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CHO Oct 15. 2024

BRU-JFK SN501 희망과 숙제를 품고 일상으로

집으로 가는 길

다음 날인 7월 22일, 한국에서 체류한 기간 포함 약 1달간의 여행을 마치고 드디어 집으로 가는 날이다. 10시 35분에 출발하는 브뤼셀 항공을 타고 뉴욕 경유해 샌디에고로 간다. 드디어 집으로 가는구나!


허나 우리가 집으로 가는 여정도 평탄치 않았다.  

우리가 들어가기 며칠 전,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클라우드에서 오류가 발생했고, 그 여파로 미국 들어가는 국제선들이 줄줄이 펑크가 났는데 우리가 들어가는 그 시점까지도 상황이 완전히 정상화되지 않았다. 게다가 브뤼셀 자벤텀 공항에는 Certified Wrap이라는 생소한 제도가 있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수하물로 부칠 짐이 제대로 된 패키지로 포장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 돈을 내고 공항에서 랩핑을 해야 한다는 정책이었으나, 웹 상에서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아 내가 사용하고 있는 하드 캐리어도 해당되는 건지 아닌지 구분이 어려웠다. 이럴 땐 무조건 공항에 일찍 가서 상황을 파악하는 게 제일이다. 최대한 공항으로 일찍 출발하기 위해 우버도 미리 픽업 시간을 정해 예약해 놓고 새벽같이 공항으로 향했다.


보딩 시작 4시간 전에 도착했다. 아직 체크인 카운터도 열려있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운터로 가보니 이코노미 석 체크인 줄에 서너 명이 바닥에 앉아 꾸벅꾸벅 졸며 카운터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마침 브뤼셀 항공 지상 직원이 우리 앞을 지나며 인사를 건네고는 '아직 창구 열려면 30분 넘게 남았다'며 스몰 톡을 하길래 '혹시 Certified Wrap이 뭔지 알려줄 수 있느냐'라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직원 왈, 아직 서비스 시작 안 했으니 나중에 물어보란다. 허허. 역시 여기도 유럽 맞구나.

당황스러워 옆에 서 있는 사람이랑 눈이 마주쳤는데, 갑자기 이 사람이 자기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원래 자기네 비행은 2일 전 토요일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유타까지 가는 직항 편이었단다. 근데 마이크로 소프트 사건의 여파로 자기네 비행 편이 취소되었는데, 델타에서 새로 배정한 티켓이 5일 후였다고. 5일을 예정 없이 유럽에서 버티기에는 다른 일정들이 몰려 있어 결국 이 티켓은 Void 시키고 원웨이로 브뤼셀에서 뉴욕 거쳐 유타로 가는 티켓을 다시 샀단다. 여기에 2명 티켓을 사느라 수천 불 썼다고 하소연하길래, 그럼 이거 델타 측에 보상 청구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어봤더니, 이 경우는 천재지변에 해당이 되는 거라 델타에서 보상이 안 된다고 대답했다고. 하루나 이틀 먼저 미국으로 들어가려고 했었음 나도 겪었을 일이다. 남일 같지 않은 데다 혹시 뉴욕에서 샌디에고 가는 티켓도 취소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 사람은 국제선만 운항만 이렇게 문제가 많다고 하니 괜찮을 거라며 안심을 시켜주긴 했지만, 이래 저래 집에 가는 것도 쉽지만은 않다.

브뤼셀 항공 라운지(위) 라운지마다 맥주 탭이 있지만, 벨기에 항공 라운지의 맥주탭은 좀 더 특별하다?(아래/왼쪽) 스머프가 벨기에 출신이라 스머프 젤리가 여기에(아래/왼쪽)

이 여행에서 마지막으로 라운지에서 아침을 먹고, 딸이 조말론 향수를 사다 달라고 해서 이 면세점에서 사야겠다 싶어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탑승구에 먼저 가 있겠다고 출발한 호야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 비행기 타려면 티켓 검사를 또 해야 하니 빨리 오란다. 이미 줄도 꽤 길다고.. 일단 거기에 줄 서서 기다리라고 해 놓고 허겁지겁 향수 쇼핑 후 탑승구 쪽으로 뛰었다.


역시 미국 들어가는 길은 쉽지 않다.

작년 4월 딸이아와 퀘벡 여행 마치고 토론토 공항에서 미국행 항공기 탑승 때도 입국 수속 한 번 더 밟아야 해서 하마터면 비행기를 놓칠 뻔했던 적이 있었는데, 유럽에서도 심사를 한 번 더 밟아야 하는구나. 이럴 때마다 내가 살고 있는 나라가 얼마나 들어가기 힘들고 까다로운 나라인가.. 새삼 깨닫는다.

우리가 탄 SN501편은 유로 윙스 도장이 바뀌지 않은 채 운항되고 있었다. 기종은 A333

다음은 브뤼셀 항공 비즈니스석 스케치.

아마 당분간은 비즈니스석을 이용할 일이 없을 것 같아서 여기에 기록해 둔다.

A333으로 운항되는 SN501편 비즈니스 석은 1-2-2- 혹은 2-2-1 배열로 좌석이 앞뒤로 지그재그로 배치되어 있어서 혼자 여행하는 승객도 독립적으로 앉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사실 내 앞에 앉은 1인석이 나와 호야가 앉은 2인석보다 1인당 공간 점유 면적은 더 넓었다.


