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이야기를 써 드립니다.
너무너무 힘든 하루인데 잘 털어내고 내일을 다시 맞이하는 이야기요!
여권을 재발급하라는 외교부의 문자 알림을 받은 것은 지난 해 연말이었다. 정신없는 송년 모임이 지나가고 새해를 맞이할 때에, 여자는 재야의 종소리가 울리는 그 순간에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챙겨보던 드라마인데 모임에 참석하느라 제 때 보지 못했던 드라마였다. 그러다가 핸드폰 액정에 뜬 00:04를 보고 ‘뭐야 새해잖아!’ 하며 헐레벌떡 시청하던 VOD를 멈추고 옆에서 폰을 보고 있던 애인과 갑자기 이상한 춤을 췄다. 둥실둥실. 허우적 허우적. 그날 보던 드라마를 다 보고 잠이 들기 전 여자는 애인과 설 연휴에 붙여 여행을 가잔 말을 주고받다 잠이 들었다. 확실히 가자고 정하진 않았지만, 여행을 갈지도 모르니 서둘러 여권을 재발급 받아야겠다는 말을 잠결에 떠든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나가고 있었다.
더 이상 미루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자는 요즘, 어떤 일을 하기까지 지나치게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이 계속 신경쓰였다. 의료보험공단에 해촉증명서를 보내는 일도 그랬다. 일단 계약서를 썼던 회사들에 연락까지는 바지런하게 했다. 하지만 받은 증명서들을 모아 팩스를 이용해 공단에 다시 보내는 단계에서 또 며칠을 멈춰있었다.
일단, 해촉증명서가 필요한 이유를 익히는데도 며칠이 걸렸다. 일시적인 수입이 월수입으로 잡혀서 자신이 내야하는 의료보험료가 올랐다는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대체 왜, 일시적 수입이 매월수입으로 잡히는 것인지. 일일이 해촉증명서를 받아서 모아야만, 의료보험금이 오르지 않는 것인지.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은 생각보다 번거로웠다. 회사를 다니는 친구들은 영문을 몰랐다. 가까스로 이 과정을 거친 다른 프리랜서의 설명이 적힌 블로그 글을 찾아 읽은 뒤 여자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행사 때문에 한두번 만난 어색한 관계의 기획자들에게 다시 연락을 해야 했고, 증명서에 꼭 필요한 항목을 알린 뒤 며칠을 기다려 증명서를 받았다. 그렇게 해촉증명서를 모아 다시 또 공단에 팩스를 보내야했다. 여자는 자신의 지역보험공단 팩스번호를 묻기 위해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어 문의했다가 전화를 끊기전 팩스를 보내고 10분 뒤 다시 전화를 걸어 서류가 공단에 잘 도착했는지 확인까지 해 달라는 안내를 받았다.
대학교 때처럼 사이버캠퍼스에 과제를 첨부파일로 올리면 끝나는, 그런 편리한 시스템이 없었다. 학생 때처럼 필요한 텍스트를 복사대에서 손쉽게 구매한다던가, 하다못해 컴퓨터실에 가서 직접 출력이 가능하다던가하는 인프라가 부재했다. 대형 프린터와 팩스가 구비되어 있는 오피스도 그녀에겐 없었다. 단순히 팩스 하나를 붙이기 위해 쉬는 날 집 밖에 나가야 한다는 사실도 어떨 때는 버거웠다. 홈택스에 현금영수증을 정산을 위한 핸드폰 번호를 입력하는 것도 일이었다. 그녀의 노트북과 핸드폰은 공인인증서를 저장할 수 없었다. 결국 애인의 윈도우 노트북을 빌려야만 했다. 모든 일이 번거로웠다. 스마트 시대라는데 한번에 되는 일이 여자에게는 하나도 없었다.
