 있다 가기 참 좋은 곳이었다.


아마 이번 여행은 우리에게 있어 이렇게 잠시 쉬었다 가는 의미였던 거 같다. 약 2주 동안 서울에서 마지막 여행지인 이곳, 브뤼셀까지 별 일들이 많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별 탈 없이 일정에 맞춰 여기 내가 앉아 있다는 것이다. 일반인 기준으로 보면 나는 잘 안 우는 사람인데, 19년 동안 남과는 다른 아이 키우느라 울기도 많이 울었고, 가슴 치기도 참 많이 했었다. '어쩜 지금이 우리 인생에서 최악의 순간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다. 어떻게 하면 지금 이 힘든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아니, 벗어나는 것이 대체 가능하긴 한 것일까?라는 의심도 했다. 독실한 종교인인 친정 엄마는 나에게 다시 종교를 가지라고 말씀하셨지만, 이미 그 종교인 사이에서 상처받은 나는 그들 틈으로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였다. 내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버텨 내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지인들을 떠나버린 그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이 손을 먼저 내밀어 주었고, 우리는 한참을 망설이고 난 후에야 그들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이렇게 손 내미는 사람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다 보니, 어느새 Team Hoya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들의 지원과 조언으로 절대 안 풀릴 것 같던 문제의 답을 하나씩 찾아갔고, 그 결과 적어도 우리 스스로 '이 정도면 괜찮아'라는 수준으로는 아이를 키워냈다. 이 여행은 앞으로 가야 할 길도 멀고 험하지만 서로 의지하면서 버텨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주는 동시에, 잠시 쉬었다가 가라는 꿀맛 같은 휴식이었다. 그런 여행의 마지막이 초콜릿의 나라 벨기에라니!


우리 여행의 마지막 날이 점점 저물고 있었다. 여행을 마감하기 전, 호야랑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그랑 플라스 주변 식당은 왁자지껏 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홍합 요리를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호야는 런던이랑 파리, 그리고 방콕이 제일 좋았다고 했다. 그리고 툴루즈도 좋았다고 덧붙였다. 파리의 에펠탑이랑 런던의 빅벤이 너무 좋았단다. 음식은 파리에서 먹은 피자랑 빅맥, 그리고 브뤼셀의 감자튀김이 제일 맛있었으며, 가장 잊지 못할 경험으로는 발마사지를 꼽았다.


이 정도면 많은 대화를 한 축에 속한다. 보통은 내 질문에 대답 자체를 워낙 안 하는 아이니 뭐..


남편은 그랑 플라스의 야경을 꼭 보고 와야 한다며 성화였다. 예전에 '비정상회담'에서 벨기에 대표 줄리안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마켓이 바로 브뤼셀에 있다고 소개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그랑 플라스의 마켓이 아닐까 싶었다. 낮에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야경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게다가 여기에서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면, 그전에 우리가 경험했던 베를린, 라이프치히의 크리스마켓이랑은 또 다른 멋이 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에 언제 여기에 올 지는 모르니, 여기서 야경이라도 보고 가야겠다 싶어 이 부근에서 죽치기로 했다. 저녁이 되자 꽤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그랑 플라스의 야경을 기다리는 사람들이겠지? 


저녁때가 된 그랑 플라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랑 플라스는 밤이 깊어가도 우리에게 그 멋지다는 야경을 끝끝내 보여주지 않았다. 10시쯤이 돼서 광장 부근에 불이 들어오긴 하는지 물어보려고 초콜릿 가게에 들어가 초콜릿을 사며 직원에게 슬쩍 물어보았더니, 불이 들어오는 날이 있고, 그렇지 않은 날이 있단다. 근데 언제 불이 들어오는지는 자기들도 모른다고.ㅠ


맘 같아서는 12시까지 기다리고 싶었지만 우리는 내일 아침 일찍 공항으로 가야 했다. 이 여행은 이렇게 아쉬움으로 마무리해야만 했다. 결국 10시 반 경 호야랑 나는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까지 아들과 데이트하는 기분이 퍽 근사했다. 이 맛에 아들이랑 여행 다니는구나 싶다. 호야도 다음에 꼭 다시 RTW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나도 또 오고 싶다. 단, 그때는 우리 식구 다 같이 함께 갈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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