역시 웰컴 드링크로 서비스를 시작한다. Nicolas Feuillatte Reserve Brut, N.V 샴페인(왼쪽)이 제공되고 있었다. 앙트레와 치즈, 그리고 샐러드까지 일단 함께 서빙되고, 빵은 승무원이 따로 바구니에 담아서 하나씩 원하는 빵을 고르도록 한다(가운데). 가운데 음식 사진 속에 치즈와 포크 중간에 있는 애피타이저가 메인 요리 접시(오른쪽) 자리에 놓인다. 나는 생선 요리를 시켰고, 레드 와인이지만 생선 요리와도 잘 어울린다는 승무원의 추천에 따라 2020년 산 상테밀리옹 그랑 크뤼인 플뤼르를 주문했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 가능한 좋은 와인들을 많이 마셔보면 와인의 세계에 조금이라도 입문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있어서 무조건 유명하다 싶은 와인을 마시긴 했는데, 역시 아직도 그 맛을 잘 모르겠다. 와인은 나에게는 아직도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두 번째 식사인 아침은 신선한 훈연된 쇠고기가 아이스크림과 함께 나왔다. 간단하고 상큼한 아침으로 제격이었다. 이걸로 밀 서비스가 끝난 줄 알았는데, 내리기 직전 브뤼셀 항공을 이용해 주어 감사하다면서 승무원들이 12개들이 초콜릿 박스를 하나씩 승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예상 못했던 선물이라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역시 초콜릿의 나라구나!


뉴욕에서 샌디에고로 가는 국내선 수속을 다 마치고 탑승구 앞으로 왔다. 앞으로 4시간을 더 기다려야 샌디에고행 알래스카 항공을 탈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곳에서는 내가 들어갈 수 있는 라운지도 하나 없었다. 남편은 4시간 동안 지겨워서 어떻게 탑승구에 있느냐고 걱정했지만, 나는 다음 일정을 걱정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을 수 있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다. 힘들었던 지난 2주, 즐거웠고, 행복했고, 의미 있었지만 이제는 좀 쉬어야 했다. 너무 피곤했다.



이렇게 해서 호야와 엄마의 세계 여행은 끝이 났다.


호야와 나는 8개국, 9개 도시를 들렀으며, 우리가 다닌 여정은 약 21,120 마일이다.

우리가 도시 간 연결에 이용한 교통수단은 비행기를 포함하여, TGV, 버스, 페리 등 네 종류였으며,  A-380, 330,  320, 333과 B- 787, 77W, 737 총 7가지 기종을 이용했다. 항공기 여행 중 들린 라운지는 모두 8군데였다. 개인적으로 비즈니스석에 장거리 노선에서 제공된 기재와 서비스를 놓고 평가해 본다면, 에바 항공과 브뤼셀 항공이 최고였다. 심지어 에바 항공은 단거리 노선이었음에도 최고의 기재와 서비스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사실 에바 항공의 인피니티 라운지도 우리가 들렀던 라운지 중에 최고로 꼽고 싶다.


호야는 제일 좋았던 곳으로 런던과 파리, 그리고 방콕을 꼽았으며, 최고의 액티비티로 A-380을 마음껏 탐색할 수 있었던 아에로스코피아를, 가장 기억나는 액티비티로는 타이 발마사지와 툭툭이를 들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우리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호야가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그리기 사작했다는 점이다. 어쩌면 항공사 지상직이 호야에게는 요원한 직업일지도 모르겠다. 허나, 이 나라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장점은 누구나 꿈을 꿀 자유가 있고, 그 꿈을 향해 달려가도 된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 꿈을 향해 우리는 오랜 기간 동안 작은 목표들을 세워 놓고 하나씩 실현해 갈 것이다. 호야가 꿈을 꾸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그 꿈을 향해 달리고 있다.


물론 이 여행을 통해 내가 얻은 숙제들도 많다.

생각보다 호야가 듣고 이해하는 능력이 많이 떨어졌다. 미국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온 녀석인데, 기내에서 어떤 일이 생겼는지 파일럿이 영어로 설명해 주는데도 이해하는 정도가 내가 이해하는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어로 책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만 뒤쳐지는 줄 알았는데, 듣고 이해하는 능력도 많이 연습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여행을 통해 내가 해야 할 새로운 과제가 부여된 것이다.


이런 핸디캡을 가진 녀석이지만, 우리 아들은 꽤 괜찮은 여행 메이트다. 책임감 있고, 듬직하고, 성실하다. 2주 넘게 둘만 함께 지내면서 동지애 같은 감정도 생겼다. 자폐인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 중 하나가 갑자기 일정이 바뀌거나 예정대로 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것인데, 이 부분도 여행을 통해 상당히 개선되었다.

고기능성 자폐인이라는 핸디캡이 결코 극복하기 쉬운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 역시도 한없이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은 내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아이들과 왜 여행을 떠나야 하는가.

누가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바로 온전히 아이들에게만 집중하고, 아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만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사실 집에서 이런 시간이 충분하다면 굳이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여행'이라는 '일상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간다는 설렘'은 부모인 내가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아이를 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여유로움이 만들어 준 심적인 여유 공간에 일상에서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아이들의 요구를 담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아이들과 여행을 떠나는 이유다.


사춘기를 아주 심하게 겪은 작은 아이가 나에게 원했던 것은 정말이지 별 것 아니었다. 둘 만의 수다, 오롯이 둘만이 함께하는 시간, 그리고 나의 웃음이었다. 큰 아이는 발달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자신을 어른으로 대접해 주고 신뢰해 주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왜 이런 사소한 아이들의 요구를 집에서는 내가 묵살했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아이들과 길을 떠날 때마다 다행히 답을 하나씩 가지고 돌아왔다. 다행히도 말이다.



이전 20화 페리 타고 도버 해협 건넌다고? 드디어 여행 마지막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