여자가 미리 걱정되는 지점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상담 선생님은 늘 너무 애기같다고 했다. 응당 세상을 살려면 그 정도는 다들 움직이면서 살아간다고. 여자 역시 본인이 굉장히 예민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 살려면 다 애쓰지 않나. 이런 일로 심란해져서는 안돼. 이정도 쯤은 아무렇지 않게 잘 해낼 수 있잖아. 내가 누군데. 배낭 하나 메고 혼자 남미를 누비던 사람인데! 여자는 여권발급을 위한 사진도, 의료보험 소득 조정을 위한 팩스도 모두 단숨에 처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결전의 날. 그 날은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여자가 큰맘 먹고 결제한 필라테스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하루의 시작이 중요해. 여자는 애써 잠이 덜 깬 몸을 일으켜 한 켤레에 이만원 넘게 주고 산 토삭스를 챙겨신고 꾸역꾸역 집을 나섰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도 5분을 늦었다. 준비운동을 놓쳐 목과 허리를 풀지 못한 채 여자는 곧바로 강도 높은 근력 운동들을 맞닥뜨렸다. 손목으로 상체를 받치는데 생각보다 관절이 버티지를 못했다. 손목이 아프면 박스를 받치라는 강사의 말에 여자는 펼쳤던 손바닥을 오므려 주먹을 쥐고 버텼다. 집으로 돌아온 여자가 샤워를 하려고 옷을 벗었을 때 생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운동을 나가려고 집을 나설 때보다 더 비가 많이 오고 있었다. 오늘은 꼭 사진을 찍어야해. 여자는 굳은 결심으로 옷을 찾기 시작했다. 어두운 색상의 상의는 면접을 위해 산 정장뿐이었다. 여자의 옷장은 인디핑크나 머스터드 계열의 니트, 남방들이 대부분이었다. 여자는 한참을 비슷한 색상의 옷들을 차례로 입었다 벗었다했다. 한번 찍은 사진으로 향후 10년간 버티고 싶던 여자는, 이번에 제대로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인 모양이었다. 결국 비가 세차게 오는 겨울 날, 여자는 감색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여자의 친오빠 결혼식 때 역시 큰맘 먹고 샀던 원피스였다. 여자는 올 겨울 처음으로 스타킹을 신었고, 오랜만에 화장을 했다. 눈썹을 정리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여자의 손길은 어색했다. 아이라이너를 집었다 내려놓았다 하더니, 결국은 옅은 아이섀도우만 칠한 채 집을 나섰다. 친구가 인생 사진을 건졌다는 사진관에 가기 위해 지하철에 올라탔을 때, 이미 여자는 지쳐 있었다.
스타킹을 신은 다리의 한기는 견딜만 했으나, 밑을 타고 들어오는 찬바람은 여자의 생리통을 더욱 악화시켰다. 여자는 안하던 화장을 하느라 진통제를 챙기는 일도 깜빡 잊었다. 일단은 사진관을 향해 가는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원피스에 맞춰 신은 벨벳소재의 구두코 앞은 젖어들고 있었고, 기껏 열심히 띄워 드라이한 머리도 이미 물기에 풀이 죽은지 오래였다. 괜찮아. 이정도는. 다들 이렇게 살잖아. 여자는 아픈 아랫배 대신에 우산 손잡이를 꼭 움켜쥐고 도착한 역에서 사진관까지 걸었다. 예약없이 찾았지만 다행히 10분정도의 기다림 끝에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했다. 여자의 바로 뒤에 들어온 사람은 이후로 예약 손님이 꽉 찬 관계로 서너시간 후에나 가능하다고 하니 다른날 오겠다며 바로 나갔다. 여자는 밥을 먹지 않고 사진관부터 온 일을 잘했다고 여겼다. 그러지 않았다면 오늘 사진을 찍지 못했을테니까. 무심하고 빠르게 사진을 찍은 사진사의 모니터에 여자의 얼굴사진이 떴다. 안경 벗은 눈은 렌즈에 초점을 맞추지 못했고, 헝클어진 머리도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
사진사는 능숙하게 피부톤을 정리하고, 머리숱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엇나간 초점도 자연스럽게 보정했다. 10년 전에 찍은 사진보다 여자는 훨씬 늙어 있었다. 특히 원본사진은 처참할 정도였다. 역시 아이라이너를 그렸어야 했을까. 뭔가 맹하고 힘이 없어 보였다. 보정된 사진은 원본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삐뚤어진 눈도 어느 정도 균형을 맞췄고, 메이크업으로도 덮지 못했던 피부의 결점들도 지워졌다. 더 원하는 보정이 있으면 말하라는 사진사에 말에 여자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사진은 바로 현상되었고, 상의는 사진 전체의 십분의 일 정도 되는 아주 적은 면적만 채우고 있었다. 얼굴과 목만으로 가득 찬 여권 사진에 여자의 원피스는 겨우 보였다. 대체 왜 어두운 상의를 신경 써 입지도 않은 원피스를 입고 나왔는지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옷이나 입고 나올걸. 그랬담 구두를 신지 않아도 됐을 텐데. 따뜻한 바지를 입고 나올 수 있었을텐데. 아랫배를 누가 꽉 쥐었다 놓은 것처럼 아팠다. 물컹한 무언가가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여자는 벌떡 일어나 짐을 챙겼다.
