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애 낳고 나서 맞은 음력 9월 초하루 날이었다. 시댁에서 함께 살 때였는데 남편 그 특유의 “잠깐 어디 바람이나 쏘이고 오자”에 또 낚여 집을 나섰다. 당연히 우리 탈것은 그의 오토바이. 흰색 빨간색 헬멧을 나눠 쓰고 “묻지 말고 따라오라”는 그이 말대로 그저 뒤꽁무니에 앉아 따라만 갔다.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가더니 순천에서 점심을 먹고 계속 달려 당도한 곳은 돌산대교. 돌산도는 내가 몇 년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오늘은 기념으로 당신이 어려서 살던 곳에 데려가 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날은 내 생일.
전에 가끔 그때의 이야기를 했었는데 아마 그냥 넘기지 않고 새겨두었었나 보다.
일단 여수로 가서 돌산대교를 건너 우리의 목적지로 향하는 길을 찾았다. 내 어려서의 기억은 지리적, 행정상 구역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놀던 바닷가 배 만들던 곳, 빼깽이 저장소, 굴 캐던 갯바위, 바다가 굽어 보이던 목화밭, 그리고 배가 드나들던 선착장이 있는 기억의 장소를 어떻게 찾아갈지 막상 가보니 막막했다. 알고 보니 돌산도는 의외로 큰 섬이라서 선착장도 한 두 곳이 아니었고 행정상 돌산읍이라서 여러 개의 리 단위 마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지 주민에게 그저 선착장 있는 가장 번화한 마을을 알려달라고 했으나 그것은 그들이 듣기에 서울 김서방 댁을 묻는 듯이 들리는 모양이었다. 별 싱거운 사람들도 다 있네 싶어 하는 표정의 아저씨 앞에서 막막하니 있다가 얼핏 생각난 말.
“돌산 초등학교와 전에 원님이 살던 동헌 그리고 향교가 있는 곳을 찾아가려고 해요.”
“그럼 거기가 군내리여, 그리로 가믄 되겠구먼.”
내가 살던 곳이 행정구역상 ‘전남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였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내 머릿속의 아련한 장소가 현실의 구체적 지명으로 나타난 것이다. 신화가 현실로 자리한 순간이었다.
돌산 대교를 좀 지나자 도로는 곧 비포장 자갈길로 바뀌었다. 오토바이가 달리기는 조심스러웠으나 섬 옆으로 구불구불 붙어서 바다를 끼고 난 도로는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 정겨운 길은 의외로 멀어서 1시간이 넘게 걸렸고 군내리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오후가 되어 있었다.
내 기억에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내가 놀던 골목길을 찾아볼까 했으나 내 기억의 장소와는 전혀 다르게 지형 자체가 변해 있었다. 선착장 광장에 있던 내 친구 정희네 일본식 이층 집은 흔적도 없고 여기저기 빼곡히 들어찬 식당, 숙박시설과 함께 설익은 관광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내 일곱 살 적 기억을 더듬거려 찾아간 그 언덕엔 우리가 살던 집이 그대로 있었다. 그 집 마당엔 우리 엄마가 심은 동백이 20년 훌쩍 넘은 고목이 되어 푸르게 서 있었다. 그리도 넓게 느꼈던 마당의 채소밭 터도 그대로 뜰로 남아 있었다. 진료소 건물 뒤의 높은 층계 위에 서 있던 동헌은 예전의 그 고풍스러운 기와집이 아니라 현대식 시멘트 건물로 변해 있었다.
