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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블 Mar 12. 2020

이상한 격리의 나날

자취일기_16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런 생각만으로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누워서 하루 종일 영상콘텐츠를 소비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를 본다. 자막과 영어듣기가 피곤해질 때 즈음 웨이브로 간다. 지상파 드라마들을 훑어보고 나와서는 다시 티빙을 연다. 봐야할 예능과 드라마들을 챙겨본다. 계속 누워있다.      



코로나와 함께 모든 일이 올 스톱 상태다. 편성이 결정되기 전에 더 진행할 글쓰기가 남아있지 않았다. 작업실은 안 나간 지 보름이 넘어간 상태. 섬진강에 매화라도 보러 가고 싶었지만, 이월 중순부터 시작된 마른기침이 멈출 생각이 없었다.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좁은 공간에서 숨을 몰아쉬는 필라테스도 갈 수 없었다. 사회적 거리를 두라며 모임들은 없어졌다. 다들 이렇게 봄이 오는 시간을 빼앗긴 것 같았다. 팟캐스트 역시 때마침 방학이었고, 3주간 녹음을 쉬었다. 만날 사람도 할 일도 없이, 나는 온종일 대기 상태다.      



상담소에서는 두 차례 전화가 왔다. 한차례는 3월 16일까지 모든 상담을 쉰다는 연락이었고, 그 다음은, 4월까지 휴업이 연기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상담을 너무 오래 쉬는 것이 힘들면 일정을 잡고 한번 상담할 수 있다고 했는데, 왜인지 그냥 4월에 상담을 하겠다고 말했다. 망했다.      



할 수 있는 일은, 이비인후과를 열심히 가는 것뿐이었다. 대흥역에 있는 이비인후과에서는 매번 항생제를 처방해주지 않았다. 알러지약이나 소염제 정도만 처방해주는 것. 떨어지지 않는 기침을 달고 과외를 하러 갔다가 길음동 집에 살 때 원래 다니던 이비인후과를 들렀다. 이틀치 약을 먹자마자 드라마틱하게 건조했던 코벽이 나았다. 기침은 계속 낫질 않아 2월 말부터 계속 길음동까지 병원을 간다. 그러다보니 일주일에 하루 이틀 모부의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이틀 뒤에 다시 오세요’ 라는 의사의 말만큼 든든한 게 없었다. 요즘 나에게 오라고 하는 곳이 없기 때문에. 후두 끝에 생긴 염증이 계속 낫질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 약을 꼬박꼬박 보름이 넘게 먹고 있는데, 이렇게 끈질기게 낫지 않는 증상은 살면서 처음이다.      



처음에는 호흡이 답답하고 흉통이 있어서 코로나면 어쩌지 한껏 불안해했다. 1339에 전화를 하니, 일반 병원으로 가라는 안내를 받았다. (신천지 관련이 있는지, 대구 경북 방문자인지, 외국방문이력이 있는지 차례차례 묻고 모두 아니라고 하니 병원에 가라고 했다) 이후 동네 내과에 갔다. 흉부 엑스레이와 심전도 검사 후 폐와 심장에 이상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복잡한 과정을 거친 후 이비인후과까지 가는데도 일주일 이상이 걸린 듯하다. 텅텅 빈 이비인후과에서 주사를 세 번째 방문할 때까지 맞고, 가장 최근에 내원했을 때는 알러지 검사를 받았다. 원래 비염이 있으면 원인을 아는 게 좋을 것 같다며. 내일 또 가야한다. 길음동까지... 나같이 비합리적인 동선으로 치료받는 사람이 또 있을까. 내가 대흥역에서 단순히 기관지염 때문에 길음동까지 온다는 사실을 의사선생님은 알까?     



길음동 이비인후과 선생님과 햇님 약국 약사 선생님이 요새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다. 매일 야근하느라 바쁜 애인보다 더 자주 본다. 이번 주에 가니 약사 선생님이 왜 이렇게 안 낫는 지 걱정을 하신다. 마스크 달라는 말도 안했는데 오늘 해당요일인데 안 필요하냐고 물어봐주셔서 덕분에 마스크도 구했다. 엄마는 내가 길음동에 자주 오니 좋은 모양이다. 기침에 좋다고 배를 깎아 꿀에 재워 준다. 배도, 꿀도 별로 안 좋아해서 먹는 게 곤욕이다. 그래도 기관지에 좋다고 하니 꾸역꾸역 먹는다. 저번에는 내 앞에서 진료를 보신 아주머니가 여기 의사 선생님이 잘 본다고 해서 부러 찾아왔다고- 말씀을 전하고 나가시는 걸 보며 나도 말을 섞고 싶기도 했다. 당연히 못 섞었다. 진료를 받고 나와 네뷸라이저를 손에 들고 호흡기에 뭔지 모를 기체를 쏘이고 있노라면 슬금슬금 불안도 일렁인다. 다른 사람과 비말이 섞이는 건 아닐까. 그래도 들고 있으라고 하는 시간만큼 꼭 붙들고 호흡을 한다. 나는 말을 잘 들으니까.             



시간은 넘쳐 나는데, 계속 드라마만 보고, 책만 읽고, 누워 있는다. 움직이는 일이라곤 이비인후과 병원에 오라고 한 날에 꼬박꼬박 가는 것. 글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것에 끊임없이 죄책감만 느끼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어제 드디어 랩탑을 들고 길거리로 나왔지만, 같이 들고 나온 책만 읽었다. 낑낑 거리며 랩탑을 챙겨 나온 노고가 억울해서 워드프로그램을 켰지만, 커서가 깜빡거리는 것만 멀뚱히 보다가 모니터를 덮어버렸다. 그냥, 병원이나 가자.


          

아주 이상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니고, 봄이 오고 있는데 봄이 오는지 모르겠다. 똑 떨어진 다진 마늘은 쿠팡에서도, 마켓컬리에서도 품절이라 아침에 어묵을 볶을 수 없었다. 해외 가공식품도 아닌데 품절이라니. 마늘인데. 한국인데. 품절이라니. 당분간 일본에 무비자입국을 못한다고도 했다. 몇 년 전 딱 이맘 때 즈음에 교토에 갔었는데. 가능하던 일이 순식간에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나는 말을 잘 들으니까 어떻게든 누워서 버티고는 있는데, 언제가 끝일지 몰라 무력해지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매해 봄은 항상 기다려졌지만, 이렇게 가만히 기다려야 한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행동이 ‘거리두기’라는 게 이상한 격리의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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