사진관을 나오니 바로 앞에 구청이 있었다. 여자는 집을 나서면서는 바로 여권 발급 신청을 할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사진을 바로 찾을 수 있는지도 몰랐으니까. 그러나 바로 사진을 받은 김에 발급신청까지 할 수 있을까 하여 길을 건너 구청 종합민원실로 들어갔다. 민원실 바로 앞에 자리를 잡은 안내하는 사람에게 여권을 신청하러 왔다고 하자, 여권기한이 남았냐는 물음을 들었다. 그렇다고 하자 안내인은 기존의 여권을 갖고 와야 신청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여자는 온 김에 기존여권 없이 신청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지에 대해 물었다. 분실신고를 하고 신청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기록에 남는다는 대답을 들었다. 여자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비바람이 부는 건물 밖으로 걸어나갔다.
진통제도 필요했고, 배도 고팠다. 허기가 생리통을 더 강화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우산의 비닐을 벗기다 말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 근처 식당을 검색했다. 애석하게도 시간은 오후 세시를 넘었고 대부분의 식당들이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백반집들은 거의 고기가 들어간 메뉴들뿐이었다. 페스코를 하고 있는 여자는 간절해진 마음으로 SNS에 **구청 맛집을 검색해나갔다. 겨우 근처 낙지볶음집에서 점심으로 낙지돌솥비빔밥을 판다는 정보의 게시글을 발견했다. 여자는 다시 외투를 단단히 여미고 우산을 넣은 비닐을 벗겨냈다. 비닐이 수거통에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바닥에 흘러내렸다. 하지만 여자는 다시 주워 담을 기운이 없었다. 눈길을 거두고 핸드폰 지도앱을 켠 채 낙지볶음 집으로 향했다.
여자는 길을 걸으면서도 예민했다. 길거리를 걷다 도보에서 마주치는 행인들이 카악 자신의 타액을 그러모으는 소리만 들어도 몸을 움츠렸다. 퉤!하고 내뱉은 침이 마침내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도 그녀는 자신의 온갖 신경을 침이 떨어지길 예상되는 곳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보지 마!’ 어쩌다 타이밍을 잘못맞춰 바닥에 떨어진 침덩어리를 보고 있자면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길거리에서 가래침을 뱉지 않는 사람만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늘 언제나 길을 걷다 보면 칵과 퉤의 연속이었다. 침을 뱉는 행인을 마주칠 때마다 그녀는 초긴장상태였다. 그 침이 나의 옷에 튀기진 않을까, 괜히 눈이 마주쳐 시비는 붙지 않을까. 이게 다 아이는 낳을 생각도 없는데 열심히 일하는 자궁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요 며칠 제때 일을 처리하지 못하고 자꾸 일이 미뤄지는 것도 호르몬의 탓이라 여기기로 했다. 다들 1월인데도 눈 대신 내리는 비에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 모두들 때가 되면 여권이나 운전면허증을 재발급 받고, 차를 사고 여행을 가며 살아가고 있었다. 아무도 여자처럼 그 모든 과정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여자는 밥을 먹고 싶었다. 뜨끈한 밥과 국물이 필요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