그 진료소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자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이 집을 처음에 살았던 사람이라며 사정 이야기를 하고 안을 좀 둘러볼 수 있느냐 묻자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 안에는 무의촌 보건진료소에 파견된 공중보건의가 둘 근무하고 있었다. 부엌은 비만 오면 물이 차오르던 네루식 연탄 부엌이 아니라 보일러 입식 부엌으로 개조가 되어 있었지만 엄마가 예쁜 프릴 커튼을 만들어 달았던 창이랑 문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저 부엌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집 주위로 작은 물 빠짐 도랑이 있고 거기에는 예쁜 새끼 게들이 있다는 것을 난 훤히 알고 있다. 그 야물고 작은 게 다리에 실을 묶어 동생이랑 놓았던 기억, 게 이빨에 물리면 자지러지게 아팠고 그 물린 자리가 보라색으로 부풀어 오르던 기억까지 생생했다. 어린 날의 나와 나를 따르던 4살짜리 내 동생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순간 목이 울컥 메어왔다.
전에 원님이 살았다는 동헌 마당에 자리한 진료소라 일반 마을보다 높은 곳에 자리해 있어서 전망이 좋았다. 밤에 아빠가 뭍에 가고 없는 날, 새벽녘 병원 조제실 쪽에서 유발 가는 소리가 나서 가까이 가보면 소리가 뚝 끊기곤 해서 섬뜩하셨다는 엄마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지금도 그때 그 건물 그대로였다. 진료소에 이어있는 집은 방 두 개에 부엌 하나. 그 방은 바다를 향해 툭 트여 있어서 선착장에 배가 오가는 것이 멀리로 굽어 보였다. 여수 다니러 가신 우리 엄마가 언제 오시나 기다리며 어두워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바라다보던 그 바다. 그때의 그 시간이 거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내 이야기에 몹시 놀라워하는 그들과 마당의 동백을 배경으로 어렸을 때 사진 찍었던 곳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다시 내가 다녔던 돌산 초등학교에 들러, 늘 꼴찌를 면치 못하는 달리기를 하던 운동장에도 서보고, 하굣길에 경외심을 가지고 가끔 들렀던 향교에도 가보았다. 그곳은 마을에서 떨어져서인지 변화가 덜 해 내 기억의 그 분위기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입학할 나이가 안 되니 그저 유치원 삼아 학적부도 없이 학교에 다녔던 일곱 살 꼬마가 20여 년이 훌쩍 넘어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러저러 상념에 잠긴 사이 그새 날은 거욷해져서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 한적한 섬 길을 따라 되짚어 나왔다.
여수에 도착하니 이미 밤, 오토바이로 귀가하기는 무리여서 기차를 타기로 했다. 여수역에서 우리는 기차를 타고 오토바이도 화물로 전주까지 부쳐서 우리와 동승했다. 시발역인 데다 밤이라서인지 기차 칸에는 우리만 타고 있었다. 이미 젖은 퉁퉁 불어 어깨가 아플 지경이었다. 홍익회 직원에게 컵라면을 사서는 내용물은 버리고 그이는 망을 보고 난 그 컵에 모유를 짜내면서 귀가했다.
마치 과거를 다녀온 듯 아련하고 긴 시간 여행을 한 느낌이었다.
그 후 몇 년 만엔가 우리가 포니 2를 사던 해 다시 차로 돌산도에 갔다. 길은 군내리까지 완전히 다 포장이 되어 상큼한 드라이브 코스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불과 몇 년 사이 모든 게 다 변해서 예전의 우리 집은 이미 현대식 시멘트 건물로 뜰까지 꽉 차게 지어져 있었다. 게다가 그날은 일요일이라 현관문조차 굳게 잠겨 있고 인적도 끊겨 있었다. 그날 돌산도에 갔던 기억은 포장된 도로와 굳게 잠긴 시멘트 건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의 돌산도 여행조차 정말 그곳에 갔었나 싶게 까마득한 과거의 화석인 듯 남아있다. 지금도 내 생일 기념으로 나를 내 어릴 적 추억의 장소로 데리고 갔던 그를 참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꽃이나 특별한 선물 하나 챙기는 센스가 없는 덤덤한 그이지만 내가 적당히 넘어가고 그다지 서운해하지 않는 이유다.
그날 그이는 내게 평생 우려먹을 짱짱한 보험을 하나 들어놓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